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 Book

정광민. 김일성과 박정희의 경제전쟁. 꼬레아, 서울, 2012.

기배르바 1 8,047 2015.10.30 14:36

20세기 전환기에 근대화를 시도한 조선은, 앞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의 영향권에 점차 종속되다가, 1910829일에 일본 행정체계에 공식 편입한다. 1919년 들어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민중의 정서가 동요한 와중에, 이전 해에 재일유학생의 독립선언에 영향을 받은 사회 각계각층의 민족대표가 31일 한양에서 독립을 선언하였고, 이후 한 달 동안 전국에서 동원 가능한 전 민중이 궐기하였다. 그 결과, 조선인이 민족의식을 자각하였고, 이후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되었으며, 같은 해 413일에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체계적인 독립운동이 가능해졌다. 


김일성과 박정희의 경제전쟁 대표 이미지 


  

마침내, 1945815일에 일본이 미국에 무조건 항복을 하여 조선에서 일본의 통치권은 소멸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전선이 일본 본토에 형성되기 전에 전쟁이 종결됨에 따라, 대륙 동안의 전후 처리는 서안과는 다르게 미국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 대한민국 독립군이 한반도를 접수하고, 미국과 중국, 소련, 영국이 일본 본토를 분할하는 연합국의 원래 계획은 폐지되었다. 대신, 미국이 일본 본토를 관할하며, 한반도 북부와 사할린에 진주한 소련의 권리를 인정하는 선에서 전쟁이 종결되었다. 이후, 20세기 후반 대륙 동안의 평화체제는, 일본, 필리핀, 호주 등 미국의 우방이 공산세력으로부터 대양을 보호하는 형태로 구축되었다.

이 체제는 한민족에게는 비극의 근원이다. 만주와 류구는 공산중국과 일본에 인도되었는데, 한반도 북부는 소련이, 남부는 미국이 분할 통치하였다. 결국, 관할권 확보를 주도하지 못한 임시정부의 민족주의 및 공산주의 계열은 각각 한반도 남부와 북부에서 비정상적인 정부를 수립하였다. 한반도는 어느 진영도 독점하지 못한 채 북경과 동경을 방어하는 전진기지가 된 것이다. 비정상체제의 결과는, 2년 후인 1950년 여름부터 3년 동안 전 국토를 전장으로 만든 한국전쟁이다. 이 전쟁은 미국과 소련-중국 진영이 각 진영 방어를 위해 총력을 쏟은 대리전 양상으로 흘러갔다. 그럼에도 한반도는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현상을 유지하는 선에서 정전을 맞이했으며, 이후 체제경쟁에 돌입하여다.

본 도서에서 저자는 정전 8년 이후인 1961년부터 약 20년 동안 남한과 북한의 체제경쟁을 비교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북한과 남한의 체제경쟁이 두 가지 측면에서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첫째, 두 나라의 산업화는, 경제와 국방을 융합한 20세기 초반 일본의 전시동원체제를 모범사례로 삼아 수행되었다 (정광민, 2012: 35-36). 양 정부는 식민시대를 청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면전을 치른 터라 경제사회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총력을 기해야 하는 데, 상대방의 전면적인 재침공 가능성에 항상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양 정부의 산업화는 국방력 강화와 생활 지표 향상이라는 두 목표를 동시에 고려해야 했으며, 일본사례는 미국과 대결할 정도의 성과를 낸 전력이 있다. 다만, 두 정부 모두 정책의 우선순위는 국방력 강화였고, 민생지표 향상은 국방력 강화가 확보되었을 때 체제선전을 위해 고려되었다.

