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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정보
저자(글) 스티븐 런치만
- 지은이 스티븐 런치만 경(1903~2000년) 비잔티움 제국사와 십자군 역사 연구의 일인자로 손꼽히는 영국의 저명한 역사가이자 언어학자다. 1903년 영국 노섬벌랜드에서 출생하여 이튼 컬리지의 예비학교를 졸업하고 캠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컬리지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언어에 두각을 나타내, 불과 11살의 나이에 프랑스어, 라틴어, 그리스어, 러시아어 등을 공부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잠깐 강의를 하기도 했으나 부친으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은 뒤로는 집필과 여행을 하기 위해 강의를 그만두었다. 런치만이 학자로서의 명성을 전 세계에 떨치기 시작한 것은 3권으로 된 저작 『십자군 역사』를 1951~1955년에 걸쳐 내놓으면서부터였다. 이어서 나온 『동방정교회의 분리』 『시칠리아의 만종』『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역시 많은 찬사를 받았다. 마지막 작품, 『한 여행자의 알파벳』은 1991년에 출간되었다. 집필 활동 외에도 런치만은 영국과 미국 대학들에서 오랫동안 강의를 했고, 대영 박물관, 빅토리아 & 앨버트 박물관, 런던 도서관에서도 역사 연구를 했다. 1958년에는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그리스와 불가리아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명예훈장을 받았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연구 활동에 전념하다 2000년 11월 1일 9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가 사망하자 전 세계의 언론은 앞다투어 애도를 표했고, 영국의<더 타임스>와 <데일리 텔리그라프>는 장문의 추도사를 싣기도 했다. - 옮긴이 이순호 홍익대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했다. 주로 외국인 회사에서 근무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주립대학에서 유럽사와 미국사를 포함한 서양사 일반을 공부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사를 영화와 연계시켜 공부하던 중 미국 현대사를 많이 다룬 올리버 스톤에 관심을 갖게 되어 그의 전기를 한국으로 가져와 번역 출간했다. 옮긴 책으로는 『살라딘』 『로버트 카플란의 타타르로 가는 길』 『시간의 딸』 『문신의 역사』, 『올리버 스톤』 등이 있다.
홍익대학교 영어교육과를 졸업했으며, 미국 뉴욕 주립 대학에서 서양사를 공부하고 석사 학위를 받았다. 『타타르로 가는 길』, 『살라딘』, 『문신, 금지된 패션의 역사』,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미국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미국사』, 『가상역사 21세기』, 『살라미스 해전』, 『발칸의 역사』, 『인류의 미래사』, 『페르시아 전쟁』, 『제국의 최전선』, 『불로만 밝혀지는 세상』, 『로마제국 최후의 100년』, 『지중해 5,000년의 문명사』, 『바다의 제국들』, 『인류의 역사』, 『비잔티움』, 『로마제국과 유럽의 탄생』, 『완전한 승리, 바다의 지배자』, 『위대한 바다』, 『발칸의 역사』, 『현대 중동의 탄생』, 『이슬람제국의 탄생』, 『지리의 복수』, 『스페인 내전, 우리가 그곳에 있었다』, 『하버드-C.H.베크 세계사 1870~1945』(공역), 『코드걸스』 등을 번역했다.
