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브릭 감독의 시계태엽 오렌지.
감명깊게 보고 몇 글자 적어봤습니다..
사실 학교에 레폿을 냈습니다. ㅠ_ㅠ 이 말을 써두는 이유는 혹시 교수님께서 웹에서 이걸 발견하시고 배꼈다고 할까봐서 입니다. 레폿을 먼저낸거라구요. 머 아무튼 부족한 글이나마 읽어보시고 흥미 생기시면 영화도 한 번 보세요. :)
0. 영화 소개
앤서니 버지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로서, 원작 소설도 상당한 논란이 되었거니와, 스탠리 큐브릭이 영화로 만든 작품은 선정성과 폭력성이 극심하였다. 더군다나 이 영화가 나왔을 당시는 1971년. 이 충격적인 영화는 본국에서인 영국에서조차 20년 동안 상영이 금지되는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지금의 시점에서 요새 영화들과 비교한다면 그렇게 대단한 충격도 아니지만, 그 때 당시를 생각한다면 이 영화도, 앤서니 버지스의 원작 소설도 상당한 모험수를 둔 것이었다. 그 때 당시가 어쨌든 간에, 현재 이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는 영화사 전체적으로까지 거론될 정도의 걸작으로 남아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충격'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단순히 시각적인 것에서 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을까?
이 글은 영화 초기의 알렉스의 모습을 분석함을 통해서 알렉스가 개인적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이 사회화되지 않은 본성으로서의 악임을 알아보고, 이에 대하여 그러한 본성을 제거하려는 국가와 사회의 폭력이 어떤 양상으로 드러났는지 비교해봄을 통해서 그것이 지니는 의미를 파악해보려 한다.
1. 사회화되지 않은 본성으로서의 악
'시계태엽 오렌지'는 알렉스의 도발적인 얼굴을 화면에 꽉 차게 담음으로써 영화가 시작된다. 주인공 알렉스는 길거리를 다니면서 악을 일삼는 불한당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알렉스가 보이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불한당들이 할 만한 행동과는 다르다.
알렉스가 하는 폭력적 행위는 암울한 사회적 분위기와 대조적으로 '유아적'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만큼 '순수한' 양태를 보인다. 이 영화에서는 알렉스를 맡은 배우가 나이가 있어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실제로 앤소니 버지스의 원작 소설인 '시계태엽 오렌지'에서는 알렉스의 나이가 10대로 묘사되어서 이러한 설명을 할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된다.
일단 맨 처음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알렉스와 그의 일당들이 마시는 것은 '술'이 아니라 환각제를 첨가한 '우유'이며, 그들이 입고 있는 옷 위에는 기저귀 모양의 보호대가 차여있는 상태로 등장하여 이러한 느낌이 들게 한다. 그리고 그들이 우유를 마시는 '코로바 밀크바'의 식탁은 여자의 나체가 마치 성행위를 하는 듯한 자세로 놓여 있다. 이는 물론 작가의 인터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에로티시즘이 예술의 주류로 들어선 미래 사회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알렉스의 유아적 행태와 관련시켜 본다면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제어를 하기가 힘든 사춘기 시절의 내면의 모습이 형상화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곳에서 우유를 마시고 나온 일당들은 범죄 행위를 시작한다. 일단 어두운 터널에 누워서 노래를 부르는 노인에게 단지 '심리적인 불쾌감'을 느끼고 폭력을 행사한다. 그 이후에도 이 일당들은 여자를 겁간하려 하는 다른 패거리와 이유 없이 한 바탕 싸움을 벌이고, 남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죽어라 죽어'를 외치면서 빠른 속도로 드라이브를 한다. 드라이브 이후에 들어가게 된 집에서는 더 가관인 모습을 보여준다. 일단 그곳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단지 '과격한 폭력성을 과시'하기 위해서이며 그곳에 있는 늙은 노부부를 폭행하고 그 집의 여주인을 강간한다. 이러한 행위를 하면서도 주인공 알렉스는 'singing in the rain'을 흥얼흥얼 거리며 남편을 눕혀놓고 '잘 관람하라'고 까지 말해준다. 그들은 밤에 이러한 행위를 한 후 코르크 밀크바에 돌아와 어떠한 '도덕적 죄책감'같은 것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피곤함'과 '지침'만을 느낀다. 밀크바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에 대해 그의 부하인 딤이 비웃자 그는 그것을 이유로 딤과 목숨을 걸고 한 번 싸우려는 식의 발언을 함으로써 그의 자기중심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집에 돌아와 자신의 방에 들어 간 후 자신이 좋아하는 베토벤의 합창을 들으면서 못 박힌 예수의 상으로 그의 시선이 가게 되고(이는 교도소에서 그가 예수를 못박는 병사의 역할을 하고 싶다는 대목으로 봐서 그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소재로 볼 수 있다.), 흡혈귀, 열차 폭발, 산사태, 교수형과 같은 폭력적인 이미지들을 떠올리는 그의 생각이 형상화 된다. 그러한 이미지들을 떠올리며 그는 '천상이 있음을 어찌 의심하랴'를 외치면서 즐거워한다. 그 다음날에는 앨범을 구경하고 있는 여자들을 꼬여서 하루 종일 (자신의 패거리들과 모이는 것을 잊을 정도로) 난잡한 성행위를 벌이기도 한다.