둘째, 양국의 산업화는, 각 정부의 지도자가 독재를 강화하는 기조 아래에서 진행되었다. 양국의 비정상적인 태생적 한계로 인해, 각 정부는 상대방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내부결속 강화를 위해 정신승리에 합당한 근거를 제공해야 했다. 전쟁 직후 경쟁은 모든 거시경제지표에서 앞서고 있는 북한이 우세하였다. 1961년 남한에서는, 이전 해에 부정선거로 입각한 이승만 정부를 4.19민주혁명으로 퇴출시킨 민주정부를 무력으로 몰아낸 군부가 집권하였다. 이 정부의 당면과제는 거시경제지표를 향상하여 무력행사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반대파를 숙청하고 정신교육을 감행하며, 독제를 제도화함으로써, 거시경제지표와 무관하게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북한의 김일성도 같은 작업을 수행하였다. 그 결과, 남한과 북한은 긴밀한 교신을 취하며, 19721227, 같은 날, 각각 유신헌법과 사회주의헌법을 공포함으로써, 독제체제구축을 완성한다 (정광민, 2012: 57).

흥미로운 점은, 두 정부 모두 산업화정책에 합리성이 결여되었으나, 남한이 열세를 극복하고 북한을 추격하였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차이의 원인으로 국제시장환경과 자본동원능력을 언급한다. 남한과 북한 모두 상대방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경공업의 발전을 생략한 채 중공업 위주의 산업화 전략을 시행하였다. 이 전략은, 내수시장 형성을 무시하였기에, 국내경제에서 지속가능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 따라서, 수출을 통해 자본을 형성해야 했지만, 혁신기반과 가치사슬이 정립되지 않은 상황이므로, 수출을 할수록 원자재 및 기계 수입이 증가하였다. 결국, 북한의 비정상적인 산업체제는 1970년대 초반의 석유파동을 극복하지 못하고, 서방에 대한 채무불이행으로 귀착되었다 (정광민, 2012: 287-288). 반면, 남한은 베트남특수로 기업들이 자본을 형성하고, 1970년에 포항제철소 건립을 위한 일본 차관을 확보함으로써, 본격적인 중화학공업 단계로 넘어간다 (정광민, 2012: 239).

지금 우리나라의 사회-경제 논제는 이 당시 산업화의 연장선상에 있다. “김일성과 박정희의 경제전쟁당시 남한과 북한 모두의 선전 의제는 국민이 부유하고 행복한 나라였지만, 이는 정치적 수사에 그칠 뿐이었다. 이 의제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경제성장과 복지제도를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남한은 중공업 중심의 경제성장에 집중하기 위해 복지를 우선순위에 둘 수 없었으며, 북한은 경제성장을 지속하지 못하여 복지를 유지할 수 없었다. 2010년대 들어서 남한이 산업화를 완수하자마자 보편복지가 정치권의 의제로 대두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이 즈음이면, 복지는 진보진영에서 제기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유시민, 대한민국개조론, 2007), 보수진영에서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는 논제가 된다. 1980년대 들어 남-북의 경제격차는 더욱 커져 북한이 남한을 더 이상 따라잡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으므로, 내부결속을 위한 수사에 그치는 행태는 받아들여지기 어렵기도 하다.

다만, 어떻게든 우리나라가 정상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북한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이를 위해 남북한이 경제-정치-사회 통합을 추진하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 이 경우, 북한 지역 산업기반구축과 사회경제격차 해소에 비용이 필요하지만, 영토와 인구를 넓힐 수 있다. 아울러, 건설경기를 지속하고, 동북아시아 경제 블록을 형성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를 위한 첫 단계는 주변국의 동의를 얻어 남북한이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것이다. 아니라면, 남한과 북한이 분단을 고착화한 상황에서 각자 정상국가가 되는 것도 방법이다. 이 경우, 우리나라는 미국과 일본에 종속된 상태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인정하며 부를 유지할 수 있다. 다만, 이웃의 극빈국이 언어가 동일하므로 이민의 자유를 허용할 경우 심각한 사회경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이를 위한 첫 단추는, 3.1운동과 임시정부, 4.19혁명을 계승한다는 헌법전문을 수정하여 법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는 향후 5년 간 정치 의제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Comments

이야기꾼 2015.10.30 15:40
현대사에서는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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