목차
- - 서문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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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장해가 지는 제국 15
. 2장 떠오르는 술탄의 나라 49
. 3장 황제와 술탄 87
. 4장 서방 원조의 대가 105
. 5장 포위전의 준비 125
. 6장 포위전의 시작 143
. 7장 골든 혼의 상실 161
. 8장 꺼져가는 희망 177
. 9장 비잔티움의 마지막 날들 193
. 10장 콘스탄티노플 함락 209
. 11장 정복당한 사람들의 운명 227
. 12장 유럽과 정복자 술탄 247
. 13장 살아남은 사람들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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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록
. 콘스탄티노플 함락사 연구에 쓰인 주요 사료 291
. 함락 후 콘스탄티노플 교회들의 운명 300
. 비잔티움 제국 연표 310
. 비잔티움과 이슬람의 통치자 315
. 비잔티움 왕조의 가계도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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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긴이의 말 323
- 주 328
- 참고문헌 358
- 찾아보기 371
출판사 서평
◆ 로마 제국의 영광을 계승하고 찬란한 문명을 꽃피우다 스러져간 비잔티움 제국, 1100여 년의 빛나는 역사를 지닌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나날들, 그 장엄하고도 감동적인 대서사시! - 최초의 기독교 도시로서 고대 문화의 마지막 피난처였던 콘스탄티노플이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함락될 때까지 과정을 장엄하고도 감동적으로 서술한 책이다.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은 1453년에 벌어진 투르크족과의 공방전과 그 전후 상황에 초점을 맞춘 책으로, 지루한 이론보다는 공방전 당시의 드라마틱한 상황이 압축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콘스탄티노플 함락의 실제 모습이 이보다 더 정확하고 감동적으로 묘사된 예는 아마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서방의 원조를 기다리며 마지막 순간까지 혼신의 힘을 쏟아부은 황제와 영웅적 분투를 아끼지 않은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의 투쟁담, 정치적으로 쇠락하는 시기에도 찬란하게 꽃피어난 비잔티움 문화, ‘정복자’ 메메드 2세의 콘스탄티노플을 향한 집념, 함락 전 하기아 소피아(소피아 대성당)에서 미사를 올리는 절박한 시민들의 모습, 파죽지세로 치고 들어오는 투르크족의 기세, 동서 교회의 오랜 갈등과 대립, 주변국들의 어정쩡한 태도, 동방정교회의 신비주의적 분위기, 체념적 운명론자인가 하면 또 불굴의 전사이기도 한 비잔티움인들의 상반된 모습, 너무도 안타깝고 아슬아슬한 순간이 많아 절로 탄식이 새어나오는 전투 장면들, 승자와 패자, 이 모든 것들이 격조 높은 역사가의 안목으로 박진감 있게 서술되어 있다. 이 책의 저자 스티븐 런치만은 영국이 자랑하는 비잔티움 역사 연구의 일인자로 전체적인 상황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독자들은 한 편의 전쟁영화를 보듯 서스펜스와 스릴, 페이소스를 맛보며 책을 읽어나갈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이 책은 탁월한 학술적 가치와 수준 높은 품격을 갖추고 있는데, 이는 저자가 수많은 사료들을 참고하며 성실하고도 정확하게 써내려갔기 때문이다. 비잔티움을 ‘추잡한 미신의 간막극’이라 말하며 노골적으로 무시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가 나온 지도 2세기가 지났고, 그 동안 비잔티움 제국을 경멸적으로 바라본 서양 사학계의 태도도 많이 바뀌었다.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은 이런 반성을 넘어 지금까지 서방에서 홀대받아온 비잔티움 제국을 새로운 관심과 애정으로 바라본 책이다. - - ◆ 새로운 로마, 콘스탄티노플 330년,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후 고대 도시가 있던 비잔티움에 자신의 이름 딴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한다. 