이러한 행위들과 사고들을 나열해놓았을 때 일반적으로 우리가 가장 처음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썩 유쾌하지 않은 감정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행동 또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일차적 감정을 관철시키기 전에 도덕이라는 것의 본질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도덕은 기본적으로 나 혼자만이 사는 곳에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타인을 전제했을 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이다. 타인을 나와 동등한 인격을 가진 존재로 인식할 수 있는 충분한 이성을 갖춘 사람일 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 도덕규칙을 위반한 것을 이유로 비난을 가할 수 있다.
성악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을 때 도덕적 행위를 하는 것은 천성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교육과 처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과정이 바로 '사회화'의 과정이다. 즉 우리는 우리와 다른 타인을 인정하고, 그들이 우리와 동등한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회성이 갖추어졌을 때 한 인간은 사회적으로 '태어나고', 도덕적인 행위가 가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회화가 된 우리도 가끔씩은 기본적으로 참을 수 없는 상황에 닥쳤을 때는 폭력성을 외부로 표출하기도 하고, 때로는 폭력이 표현된 영화 또는 스포츠를 할 때에 일정한 '폭력적'인 본성을 느끼기도 한다. 특히 성적인 것에 대해서는 성적인 욕망의 억제가 힘들었던 사춘기 시절이 대부분 있었음을 생각해본다면 알렉스가 행하는 행동들이 도덕적이진 않더라도 알렉스가 상징하고 있는 '폭력', '성욕' 등의 파괴적 본성이 인간의 내부에 어느 정도 본성으로서 내재되어 있음은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알렉스가 하는 행위들은 물론 '옳은' 행위는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악'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미명하에 긍정하지는 못하겠지만 '사회화'가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려운 알렉스를 도덕적으로 비판하기는 어렵다. 알렉스가 보이는 유아적인 행태들, 폭력 자체를 즐거워하는 '순수한' 모습을 고려해 볼 때 알렉스는 이러한 점에서 '이성'과 '도덕'의 대립항인 '사회화되지 않은' 인간의 '악한 본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알렉스가 보여주는 악은 그것이 어떠한 목적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순수하고 본성적인 악이고, 그렇기에 알렉스는 '악한 본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주장은 여러 장면을 통해서 드러난다. 알렉스가 하루를 마무리 하면서 얻은 수확을 모아놓는 서랍에는 돈과 시계 따위 들이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했다는 듯이 널브러져 있고, 음반 가게에 찾아가기 전에 잡지를 훔쳐다가 그 내용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시 다른 가게에 내려놓기도 하는 데 이러한 행위들은 그가 아무런 계산적인 사고나 판단을 거치지 않고 본능적으로 악한 행위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알렉스에게 빈정이 상한 딤이 '명령과 규율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많이 쓴다'라는 말을 하자 그것에 대해 매우 불쾌해 하는 모습을 보이며, 그 이후에 보석과 같이 아주 큰 것을 훔쳐 부자가 되자고 하는 제의에는 '차는 길거리에서 구할 수 있고 여자가 필요하면 꼬시면 될 일'이라고 얘기해서 '어린애 같다'는 핀잔을 듣는데 이는 그의 '악'이 단순히 본성적인 욕구 충족에 충실한 순수한 '악'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이러한 그의 본능에 충실한 감정 상태는 극 전체에 나타나고 있는 각종 에로티시즘적 예술 상징들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주인공과 그 일당들이 자주 가는 코르크 밀크바의 나체 여성을 상징하는 식탁들, 그리고 주인공 집 앞에 남성의 성기 부분에 되어 있는 낙서들과 같은 성적인 모티프가 담긴 상징들은 주인공의 성적인 욕망과 그리고 그와 연결되는 폭력적인 본성을 잘 드러내준다. 