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일일읽's comment :
실로 생명력이 흘러넘치는 소설입니다. 삶이 단조롭고 무미건조하게 느껴지는 분들에게는 한 명의 백인 여자가 예기치 않게 미국 서부의 대평원 속 인디언 사회에 섞어 들어가면서 시작되는 책 속 이야기가 활력소가 되어줄 것입니다. 읽는 이를 생경한 시공간 속으로 끌고가는 이 작품은 서사 문학이 제공해주는 즐거움의 요소들을 어느 하나 빼놓지 않습니다. 널리 읽힐 만한 가치가 있는 소설입니다.
작가가 역사 속의 흥미로운 소재거리를 가지고 상상력을 발휘해서 쓴 소설들은 많지만, 대개는 당시의 시대상이나 역사 속 위인들을 지나치게 묘사함으로써 서사적인 흐름을 놓치고 지루해지기 십상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이 합쳐져 만들어진 팩션faction이란 장르에서 하나의 모범 사례가 될 만하다. 1874년 9월, 인디언 대족장이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말 천 마리와 백인 여성 천 명을 맞바꾸자고 제안했던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데, 그럼에도 저자는 자극적인 소재거리에 전혀 의존함 없이 강렬한 서사적 필체로 사건들을 쉴 틈 없이 늘어놓는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전혀 지루하지 않게 당시 시대상과 인디언 사회의 분위기 속에 젖어들 수 있다. 무엇보다 메이 도드란 이름의 매력적인 여성을 만날 수 있다. 책 속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셰익스피어의 구절로 시작된다.
「여자들은 그녀를 사랑할 것이다. 어떤 남자보다도 훌륭한 여자이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그녀가 가장 아름다운 여자이기에 사랑할 것이다. -월리엄 셰익스피어, 『겨울 이야기』 5막 1장」
그래서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를 접해보고 싶은 사람에게도 이 책은 만족스러울 것이다. 남성 캐릭터보다는 여성 캐릭터가 삶의 강렬함을 전달하기에 용이한 면이 있어 주로 여성 캐릭터를 선호하는 작가들이 많다. 특히 생명에의 지향성이랄까 모성애랄까 상대적으로 남성에게 결핍되어 있는 여성 안의 무언가를 중요한 기제로 삼아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소설이 많은 편인데, 그중에서 여성의 심리를 기막히게 꿰뚫어서 남자가 여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읽어봐야 한다고 말할 정도의 작품은 드물다. 그런데 이 책이 그런 책이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분명 저자가 여자일 거라 확신했는데, 나중에 남자라는 사실을 알고 놀라웠을 정도이다. 전에 없이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의 입을 빌려 폐부를 찌르듯 심리를 묘사하는 이 소설의 특징은 다음 문단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래서 나는 행렬 맨 앞에서 약혼자 옆을 자랑스럽게 달리며, 버크 대위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지. 그의 당황스러움은 얼굴에 똑똑히 쓰여 있었어. 나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 작별 인사를 하려 했지만 그는 검은 눈동자를 땅으로 내리깔고 나를 보지 않았어. 그 눈길에 수치가 담겨 있었던가? 가톨릭 교도로서의 자책이? 나와 열정의 순간을 나눔으로써 하느님과, 약혼녀와, 군인의 의무를 배신했다는? 심지어 자신을 유혹한 방탕한 여자, 악마의 탕녀가 미개인들과 살러 간다는 것에 안도의 기색이 있었나? 그것은 복수의 신이 그날 밤 우리가 저지른 달콤한 죄에 내리는 적절한 벌이라고 생각했나? 그래, 나는 존 버크의 내리깐 눈에서 그 모든 것을 보았어. 이건 여자의 운명이야, 해리. 남자의 죄는 여자를 추방함으로써만 사함받을 수 있지. 하지만 나는 고개 숙이지 않았어. 나는 이 낯선 인생에서 어떻게 해서라도 품위를 지킬 생각이고, 내가 족장의 아내가 된다면 그 역할을 위엄 있게 해낼 거야.」
이 책은 소위 '문명 속의 야만'을 꼬집으려는 의도를 갖고 미개한 듯 보이는 인디언 사회 속의 지혜 또는 자연과 함께 하는 평화로움에 대해 늘어놓는 책과는 다르다. 어떤 교훈을 남기려거나 설교하려는 의도는 보이지 않는데, 실제로 옮긴이는 저자인 짐 퍼거스가 자신이 소설을 쓰는 목적이 어떤 의도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그저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것이라 밝혔다고 쓰고 있다. 이 책은 한 사람이 그 자신의 삶 속에서 영위했던 '살아있음'의 감각으로 넘쳐난다. 또한 책 속에 주인공 메이 도드가 겪었던 '문명' 사회 속의 끔찍한 억압만 아니라 '미개' 사회 속의 참혹한 폭력들이 드러나는데, 이런 일들은 메이 도드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한층 두드러지게 만들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메이 도드의 삶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만큼 우리의 삶도 생생해질 것이다.
「솔직히 내가 평생토록 이른바 '문명인'들에게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를 생각하면, 미개인들과 함께 사는 것이 오히려 기대된다. 적어도 그들은 우리를 존중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