마르마라 해와 흑해를 가르는 해협 보스포루스 서쪽 입구에 건설된 이 도시는 동양과 지중해 사이의 해상로와,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육상로의 교차로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런 지리적 이점 때문에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과 상품들로 넘쳐나는 번영을 구가하게 된다. 12세기만 해도 교외지역을 합해 인구 100만에 이르는 주민이 살 정도였다. 한편 이런 교차로라는 도시의 지리적 요인은 잦은 이민족의 침입을 불러왔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 2세(재위 408~450) 치세기에 만든 견고한 성벽으로 콘스탄티노플은 난공불락의 도시가 되었다. 이렇게 요새화된 도시 덕분에 비잔티움인들은 이민족의 침략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국제정치 무대에서 가장 막강한 세력이었고 지중해 경제와 신앙?학문?문화의 중심지였으나 지나치게 넓은 정복지로 인해 오히려 새로운 문제를 안게 되었다. 여러 종족간의 갈등, 종교적인 분열, 변방의 잦은 외적의 침입, 끊임없는 정복전쟁 등은 제국의 재정과 인력에 심각한 부담이 되었다. 이렇듯 비잔티움 제국은 11세기에 접어들면서 쇠퇴의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방의 기독교 세력과 동방의 이슬람 세력에 의해 그 영토는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주변과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일부로 줄어들게 되었다. 또한 병사와 식량의 주공급원이었던 아나톨리아의 고지대 평원을 투르크족에게 빼앗김으로써 비잔티움 제국은 더 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 ◆ 비잔티움과 로마, 영원한 종교적 갈등과 대립 한편 동방(그리스정교회)과 서방(로마 가톨릭) 기독교계는 초기부터 신학, 전례 형태, 교리, 교리의 실천 문제를 놓고 서로 틈이 벌어져 있었고 대립 또한 계속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이런 갈등 속에서 결국 성령의 발현과 니케아 신조에 ‘필리오쿠에’(Filioque, ‘~와 성자로부터’의 뜻을 가진 말로, 이 말을 받아들인다면 ‘성부와 성자로부터’라는 이중 발현이 되기 때문에, 초기 삼위 가운데 제3위격, 즉 ‘성령이 성부로부터’ 직접 발현된다고 믿는 동방정교회 입장에서는 이단이 된다)라는 라틴어 문구를 넣느냐 마느냐의, 신학적 문제를 놓고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교회는 완전히 분리되고 만다. 더구나 1204년, 4차 십자군이 창끝을 이교도가 아닌 자신들과 같은 기독교도에게 돌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면서 이제 라틴인(로마 교회)과의 단절은 돌이킬 수 없었다. 이런 수모를 당한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 이후 서방 교회와의 통합에 보인 냉랭함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 ◆ 해가 지는 제국 1261년, 비잔티움인들이 라틴인을 몰아내고 도시를 수복하기는 했지만 이미 쇠락해가는 제국을 운명을 되살릴 수는 없었다. 13세기 말, 아시아의 아나톨리아 지방에서는 오스만투르크족이 비잔티움의 강력한 적으로서 등장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1346년경 유럽에 발판을 마련한 오스만투르크족은 갈리폴리로부터 트라케·마케도니아·불가리아·세르비아 등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지중해를 장악하고 있던 베네치아나 제노바는 당시 서방에서 벌어진 내분에 휩쓸려 이를 막을 여력이 없었고, 비잔티움 제국은 자력으로 반격할 능력조차 없었다. 이후 투르크의 발칸 지방을 향한 진군은 계속되었다. 14세기 말경 극도의 곤경에 빠진 비잔티움의 마누엘 2세(재위 1391~1425년) 황제는 서방 세계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원조 여행을 떠났다. 마누엘은 이 서방 여행에서 몇 푼의 돈만 지원받았을 뿐 이렇다 할 성과는 얻지 못했다. 게다가 술탄 바예지드 1세가 콘스탄티노플로 진군중이라는 소식까지 들려와 그는 서둘러 귀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무렵 오스만투르크족의 급속한 성장은 타타르계 지도자 티무르의 주목을 끌게 되었고, 그는 1402년 앙카라에서 오스만 술탄 바예지드(재위 1360~1403)의 군대를 무찔렀다. 