특히 마지막에 알렉스가 잡혀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캣우먼 살해 사건에서 그녀는 고전적인 형식으로 제작된 흉상을 들고 알렉스를 죽이려 하고 알렉스는 거대한 남근 모양의 조형물을 들고 마치 장난을 치듯이 즐거워하다가 그녀를 그 조형물로 살해하게 되는 장면은 그러한 사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마지막으로 주인공의 이러한 캐릭터는 그의 이름인 Alex 또는 Alexander the Large라는 이름에서도 드러난다. 그의 애칭인 Alex라는 단어의 조합을 생각해 보면 a와 lex로 이루어져 있는데 lex는 현대 영어에서의 law를 의미하는 것이고, a는 어떤 말의 앞에 붙어 그것을 부정하는 의미를 주는 접두사로 쓰임을 고려해 볼 때 이 단어의 의미는 어떠한 규칙이나 규율을 고려하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데, 이는 사회화 되지 않은 채로 본능에 충실한 행위를 하는 그의 모습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Alexander the Large 혹은 Alexander the Great는 '알렉산더 대왕'을 의미하는 이름으로 폭력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그의 이미지와 알렉산더 대왕의 이미지는 매우 흡사하여 이러한 작명이 그의 성격을 가늠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알렉스는 자기중심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알렉산더 대왕'과 같은 존재기에 그에게 친구란 것은 없다. 친구는 기본적으로 타인의 존재를 나와 같은 인격을 가진 존재로 파악하는 도덕적 바탕이 전제가 된 개념이기 때문에, 악한 본성 상태에 머무른 그에게 친구가 있을 수가 없다. 그는 같이 다니는 패거리를 친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하로 생각할 뿐이다. 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베토벤의 합창을 부르는 여가수를 빈정거리는 조지를 공격하고, 여차하면 싸워서 죽일 수도 있다는 대사를 하는 것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그는 그 이후에 자신에게 불만을 표시하던 조지와 딤을 어떻게 해 줄까 고민하던 찰나에 '차가 지나가면서 한 소절의 베토벤 음악을 흘리자' 골치 아프게 고민 하지 말고, 즉각적인 영감에 따라 행동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하자마자 그는 조지와 딤을 폭행한다. 이는 앞서 언급한 그의 본성으로서의 악의 특성과도 잘 들어맞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러한 자기중심적 행위는 그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고이기 때문에 결국 그들의 불만을 사게 되고, 그는 캣우먼을 살해하고 나오는 길에 자신의 일당들에게 배신을 당하여 경찰에게 검거되고 만다.
2. 알렉스에게 주어지는 국가의 폭력 - 수사기관 및 교도소
알렉스는 범죄현장에서 경찰에 검거되어 결국 수사기관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알렉스는 본성에 충실하여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못하고 자신도 법을 안다며 변호사를 불러달라고 요청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알렉스를 계도하기 위하여 수사기관은 '폭력'으로 응수한다. 상처부위를 누르고 알렉스를 구타한다. 이때 알렉스의 훈육관은 알렉스를 가르쳐야 할 '선생'임에도 불구하고 알렉스에게 겁을 주고 알렉스에게 침을 뱉는 데, 이는 앞의 장면에서 묘사되었듯이 그가 알렉스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구제하려는 마음 보다는 알렉스가 사고를 치지 않게 억누르는 정도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려 하는 소극적인 행태만을 보였던 것과 상응한다.
어떠한 동정과 이해 없이 '국가기관에 의해' 폭력을 당한 알렉스가 자신의 죄과를 인정할 리가 만무하며, 또한 이는 국가가 필요 이상의 권력을 남용한 국가의 폭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기에 알렉스는 그 이후 과정에 대해서도 자신이 당한 것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자신이 재판을 받는 과정을 '험악한 말이 준엄하게 포장되는' 과정으로 묘사하고, 자신의 죄과보다는 '주위 사람들을 실망시켰다'는 생각만을 하게 된다. 교도소에서는 자신의 이름 Alexander de large 대신 하나의 번호로 불리게 되고, 간수에게 다가갈 때 흰 선을 넘지 못하게 하고, 물건을 공손하게 올려놓게 한다. 나중에 교도소 생활을 하면서도 난폭한 간수들이 종종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등 알렉스에 대해 가해지는 폭력은 여전하다.
