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 Book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최진영

맛있는두유 0 5,096 2012.03.26 12:33

일일일읽's comment :

한 소녀의 내면이 바깥 세계와 만나면서 빚어내는 이야기입니다. 옹골차고 씩씩한 듯 보이는 소녀가 마냥 비정하지만 않고 그렇다고 따스하지만도 않은 바깥 세계로 나오면서, 이도 저도 아닌 세상 안에서 점차 그 옹골참과 씩씩함이 사실은 부서지기 쉬운 것임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맹랑하고 되바라진 소녀의 시선으로 그려내는 이 이야기는 언젠가 누군가의 옆을 스쳐갔을 우리네 사람들이 한 번은 읽어볼 만합니다.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대표 이미지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안타까움이나 먹먹함 같은 것을 느끼는 대신 그 소녀의 내면 세계에 주목하는 것은 내 감수성이 메마르고 팍팍한 탓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야기 속의 이름 없는 소녀는 동정이나 안타까움을 느낄 대상이나 피해자의 위치에 서는 대신, 자신의 관점 속에 세상과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꿰어 맞춘다. 그런 소녀의 태도에서 우리는 당돌함과 맹랑함을 느끼면서 그 소녀의 관점에 흥미가 생기는 것이다. 그 관점이 개성적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좀 더 척박한 환경 속에 우리네 인간 마음의 흐름이 어떻게 형성되어 흘러가는지에 자연 관심가게 되는 것이다. 소녀가 바라보는 세상은 단 하나 뿐인 진짜를 에워 싸고 있는 가짜들로 가득찬 곳이며, 그 안에는 오직 진짜와 가짜 밖에 없다.


행복이 뭐냐고? 행복은 진짜다. 나는 아직까지 진짜를 본 적이 없으니까, 그게 어떤 건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딱 보는 순간 알 수 있다. 장담한다. 진짜란 그런 거니까.


소녀가 찾는 것은 '진짜' 엄마다. 가짜 엄마를 떠나 진짜 엄마를 찾아 나서면서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면서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는 소녀의 기준은 점차 세밀해지고 확고해진다. 이에 따라 소녀가 바라보는 세상 속의 가짜들도 갈수록 극성이고 소녀의 행복을 잠시도 가만두지 않는다. 오직 진짜와 가짜의 대척점을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보는 소녀의 관점 속에 세상 사람들의 통념 같은 것은 의미가 없다. 이런 소녀의 관점이 세상과 불협화음을 빚어내게 되는 부분은 '성'이란 개념에 이르러서이다. 소녀에게 성이란 그저 '보지'에 '자지'를 넣는 일이고 그래서 아기가 생기는 일이다. 이런 소녀의 관점에서 성과 관련된 어른들의 이야기는 추악하지도 않고 그저 원래 그런 것들 중 하나일 뿐이다. 은밀한 성을 즐기는 어른들을 관찰하는 어린 소녀의 이야기는 일견 순수한 마음을 가진 아이가 일그러진 세상을 바라보는 이야기인 것 같아도, 실상은 진짜와 가짜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소녀의 내면이 세상에 맞춰 흘러가지 않고 고정되어 있음을 드러내 주는 한 예일 뿐이다.


아무튼 이젠 아무 남자랑 같이 있으면 안 돼.
삼촌이 엄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 남자?
그러니까, 남자를 조심해야 된단 말이야.
어떻게 조심해.
아무 남자랑 막 자면 안 된다고.
('아무' 남자랑 '막' 자는 게 도대체 뭐야.)
그럼 애가 생겨.
애?
그래. 이젠 애를 가질 수도 있다고.
애는 보지에 자지를 넣어야 생기는 거야.
삼촌이 입을 딱 벌리고 나를 쳐다봤다.
그냥 막 잔다고 생기는 게 아니라.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대장이 큰 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미남이 이모가 떠난 후 처음이었다. 대장이 그렇게 웃는 건.


소녀에게 성은 억압해야 할 것 또는 은밀하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저 세상 속에 있는 것 중 하나일 뿐, 진짜 엄마를 찾으려는 그녀의 확고한 목적의식 하에서는 별 가치도 없는 것이다. 소녀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 시작한 것은 자기 탓을 하는 것을 그만두고 가짜 탓을 하게 되면서부터인데, 그 계기는 '진짜엄마'가 될 자격이 없는 '가짜엄마'이다. 그래서 가짜엄마를 탓하는 대신, 가짜엄마가 가짜라서 그런 것으로 받아들이고 진짜엄마를 찾아 나선다.


대장이 불을 삼키지도, 벽돌을 깨지도 못한 이유는 목적을 잃었기 때문이다. 내 생각은 그렇다. 진짜든 가짜든 엄마를 찾아야 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을 때, 대장은 천하무적이었다. 불도 삼키고 돌도 깼다. 누가 시켰다면 철도 씹어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남의 이모와 싸우느라 대장은 자기가 뭘 하고 있었는지 까맣게 잊고 말았다. 그렇지만 나는 잊지 않았다.

진짜엄마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니까 각자 모른 채 살면 행복할 수도 있는데, 만나서 불행해질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진짜엄마를 찾아야 하나?

찾아야 한다.
왜냐면, 그것 외엔 할 일이 없으니까.
진짜엄마를 찾겠다는 목적마저 사라진다면 나는 더 살아 있을 이유가 없다. 목적이 없으면, 가짜아빠처럼 쥐의 먹이가 되고 말 것이다.


소녀는 대부분이 그렇듯이 세상이나 세상 사람들을 탓하는 대신 진짜와 가짜의 대립 구도를 만들어 내고 가짜를 탓하는데, 이런 소녀의 모습이 이 책을 특색 있게 만든다. 그러나 지나칠 정도로 고정된 내면 세계와 예서 일어나는 강렬한 목적의식은 소녀의 삶이 흐르고 흘러서 이윽고 다다를 곳을 예정해 버린다.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그 소녀의 삶을 지배했던 어떤 정서를 접하게 되는데, 그런 모종의 정서를 뒤따르는 삶이란 자신이 목표로 하는 곳에 도달하기도 전에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결말로 치닫는 부분에서 소녀는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 소녀는 의식적으로 그런 결말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소녀가 끝까지 진짜와 가짜의 대립 구도로 삶을 바라보는 것에 천착했을 때, 그 자신이 결정하기도 전에 이미 그 끝이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름 없는 소녀의 삶은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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