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억력이라는 게 참 부정확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는 게, 이 책의 저자인 이언 뱅크스의 예가 딱 그렇습니다. 그가 쓴 "플레바스를 생각하라"는 굉장히 사변적이고 지루한 책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예전에 썼던 리뷰를 다시 읽어 보니 이건 극찬이었습니다. 늘 휘발성 기억력에 대해 괴로워하기는 했어도 이 정도라고는 생각 못했었습니다.
2. 반성하는 의미에서 이언 뱅크스의 책이 뭐가 있나 확인해 보니 이 책과 다리, 두 권입니다. 무려 96년에 나온 공범이라는 책은 절판이네요.
3. 이 책은 뱅크스의 데뷔작이라고 합니다. 역자 후기에 따르면, 뱅크스는 이 책 외에도 출간할 수 있는 상태인 장편소설을 여러 편 완성해 놓은 상태였는데 굳이 이 책을 데뷔작으로 골랐다고 하는 군요. 역시 후기에 실려 있는데, 출간 당시 책에 대한 영국 여러 신문사들의 서평은 한마디로 말해서 "작가의 글재주와 문장력은 뛰어나지만 내용은 쓰레기"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뱅크스의 의도적 도발에 신문사들이 정상적으로 대응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자신만이 천재라고 생각하는 인간들이 잘 저지르는 짓입니다.
4. 이 책은 아주 잘 쓴 소설입니다. 내용도 흥미진진하고요. 하지만 재미있지는 않습니다. 스코틀랜드에 사는 미치광이 가족들의 이야기인데, 아버지, 잠시 등장했다 사라지는 주인공의 생모, 계속 전화로만 나오다 막판에 잠깐 등장하는 형, 그리고 주인공, 이 넷은 모두 정신병자들입니다. 전혀 감정이입도 안 되고 공감도 안 됩니다. 그냥 이런 사람들과 함께 살지 않을 수 있다는 것만도 고마울 따름인 캐릭터들입니다.
5. 잘 쓴 소설임에도, 아무에게도 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냥, 소설가가 꿈인 사람들의 경우는 소설 작법 공부를 위해 읽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군요.
6. 저는 그런대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만, 뒷맛이 이렇게 불쾌한 책은 용의자 X의 헌신 이후 처음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