이러한 국가의 폭력은 명백한 인권 침해 행위로서, 국가가 부당한 폭력을 행사하는 유형중의 하나이다. 특히 수사단계에서 알렉스가 때려 눕혀진 상태에서 선생님(훈육관)과 수사관들을 올려다보는 구도는 국가가 개인을 폭력을 통해 억압하려는 모습을 잘 보여주며 보통 영화에서는 이러한 절차적 정의의 훼손이 영화의 주된 주제의식으로 차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알렉스는 이러한 외부적 폭력에 의해서는 자신의 본성을 잃지 않는다. 물론 교도소 안에서 외부적으로는 공손한 말투로 말하며 성경책을 읽는 모범 수감수가 되었다. 하지만 목사가 지옥의 존재를 역설할 때도 그러한 것들이 전혀 감화를 주지 못했다고 평가하고 있으며, 성경책을 읽으면서도 '예수를 채찍질 하는 사람'이나 '전쟁의 병사'가 되는 상상, 여자 노예들의 품에 있는 상상 등을 하는 것 등을 통해 교도소 생활을 '참아'낸다. 즉, 교도소에서의 외부적인 폭력은 알렉스의 본성에 영향을 미치는 데에는 불충분했음을 알 수 있다.
3. 알렉스에게 주어지는 국가의 폭력 - 루드비코 법
하지만 알렉스가 루드비코 법을 통해 감화원에서 받았던 행위는 알렉스의 본성이 직접적으로 억압당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알렉스는 그 곳에서 이상한 약을 식사 후마다 맞으면서 영화 몇 편을 보게 된다. 클립을 꼽아 눈꺼풀이 위로 잡아 올려져 눈을 깜빡거릴 수 없게 한 후에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영화들을 계속 보여주는 폭력적이고 강요적인 치료를 계속하게 되고 약물의 효과와 겹치게 되어 결국 주인공은 속이 메스꺼워져 토하게 되는 상태에까지 이른다. 의사는 이러한 방법을 통해 '테러와 무기력증을 섞은 죽음'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알렉스가 폭력적인 행위를 하려고 할 때는 속이 메스껍게 만든다. 그리고 주인공이 좋아하는 베토벤 교향곡을 폭력적인 영화에 집어넣음으로써 주인공이 고통을 느끼게 하는 방식도 사용한다. 알렉스는 이러한 요법 때문에 자신이 좋아하던 베토벤 9번 교향곡을 들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치료 요법은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알렉스에게 사회화를 '강요'한 것이었다. 알렉스는 이러한 행위들이 '사회에 반대되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며, 누구에게나 인권이 있기 때문에 폭력적인 행위는 나쁜 것'임을 절규하며 자신을 풀어달라고 하나 의사들은 자신에게 치료를 맡기라고만 한다. 결국 알렉스는 그러한 치료가 끝나고 많은 정부요인 앞에서 자신의 '치료 성과'를 보여주게 된다. 그는 폭력 행위를 하는 타인에 반하여 자신의 몸을 지킬 수도 없고, 옷을 벗은 여자를 보면서도 자신의 성적 욕구를 해소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러한 행위를 하려고 할 때면 구토가 유발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가의 행위는 정당한 것일까? 아니면 단순한 폭력인 것일까? 알렉스를 아끼던 목사는 치료가 과연 알렉스를 치료한 것임을 반문한다. 도덕이란 것은 자유의지를 전제로 한 것이어야 한다. 즉, 자신이 도덕적인 행위와 비도덕적인 행위가 어떤 것인지 인지 할 수 있고,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에게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요구를 할 수 있는 것이고, 순수한 악으로서의 본성을 유지하고 있던 알렉스를 진정으로 치료하기 위해서는 자유 의지에 의해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도와주는 방법을 취했어야 했다.