이렇게 티무르의 개입으로 비잔티움 제국은 겨우 목숨을 연장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죽어가는 제국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오스만의 힘이 주춤거린 것은 일시적 현상에 불과했다. 기독교계의 모든 군주들이 그 즉시 힘을 합해 오스만 제국에 대항할 수만 있었어도 투르크족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연합군을 조직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친선, 이 모두가 부족했다. 이렇게 기독교 국가들은 호기를 온전히 이용하지 못했고, 완전히 무력해진 비잔티움 제국을 더 이상 회생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편 1421년, 비잔티움 제국과 친선 관계를 유지했던 오스만의 술탄 메메드 1세(재위 1413~1421년)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무라드 2세(재위 1421~1451)가 제위에 올랐다. 그는 1423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는 했으나 이후 30년간 공격에 그다지 열의를 보이지 않고 내정에 치중했다. - ◆ ‘정복왕’ 메메드 2세의 야망, “콘스탄티노플을 내게 주시오.” 무라드 2세의 죽음으로 19세의 나이에 술탄의 자리에 오른 메메드 2세(재위 1451~1481년)는 전임 술탄의 평화 기조를 이어받아 비잔티움 제국이나 주변 여러 나라들과의 평화조약을 갱신하는 등 온화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무라드 2세의 미망인이자 세르비아 전제군주의 딸 마라를 본국으로 많은 선물과 함께 되돌려주기도 했다. 서방에서는 풋내기 어린 술탄의 유화 제스처를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메메드 2세는 자신이 품고 있던 야망, 콘스탄티노플 정복 전쟁을 준비할 동안 국경지역을 조용히 해두고 싶었을 뿐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해 비잔티움의 수도와 유산을 차지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고, 이를 달성하기 주도면밀하게 준비하기 시작했다. 1452년, 메메드 2세가 기독교계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서방측의 예상이 빗나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메메드 2세가 보스포루스 해협 유럽 쪽 가장 협소한 지역에 강력한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루멜리 히사르'라는 이 요새는 건너편 연안에 있는 아나돌루 히사르 요새와 함께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는 배들의 통행을 위협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할 터였다. 이제 그의 의도가 분명해졌다. 루멜리 히사르를 완성한 그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오가는 모든 선박은 그 요새에 멈춰 검문을 받도록 하라는 포고령을 내렸다. 11월 초 그곳을 항해하던 안토니오 리초 선장의 베네치아 선박이 검문을 거부하자, 투르크의 대포는 즉시 그들을 공격했다. 포탄을 맞은 배는 침몰했고, 선장 리초와 선원들은 포로로 잡혀 즉시 참수되었다. 이렇게 술탄의 성격과 야망에 대해 서방이 품었던 모든 환상은 베네치아 선원들의 운명과 함께 끝이 났다. 메메드 2세는 서방에서 생각한 것처럼 호락호락하고 무능한 젊은이가 아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결코 사랑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인기에도 연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지닌 지성, 에너지, 단호함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그가 한번 하겠다고 마음먹은 일을 포기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과업은 콘스탄티노플 정복이었다.” - 이렇게 콘스탄티노플 원정을 생각하느라 잠 못 이루던 메메드 2세는 어느 날 밤, 느닷없이 노재상 할릴을 불렀다. 할릴(비잔티움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했다)에게 젊은 술탄은 말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오. 콘스탄티노플을 주시오.” 메메드 2세는 최대한 빨리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할 생각이었다. 