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일일읽's comment :
이 시대가 잃어버린 '진지함'을 되찾아야 한다고 역설하는 책입니다. 강한 논조로 얘기를 전개한다기보다는 여전히 답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자신의 생각하는 바를 차근차근 얘기해보려 한다는 느낌입니다. 저자의 삶이 녹아 있는 진중한 고민들은, 답을 알기 위해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민하는 행위 자체가 목적임을 느끼게 합니다.
우선 저자가 얼마나 '진지'한 지부터 보자. 다음은 저자 소개에 있는 구절이다.
일본 사회에 대한 비판적 발언 때문에 강연회를 할 때마다 극우파의 공격에 대비해 배에 신문지를 넣고 다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과연 '우리 한 번 진지해져 보자'라고 얘기할 만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엄숙한 바보가 되자는 얘기는 아니다. 저자가 그런 바보는 아님을 다음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실현이 된다면 오키나와에서 훗카이도까지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일본 종단 여행을 하려고 합니다. ...... 왜 할리데이비슨인가 하면 내가 영화 <이지 라이더> 세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 경우 일바적인 오토바이는 의미가 없습니다. 할리데이비슨이 아니면 안 됩니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결정 사항입니다.
표지에서 보듯 굉장히 진지한 얼굴을 하고서는 '나는 할리데이비슨이 아니면 안 된다'라고 진지하게 말하는 그의 엉뚱함에 비질비질 웃음이 새어 나온다. 저자 강상중이 진지해지자고 말하는 것을 달리 말해 보면, '우리 고민 좀 해보자. 일회성으로 고민 한 번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걸고 크게 고민해보는 삶을 살자.' 정도가 되겠다. 그러면 저자가 바라보는 '고민하지 않는 사람'의 모습은 어떨까?
한편 그와 같은 고뇌를 하지 않고 청춘을 보내고 있는 젊은 사람들도 아마 많을 것입니다. '나'라든지 '자아'와 같은 것에 대해 별로 고민하지 않는 사람들 말입니다.
자아의 어둠을 찾다 보면 이유도 모르는 이매망량(온갖 유령과 도깨비)이 나타나기 쉽기 때문에 그것을 피한다는 의미에서 고민 없이 사는 것도 현명한 삶의 방식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얼핏 원숙한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진짜로 원숙한 것이 아니라 바닥이 얕은 원숙함, 즉 원숙한 기운만 풍기는 것이지요.
그들의 태도는 온갖 인간관계에서 분명한 태도를 취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깊이 들어가지 않고 능숙하게 피해 가는 방법과 통합니다. 친구 관계도 그렇고 연애나 섹스에서도 아마 그렇겠지요.
이때 실무적인 문제 해결을 최우선으로 삼아 모든 일을 담백하게 넘기는 사람은 "그런 일을 진지하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야. 시간 낭비지. 그런 것 따위는 의미가 없어"라고 말을 하겠지요. 그러나 그런 식으로 살게 되면 아마도 마지막에는 큰 고독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타인과 깊지 않고 무난한 관계를 맺고, 가능한 한 위험을 피하려고 하며,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별로 휘말리지 않으면서 모든 일에 구애받지 않으려고 행동하는 그런 '요령이 뛰어난' 젊음은 정념과 같은 것은 사전에 잘라낸, 또는 처음부터 탈색되어 있는 청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지함이란 곧 고민하는 태도를 가리키는데, 저자는 '고민하는' 것이 '사는' 것이며, '고민하는 힘'은 '살아가는 힘'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고민하지 않으면 제대로 살아갈 수 없고, 이 세상을 살아갈 힘도 없어 자신의 생명을 쉽게 버리거나 오컬트 같은 것에 빠져들기 쉽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고민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더욱 깊게 파고 들어가 보면, '자유'의 문제와 맞닥뜨리게 된다.
신앙이 살아 있었던 시대가 훨씬 행복했다고 앞에서 말한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입니다. '무엇을 하든, 무엇을 믿든 자유'라는 말은 사실 괴로운 말입니다. 넓은 들판에 혼자 남겨지면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게 됩니다. 미아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덮쳐 오겠지요.
그런데 뭐든지 자유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판단의 기준을 잃고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자유라는 것은 이처럼 곤란함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죽는 것도 사는 것도 자유, 스스로 생각해서 결정하라고 말합니다. 자유가 끝까지 진행되면 사람은 이처럼 '의지할 곳이 없음'을 절실하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를 얻은 대가로 관습이라는 제동장치 대신에 살아갈 수 있는 추진력이 될 무언가를 각각 손에 넣어야만 합니다.
'뷔리당의 당나귀'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당나귀의 주인이 건초 더미를 당나귀에게 바로 주지 않고 그 앞 좌우에 놓자, 당나귀는 어느 쪽을 먼저 먹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해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다.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자유를 만끽하며 살아가는 오늘날의 사람 중에는, 말하자면 좌우 어느 쪽이든 먹기는 먹되, '내가 왜 오른쪽으로 가서 먹었을까'에 대한 그 이유를 스스로도 알지 못하거나 혹은 아예 그 의문조차 제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과거 사람들에 비해 오늘날의 사람들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스스로 의아한 상태에 빠지거나 자신의 인생 행로를 합리화해버리기 쉬운 시대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시대는 이미 어중간함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어중간한 심각함이나 어중간한 낙관론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어중간하게 고민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으면 자아를 세우는 것이나 타자를 수용하는 일도 할 수 없게 됩니다.
한편으로 이 책은 '고민'이라는 화두로 사회학의 선구자 막스 베버와 일본의 국민소설가 나쓰메 소세키 간에 만남의 장을 마련한다. 기실 저자는 이 두 명으로부터 진지하게 고민하는 태도를 배웠노라고 말한다. 동시대를 살았던 그들은 서로 속한 분야나 세계가 달랐지만, 그럼에도 격랑에 표류하던 시대상을 놓고 진지하게 고민하여 서로 비슷한 세계관 내지 인생관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명으로부터 정신적 세례를 받은 저자는 책 전체에 걸쳐 이들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을 듬뿍 드러낸다. 이러한 저자의 모습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한 사람의 정신 세계에 깊이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 독서생활에 대한 자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는 '개인'의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 시대의 흐름에 올라타 있으면서도 그 흐름에 따르지 않고 각각 '고민하는 힘'을 발휘해서 근대라는 시대가 내놓은 문제와 마주했습니다.
이 책은 따뜻하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내내 그 이면에 인간과 세상에 대한 애정이 크게 묻어난다. 저자의 말마따나 '해답이 없는 물음을 던지고 고민하는 창백한 고뇌'를 치열하게 하는 과정에서 그 창백함이 점차로 따스해져 간 결과이다. 그러므로 고민이 없는 삶, 치열함이 없는 삶은 따스할래야 따스할 수 없는 것이다. 진지함이 결여된 채 살아가는 사람은 흔히들 열정이 뜨거움이라 믿지만, 결국 기나긴 인생을 따스한 안온함 속에 자리잡게 해주는 것은 '열정의 발작이 아니라 끈기의 귀결'이다. 이것은 뜨겁게 살 것인가 아니면 차갑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인생에 온기를 불어 넣으며 살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진지함은 따뜻함이다.
"'당신은 진지합니까?' 선생이 다짐하듯 물었다. (......) 나는 죽기 전에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누군가를 믿으며 죽고 싶습니다. 당신이 그 한 사람이 되어 줄 수 있습니까? 바로 그 사람이 되어줄 수 있습니까? 당신은 뱃속까지 진지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