하지만 국가에서 시행한 '루드비코 법'은 과연 그러했는가? 사실은 그렇지 않다. 루드비코법은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것들을 반복해서 보여줌으로써 그러한 행위가 질리게 함으로써 폭력적인 행위를 '못하게' 강요하는 것으로, 그것은 폭력적인 행위를 (자기 스스로) '안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이는 엄연히 '치료'가 아닌 국가에 의한 명백한 '폭력'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러한 국가의 폭력이 개인의 폭력에 비해 더 쉽게 용인되는 경향을 보이는 이유는 국가가 자행하는 폭력은 '사회의 안전을 위한다는', '범죄율을 떨어뜨린다는' 일정한 목적과 명분이 있기 때문에 절차적인 부당함을 잘 인식하지 못하거나 혹은 관대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알렉스의 치료를 담당한 박사는 목사의 비판에 반하여 '우리는 더 높은 윤리적인 동기에는 관심이 없고, 단지 어떻게 하면 범죄율을 떨어뜨릴까 하는 것과, 형무소의 혼잡을 경감하는 것만을 관심 있어 한다. 그리고 당신의 독실한 신자는 (결과적으로) 한 뺨을 맞으면 다른 뺨을 가져다 댈 것이며, 십자가에 못 박힐 각오도 되어 있으며 파리 한 마리만 죽일 생각을 해도 속이 불편해 질 것이다'라는 말을 한다. 이에서도 볼 수 있듯이 국가는 사회의 안전을 위해서 소수의 몇몇 사람들에게 끔찍한 폭력을 행사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또한 앞서 알렉스가 내무부장관에게 루드비코 치료법의 지원자로 뽑히게 되었을 때 내무부장관이 루드비코 법에 대해 설명하면서 '정치범으로 가득한 감옥'을 가지게 될지도 모르니 일반 감호자들은 치료 요법을 쓰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라는 말을 한 것으로 보아서 루드비코 치료법이 상징하는 '국가의 폭력'이라는 기제가 사회의 이익을 위한 국가의 억압을 자행하는 역할로서도 활용되는 것을 넘어서서 일정한 정치 세력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의도 아래서 자행될 수 있다는 것마저 암시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주체가 '국가'와 '과학'이었음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알렉스가 겪는 이러한 폭력을 좀 더 확장해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국가는 사회계약설 등에 의하면 국민 개개인이 이성적인 판단을 통해서 성립된 '일반의지'의 발현 모습이며, 과학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이성의 산물이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 볼 때 알렉스에게 주어지는 폭력은 근대 사회의 성립 과정에서 '비이성적인 것', '감정적인 것'을 '이성'에 의해 배제하여 온 폭력의 역사를 상징하는 철학사적 의미로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4. 알렉스의 치료 이후에도 알렉스가 받아야 한 폭력들
알렉스는 결국 루드비코 법에 의해서 자신의 방어도 못하는 '장애인'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러한 알렉스가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하기에 그가 살던 사회는 너무나 폭력이 만연하는 사회이다. 이는 성악설에 기반을 두어 영화를 만든 큐브릭 감독의 암울한 세계관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간의 악한 본성을 억누르기 위해서 국가의 감시체계는 강화되고, 과학은 발전하지만 결국 그러한 시도는 항상 실패로 돌아가고 개인은 항상 폭력에 노출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암시는 알렉스와 그의 일당들이 맨 처음 자신의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에서부터 이미 암시되어 있었다. 알렉스와 그의 일당들이 늙은이에게 폭력을 행사할 때 그는 폭력을 행사하는 그들에게 일반적인 피해자가 보일만한 살려달라는 요청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뜸 법과 질서도 없는 더러운 세상이고, 사람들은 더 이상 늙은이를 위하지 않는다며 차라리 죽이라는 말을 한다. 이는 이 사회에서 이러한 폭력 행위가 일반화 되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는 대목으로서 '우주선이 달에까지 가고 사람들이 불꽃주위를 맴도는' 미래 사회에도 법과 도덕은 오히려 바로 서지 못했음을 암시하고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알렉스가 집으로 가는 동안에 보였던 황량한 도시 풍경, 그리고 집의 망가진 철문, 집 앞에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던 브래지어 등의 옷가지와 쓰레기 등도 알렉스가 살고 있는 사회가 매우 무질서하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루드비코 법을 통해 일찍 형기를 마치고 돌아온 알렉스는 일단 집에서 자신의 자리를 대체한 조에 의해서 쫓겨나게 된다. 조는 알렉스가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이유로 죄과를 치러야한다며 그를 비난하지만, 알렉스는 주먹다짐을 하려 하자 메스꺼움이 올라왔기 때문에 별다른 변명을 못하고 집에서 나오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과거에 괴롭혔던 노인을 다시 만나게 되어서 노인들에게 구타를 당한다. 게다가 구타를 말리러 온 경찰관들이 과거에 자신과 함께 했던 패거리 녀석들이었고 그는 그들에게 폭력을 당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자신이 예전에 폭행했던 노부부의 집에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도 그는 자신이 예전에 가면을 쓰고 행동했기 때문에 나를 못 알아 볼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호의를 받는 것이 괜찮다는 생각을 했으나, 결국 그가 자살하게 되는 것이 정치적으로 집권층에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정치적 목적아래 그에게 피해를 입었던 작가는 베토벤 9번 교향곡을 틀게 되고, 알렉스는 몸을 투신하여 자살을 시도하게 된다.