1453년 1월 말경 술탄은 모든 대신들을 모아놓고 조상이 이룬 업적을 상기시키는 일장 연설을 했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을 갖지 못하는 한 투르크 제국은 안전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렇게 술탄이 난공불락의 도시, 콘스탄티노플 공격을 결심할 수 있었던 데는 화력 좋은 대포의 개발에 힘입은 바 크다. 1452년, 헝가리인 대포 기술자 우르반이 메메드 2세를 찾아와 자신이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파괴할 만한 강력한 대포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술탄은 이 헝가리인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우르반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와 위력을 가진 대포를 만들었다. 이렇게 모든 준비는 끝났다. 전임 술탄 무라드 2세가 남긴 군사개혁으로 막강한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고, 루멜리 히사르 요새 건축으로 보스포루스 해협에 대한 통제권이 확보돼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완벽한 봉쇄가 가능해졌으며, 견고한 성벽을 무너뜨릴 대포도 주조해놓은 상태였다. - ◆ 비잔티움 제국을 구하기 위한 황제의 노력 한편 이런 어려움에 봉착한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재위 1449~1453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 역시 비잔티움 구조의 희망을 선왕과 마찬가지로 서방에 걸었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사절을 보내 서방에 도와줄 것을 요청했지만 그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교황은 원조 문제를 동방정교회와 가톨릭교회의 통합 문제와 결부시켰다. 그러자 황제는 교회통합을 밀어붙임으로써 서방의 지원을 받으려 했다. 그 무렵 교회통합 찬성파로서 키예프와 전(全) 러시아의 수도대주교였던 이시도로스는 로마 교회의 추기경이 되어 적은 규모이긴 하지만 원조부대를 데리고 콘스탄티노플에 왔다. 그가 데려온 병사들을 환영을 받았다. 더구나 그 즈음에 발생한 베네치아 리초 선박의 격침 사건으로 서방측의 원조는 더욱 절실해졌다. 황제는 재빨리 이 열기를 교회통합으로 몰아가려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12월 12일 하기아 소피아에서 동서교회 통합의 율령이 공표되었다. 하지만 수도사들과 일반 시민들의 반발은 엄청났다. 동방정교회 대표들은 통합 문서에 서명을 거부했고, 일반 시민들은 통합 예배를 드린 장소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교회인 하기아 소피아에 발길을 끊어버렸다. 자신의 교리와 신조를 저버린 배교자들에게 더럽혀진 장소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었던 것이다. 교회통합 공표 후, 서방 함선과 원조 부대가 재빨리 도착하기만 했어도, 교회통합이 가져다주는 실제적인 이득 때문에 백성들은 전반적인 지지를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 ◆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1453년 4월 초 메메드 2세는 도시 성벽 아래 막강한 군대를 집결시켰다. 천혜의 입지 조건인 콘스탄티노플의 위치와 튼튼한 성벽은 전에도 종종 도시를 어려움에서 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메메드 2세에게는 우월한 무기와 강력한 포병부대가 있었다. 술탄은 이슬람법에 따라 휴전 깃발을 앞세우고 도시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자발적으로 항복하면 이슬람법에 따라 가족과 재산의 침해 없이 시민들은 살려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가차 없이 처벌받게 될 것임을 경고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그의 약속을 믿지 않았고, 이제 와서 황제와 도시를 버릴 마음도 없었다. 이런 형식적 절차가 끝나자마자 투르크군은 대포를 배치시키더니, 성벽에 마구 포탄을 퍼부으며 전투를 개시해왔다. 비잔티움측은 26척의 선박이 있었는데, 베네치아 선박 5척, 제노바 선박 5척, 크레타 선박 3척, 안코나 선박 1척, 카탈루냐 선박 1척, 프로방스 선박 1척, 그리고 황제의 선박이 10척이었다. 투르크군의 대함대와 비교하면 아주 보잘 것 없는 소함대였다. 