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원권 보장 새 길 될까…‘국회 국민동의청원’ 사용설명서

2020.01.25 16:23 입력 조문희 기자

국민동의청원 사이트 갈무리. 경향신문.

“정부가 나서서 디지털 성범죄와의 전쟁을 추진해야 합니다.” 지난 21일 대한민국 국회 ‘국민동의청원’ 사이트에 올라온 게시물 일부다. 역대 세 번째로 공개된 해당 국민동의청원은 25일 현재 1247명의 동의를 받았다.

‘국민동의청원’은 지난 10일 새로 만들어졌다. 지난 9일 국회 본회의에서 국회청원심사규칙 개정안을 포함한 198건의 민생법안이 통과되면서 설치 근거가 마련됐다. 사이트에 청원서가 공개된 후 30일 이내에 10만명이 동의하면 법률 제·개정, 공공제도·시설운영 등에 대해 국회에 청원할 수 있다.

청원은 이전까지 제한적으로 이뤄졌다. 청원은 시민이 국가기관에 대해 일정한 사안에 관한 자신의 의견이나 희망을 진술하는 일이다. 헌법에 보장된 시민의 권리다. 문제는 까다로운 진술 절차였다. 국회법 제123조 제1항은 “국회에 청원을 하려는 자는 국회의원의 소개를 받아 문서로 작성한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국회의원을 끌어들이지 못하면 청원할 수 없었다.

청원 절차를 규정한 국회법의 해당 조항을 시민들이 문제삼기도 했다. 2005년 ㄱ씨는 자신이 대표를 맡은 소송이 대법원에서 기각되자 대법관들을 탄핵해달라는 취지로 국회에 청원하려 했다. 국회의원의 소개를 받지 못해 청원서를 제출하지 못했다. ㄱ씨는 당시 국회법이 청원권과 평등권을 침해한다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했다. 당시 헌재는 기각 결정을 내렸다.

지난해 4월 국회가 국회법 제123조 제2항을 신설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해당 조항은 국회규칙에 따라 전자청원 시스템을 구축·운영한다고 규정했다. 기존의 국회의원 소개 청원제도는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전자청원이라는 청원의 새 도구가 생겨났다.

국민동의청원은 일정 수 이상 시민의 동의를 받아야 청원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2017년 8월부터 운영되고 있는 청와대 국민청원과 닮았다. 하지만 청와대 국민청원의 청원 성립 요건이 국민 20만명 이상 동의인 데 반해 국민동의청원은 10만명의 동의를 받으면 돼 상대적으로 성립이 용이하다.

사전 동의를 받은 청원만 게시판에 공개된다는 점도 비슷하다. 국민동의청원은 청원 등록 시 자동 생성되는 주소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통해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 30일 이내 100명 이상의 사전 동의를 받아야 한다. 청와대 국민청원은 초반 모든 게시글을 홈페이지에 공개했으나 지난해 3월 중복, 허위, 비방 청원을 방지한다며 사전 동의제를 도입했다.

다만 국민동의청원은 사전 동의 절차 이후에도 7일 간 청원법, 국회법에 의거한 청원 요건 심사를 거쳐야한다는 점에서 조금 더 공개요건이 까다롭다. 국민동의청원이 생긴 지난 10일 이후 국민동의청원 게시판에 공개된 게시물은 25일 현재 3개인 반면 청와대국민청원 게시판에는 같은 기간 223개의 글이 올라왔다.

청원의 효력은 국민동의청원 쪽이 클 수 있다. 법적 근거가 없는 청와대 국민청원과 달리 국회법에 도입근거를 두고 청원법의 적용을 받아 운영된다. 청와대 국민청원은 청원에 20만명 이상이 동의해도 해당 청원의 내용에 정부 관계자가 답변하는 것으로 처리가 완료되지만, 국회 국민동의청원은 청원이 성립되면 국회가 이를 소관 상임위원회에 회부하여 심사할 의무를 지게 된다. 본회의 상정 및 표결까지 진행될 수 있어, 실제 법 만들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현재까지 공개된 3건의 국민동의청원 중 1호는 “오토바이에 대한 자동차 전용도로 통행금지 해제에 관한 청원”이다. 오토바이가 자동차 전용도로 진입할 수 있게 허용해 달라는 것이 해당 청원의 골자다. 청원인 장 모 씨는 “오토바이는 도로교통법상 자동차에 속하지만 도로 통행을 제한받고 있다”라며 “OECD 국가 중 이륜차가 고속도로에 진입하지 못하는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다. 국민은 누구나 행복추구권이 있고 통행의 자유가 있다”라고 주장했다.

청원 2호는 ‘텔레그램에서 발생하는 디지털 성범죄 해결에 관한 청원’이다. 청원인 최 모 씨는 “지난해 11월 ‘n번방 사건’으로 불리는 텔레그램 성 착취 사건이 언론을 통해 보도됐지만, 유포자 일부가 검거되었음에도 여전히 유사한 성격의 채널이 버젓이 운영되고 있다”고 했다. ‘n번방 사건’은 지난해 2월부터 일부 남성 가해자들이 여성을 협박, ‘노예’로 만들어 사진 및 영상 촬영을 강요하고 텔레그램을 통해 판매한 사건을 뜻한다. 최씨는 국회에 경찰의 국제 공조 수사, 수사 기관의 디지털 성범죄 전담부서 신설, 2차 가해 방지를 포함한 대응 매뉴얼 제작, 디지털 성범죄에 대해 엄격한 양형 기준 설정 등을 요구했다.

청원 3호는 불법촬영물 유출 등 디지털 성범죄에 대해 유포자 강력 처벌 등 국가의 역할을 촉구했다. 세 청원의 마감일은 오는 2월 13일, 14일, 20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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