결국 루드비코 법에 의해서 악한 행위를 하지 못하게 된 알렉스가 마음 놓고 살아갈 만큼 사회(혹은 국가)는 결코 믿을 만한 공간이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자신이 가장 믿던 가정이라는 공간에서 나오자마자 노인들의 폭행과 같은 자력 구제 행위에 휘말리게 된다. 또한 그러한 행위에서 알렉스를 보호해줘야 하는 경찰들이 예전에 자신과 같이 폭력 행위를 일삼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결국 국가 체계가 국민 모두에게 공평한 집행을 하기 보다는 결국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는 의미로 읽힌다. 또한 알렉스는 결국 정치적인 집단에 이용당해 자살시도까지 하게 되는데, 국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한 개인이 희생되고 있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에서 국가의 폭력이 행사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성악설의 입장에 의해 이 영화를 정리해 본다면 악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 알렉스가 올바르게 사회화 될 만한 올바른 교육을 하지 못했던 국가 혹은 사회가 그를 이중, 삼중으로 잔혹하게 처벌하고 비난하는 폭력 행위를 일삼고 있는 것이다. 노부부 집에 걸려있던 거울이 묘사하듯이 이런 지경까지 이르게 되면 정말 피해자와 가해자가 누구인지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된다.
5. 다시 찾은 본성
알렉스가 자살을 시도하게 되면서 현 정부는 비인간적인 수단의 교정 개혁으로 여론의 압박을 받게 된다. 정부는 부랴부랴 이러한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서 알렉스가 교정을 받기 이전의 폭력적인 본성을 다시 되찾을 수 있도록 '회복'을 시작한다. 예전에 루드비코 법을 시행했을 때 메스꺼움을 느끼는 것이 치료의 과정이라고 말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말이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알렉스를 교화하고자 하는 것은 정치적인 목적과 결부되어 있는 순수하지 못한 행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내무부장관은 여론을 조작하기 위해 알렉스를 다시 만나게 되고 알렉스에게 미래를 보장해 줄 것을 약속하는 데 알렉스는 그런 말을 들으면서 어린 아이처럼 음식을 받아먹는 다. 그리고 신문에 기사를 내기 위해 기자들이 오게 되어 내무부장관과 알렉스는 악수를 하며 사진을 찍게 된다. 이때 알렉스는 '정말 치료됐군!' 이라는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양복을 입은 사람들 앞에서 격렬한 성행위를 하는 장면을 연상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알렉스가 양복을 입은 사람들 앞에서 성행위를 하는 상상을 한다는 것은 알렉스가 이제 정치세력과의 타협으로 자신의 욕망을 버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결국 국가가 알렉스의 본성을 제거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대목이다. '정말 치료됐군!' 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제 욕망을 실현하려 할 때마다 구토를 했던 상태에서 벗어나 자신의 자유의지를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기에 '정말 치료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내무부장관 앞에서 보이는 어린아이 같은 행동들은 자신이 예전의 (유아적이면서도 본능적인) 본성을 되찾았다는 것을 암시하는 장치라고 볼 수 있다.
6. '시계태엽 오렌지'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
이 영화의 제목 '시계태엽 오렌지'는 이러한 결말에 대한 암시를 주고 있다. 오렌지는 생생한 이미지를 주면서 인간의 본성적인 측면과 결부되는 반면, 시계태엽은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기계로서 국가와 사회의 억압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국가(혹은 이성)는 시계태엽과 같이 국민들의 본성을 제거하여 그들을 통제하려 하지만 마지막에 알렉스가 자유의지를 되찾은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결코 인간의 본성은 제거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국가의 폭력에 의해 인간의 본성을 잃게 된다면 그는 알렉스가 보여준 것처럼 자신의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암시적으로 그것이 정치적인 권력을 위해서 국민들을 통제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암시마저 담고 있다. 인간의 악한 본성과 개인적 폭력은 본성이라는 자체로 정당화 되어서는 안 됨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을 제거하려 하는 시도는 그에 대비되는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 마치 시계태엽이 장착된 오렌지가 우리에게 기괴한 느낌을 주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폭력은 사회 전체의 이익에 반하여 해가 되기 때문에, 또는 이성적인 잣대로 보았을 때 비이성적이라는 등과 같은 '매력적인 동기'가 있기 때문에 더더욱 위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