육군의 병력 차는 더욱 컸다. 4,983명의 그리스인과 약 2,000명의 외국인, 도합 약 7,000명의 기독교도는 8만 명에 육박하는 정규군과 엄청난 비정규군을 부대를 보유한 술탄의 군대와 맞서서 싸워야 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엄청난 대군에 맞서 싸워야 하는 비잔티움측은 단합조차 되지 않았다. 베네치아인은 베네치아인 대로 그리스인들을 경멸했고, 비잔티움인(그리스인)은 그리스인대로 베네치아인을 싫어하는 형편이었다. 또한 골든 혼 건너편 페라에 살고 있는 제노바인들은 중립을 표방하고 있었는데, 이는 그리스인과 베네치아인 모두에게 증오의 대상이었다. 4월 7일부터 본격적인 포위전이 시작되었다. 투르크군의 공격은 주로 육지 쪽 성벽을 향해 퍼부어졌다. 골든 혼은 방재구역(쇠사슬)으로 봉쇄되어 있어, 투르크군은 이를 뚫을 수가 없었다. 4월 20일 벌어진 해전에서는 발토글루가 이끄는 투르크군이 패배하고 황제의 함대가 승리했다. 이 승리로 기독교군은 고무되었다. 하지만 이런 승리의 기쁨도 잠시였다. 봉쇄된 골든 혼을 장악하기 위해 도로를 건설한 투르크군은, 보스포루스 해안가에 있던 투르크 선박들을 황소를 이용해 육지로 끌어올렸다. 이런 엄청난 광경을 목도한 기독교군은 경악하고 말았다. 방재구역을 뚫지 못하자 술탄은 이런 방법으로 골든 혼을 장악하는 대담성을 보인 것이다. 이제 도시는 육지에서뿐만 아니라 골든 혼 쪽에서도 포격을 받기 시작했다. 적은 수의 방어군들은 결사적으로 싸우며 자신들의 운명에 저항했다. 그런데 그 무렵 불길한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제국의 멸망에 대한 예언을 떠올렸다.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황제는 최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사람이 될 것이다,’ ‘달이 차 있는 동안은 결코 도시가 망하지 않는다.’ 5월 24일에 뜬 달은 만월이었다. 이제 곧 달이 기울면 위기가 닥쳐올 것이었다. 더구나 만월이 된 그날 밤 일식 현상이 일어나면서 세 시간 동안 도시는 암흑천지로 변했다. 다음날, 성모상을 걸머지고 최후의 기도를 올리며 행진하던 중 성모상이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서 있기 힘들 정도의 뇌우가 몰아쳤고, 이튿날은 도시 전역에 안개에 휩싸이기도 했다. 거룩한 존재가 도시를 떠나가기 위해 구름 속에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것 같았다. 그날 밤 안개가 걷힌 후 소피아 성당의 돔 지붕에 이상한 빛이 어른거리는 것이 눈에 띄었다. 투르크군 진지에서도 이 빛이 보였으나 이슬람의 현인들은 그것을 진정한 종교의 빛이 곧 성스런 건물을 비추게 될 것임을 보여주는 징조로 해석했다. 하지만 비잔티움측에는 그런 희망과 용기를 주는 해석이 없었다. 전부터 내려온 불길한 예언을 떠올린 방어군들은 패배감에 휩싸이고 말았다.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신하들은 황제에게 도시를 떠나 밖에서 전쟁을 지휘할 것을 여러 차례 간청했다. 하지만 황제는 침착하고 단호하게 최후의 순간까지 이 도시를 지키겠다고 말했다. 황제 자신은 그의 신앙, 도시, 백성을 위해 기꺼이 죽을 각오가 돼 있음을 밝혔다. 기독교군들 사이에서 희망은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비관주의와 좌절감이 팽배해 있기는 투르크 진영도 마찬가지였다. 공격을 시작한 지 7주가 지났지만 이렇다 할 전과도 얻지 못한 투르크군도 자신감을 많이 상실했다. 5월 26일 술탄은 각료회의 열어 앞으로 있을 총공격을 명령했다. 이제 마지막 결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 ◆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투르크 진영이 총공격을 준비하는 동안, 기독교도들은 도시 전역에서 하기아 소피아로 모여들었다. 지난 5개월간 그리스인들은 로마 교회와의 굴종적인 교회통합을 거행한 하기아 소피아를 찾지 않았다. 그러나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서는 비잔티움인 최고의 성당인 이곳을 찾은 것이었다. 5월 29일 메메드 2세는 총공격을 개시했다. 새벽 1시 반경 정적을 깨는 소리와 함께 습격이 시작되었다. 방어군들은 필사적으로 적의 공격에 대항해 싸웠다. 술탄은 비정규군 바시 바조우크, 아나톨리아 부대를 순서대로 투입했다. 그들이 특별한 전과를 올리진 못했으나 방어군을 지쳐나가 떨어지게 한다는 작전은 성공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술탄은 자신이 아끼는 최정예군 예니체리를 투입했다. 그들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일사불란하게 전진하면서 방책을 무너뜨리고 성곽용 사다리를 걸쳤다. 기독교도는 휴식한 틈도 없이 오스만의 제국의 최정예부대와 맞서 싸워야 했다. 네 시간 이상 전투가 계속되자 기독교도의 힘은 모두 고갈되었다. 그때 공격을 마치고 돌아오던 어느 기독교도 돌격대원이 케르코포르타라는 비상문에 빗장 지르는 것을 깜박 잊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을 안 투르크군 몇 명이 문 안으로 진입했다. 그런데 그 순간 최악의 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다. 포탄 하나가 육지 성벽의 지휘관 주스티니아니를 맞췄던 것이다. 부상당한 그는 황제에게 싸움터에서 자신의 몸을 빼내달라고 부탁했다. 주스티니아니가 치명상을 입고 실려나가자 방어군의 대열에 혼란이 일었다. 이 혼란을 틈타 투르크군들은 성벽의 높은 탑 위에 투르크 제국의 깃발을 꽂아놓았다. “도시가 점령됐다!” 이 외침으로 투르크군들의 성벽 내 진입은 더욱 가속화했다. 그들과 맞서 싸운 황제와 비잔티움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불굴의 용기와 영웅적인 분투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도시는 곧 투르크인들의 손에 떨어졌다. 항복하지 않고 저항한 도시의 운명답게 약탈이 자행되었다. 성물과 책, 집, 교회, 궁궐 등이 파손되었다. 포로가 된 자들은 대부분 살해되거나 실종되거나 팔려갔다. 저녁 때 이르러서는 더 이상 약탈한 물건이 남아 있지 않을 정도였다. 투르크 병사들에게 사흘간을 약탈을 허락했던 술탄은 약탈 중지 명령을 내렸다. 이미 상당수 약탈했으므로 병사들은 별 불만이 없었다. 술탄은 병사들의 학살과 약탈이 어느 정도 끝나고 질서가 잡히기 시작한 오후에 승리의 입성을 했다. 자신의 최정예 부대의 호위를 받으며 말을 타고 하기아 소피아로 갔다. 성당 앞에 멈춰서서 신에게 겸손함을 표하기 위해 흙을 한 줌 집어 자신의 터번 위에 쏟아부었다. 그런 다음 그는 성당으로 들어갔다. 어느 병사가 성당 바닥의 대리석을 뜯어내려 하는 것을 보고 공공건물을 파괴는 약탈의 범위에 속하지 않는다며 제지했다. 그리고 알라 신에게 영광을 돌리고 경의를 표했다. 21살의 정복자, 술탄 메메드 2세는 모든 야망을 이루었다. 콘스탄티노플은 그의 것이었다. 그는 이제 투르크 제국의 술탄일 뿐 아니라 옛 로마 제국의 계승자 겸 주인이기도 한 것이다. - ◆ 1453년, 비잔티움 역사의 종말 기나긴 인간의 역사에서 1453년이라는 해는 별 상징성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비잔티움 제국은 어차피 망하게 되어 있었다. 쪼그라들고, 인구도 턱없이 적고, 쇠잔해진 상태에서 투르크족이 작정하고 들이닥치기만 하면 언제라도 무너질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453년 5월 29일은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그것은 비잔티움 역사의 종말이었다. 1,100년의 역사를 지닌 그 도시는 지식인들의 숭배의 대상이었고 그리스, 로마의 고전 학문 및 지식이 연구, 보존된 곳이었다. 비잔티움 주석가와 필경사가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고대 그리스 학문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통치자들이 수세기 동안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예술의 한 유파를 고무, 장려했던 곳도 이 도시였다. 그것은 예술품을 신(神)의 인간화와 사물의 신성화로 보았던, 다시 말해 사물 본래의 합리성과 심오한 종교성을 냉철한 그리스적 감각으로 변화무쌍하게 혼합한 예술이었다. 그런가 하면 그곳은 또 거대한 코스모폴리탄적 도시이기도 했다. 그 안에서 시민들은 교역상의 의견을 자유로이 교환하면서, 그들 스스로를 인종적 결합체가 아닌 기독교 신앙으로 신성화된 그리스와 로마의 계승자로 여겼다. 1453년 도시의 함락으로 눈부신 비잔티움 문명은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비잔티움 학자들이 대거 도시를 탈출하면서, 유럽 르네상스 운동에 그리스 학문의 대량 확산이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기본정보
ISBN | 978899080906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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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출시)일자 | 2004년 09월 02일 | ||
쪽수 | 384쪽 | ||
크기 |
148 * 210
mm
|
||
총권수 | 1권 | ||
원서명/저자명 | (The) fall of Constantinople/Runciman, Steven |
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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