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 Book

『마흔의 삼국지, 사마의를 읽다』, 나채훈

맛있는두유 0 5,701 2012.05.29 22:58


일일일읽's comment :


간만에 훌륭한 책을 만났습니다. 사람에 대한 깊은 식견과 폭넓은 역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사마의를 성공적으로 재조명했을 뿐 아니라, 사마의라는 인물과 그의 삶을 통해 저자 자신이 하고 싶었던 얘기로 물 흐르듯 넘어가는 필체에서 저자의 안목과 내공이 느껴집니다.



마흔의 삼국지 사마의를 읽다 대표 이미지



흔히들 알고 있듯이, 우리가 아는 삼국지는 나관중이 쓴 『삼국지 연의』라는 소설의 내용에 기반한 것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마의는 아무리 좋게 말해도 삼국지라는 무대에 등장하는 영웅호걸들의 모습에 걸맞지 않는 모습이다. 그러나 나는 사마의를 좋아해서 자주 가는 사이트의 비밀번호로 걸어두기까지 했다. 왜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그런 내가 이 책을 발견하고 집어든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게다. 그리고 이 책은 내가 어째서 사마의를 좋아했는지를 속시원히 알게 해주는 기쁨을 주었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을 다 읽은 후에 더 기뻐한 것은 이 책의 저자인 나채훈이란 작가를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저자가 바라보는 사마의의 모습을 살펴보자.



현대의 시각을 빌려 한마디로 평가하면 그는 최적주의자였다.



최적주의자는 최근 들어 개개인의 주관적 행복을 중요한 가치로 보려는 움직임 속에 생겨난 개념이다. 사마의가 그런 최적주의자였다는 얘기는 쉽게 수긍이 간다. 사마의는 흔히 제갈공명이나 순욱, 가후 등 다른 뛰어난 책사들과 비교해 한 수 접고 들어간다고 여겨지는데, 그의 삶을 세밀히 살펴 보면 개인적인 만족 내지 웰빙 같이 현대인이 중시하는 가치들을 누구보다 가장 잘 실현한 인물이었다는 데서 달리 보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삼국지에 등장하는 누구보다도 오래 살기까지 했다. 또한 삼국지에 등장하는 천하영웅 중 어느 누구도 이루지 못한 삼국통일의 과업을 그의 후손 사마소가 이루었다.


이 지점에서 사마의가 소설가에 의해 제갈공명을 띄워주기 위한 라이벌으로서 정도 이상으로 격하되었고, 또 한韓나라 중심의 역사가에 의해서도 낮게 평가되었다는 점과 결부시켜 생각해 보면, 과연 사마의가 정말로 그런 인물에 불과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물론 사마의는 제갈공명의 꿈을 좌절시켰으니 뛰어난 인물이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뛰어난 인물이라면 이미 역사 속에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즐비한데 굳이 사마의란 인물을 딱 집어 주목할 이유가 있을까? 그는 오늘날 현대인들이 보고 취할 점들이 많은 인물이기 때문에 그렇다.



사마의는 살아남기 위해서 그만의 독특한 철학을 행동의 밑바탕에 깔았고 철저히 지킨 사람이었다. 그 철학이란 현실에 적응하면서 무엇이 최선인지를 찾아내고 이를 적극 실천해가는 최적주의자로 사는 길이었다.



우선 이 책은 삼국지 무대에서 이후 역사의 판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중요한 전투마다 사마의의 입김이 있었음을, 그리고 이것이 나관중에 의해 무시되었다는 점을 여러 역사적 사료들을 들어가며 드러낸다. 소설 속에서의 사마의는 제갈공명을 만날 때마다 패하고, 수비에만 급급하다가 제갈공명이 과중한 업무 탓에 건강을 해쳐 죽고 나자 그제서야 기를 폈다는 식으로 나온다. 하지만 사마의는 전투에서 일방적으로 패퇴한 적이 없었으며, 전쟁-전투보다 더 넓은 개념-에서도 누구보다 판도를 정확히 읽고 오히려 제갈공명이 자신의 판에 말려들게 만들었던 것이다.



사마의는 항상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최선의 계책을 짜내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보면 수많은 변수가 이루어지는 격렬한 시대에 창의성이 결여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의 계책이 지나치게 섬세한 면이 엿보인다. 제갈량이 제시한 천하삼분지계니 파촉정권 수립이니 하는 담대하고도 신천지를 답사하는 듯한 목표보다는, 전체 속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톱니바퀴 하나하나를 잘 꿰맞추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저자 나채훈은 이 책을 쓴 동기가 사마의를 편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 자료들을 통해 읽을 수 있는 사마의의 모습을 정당하게 평가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사마의의 행동에 대한 대담한 가설이 등장하는데, 이 가설이 사마의가 그간 보여왔던 모습이나 그의 기질 등을 살펴 보면 가장 상황적합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 가설이란, 사마의가 말년에 제갈량과 격돌하면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리숙하고 소심한 모습을 보였는데 그것이 다 계산된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와 유사한 상황 속에 있었던 인물로 이순신을 든다.



제갈량은 완벽할수록, 천재성을 발휘할수록, 촉한의 조정과 휘하 병사들로부터 신임을 받을 수 있었던 반면에 사마의는 반대로 그럴수록 모함의 대상이 되고 거세당할 위험에 놓이는 반대되는 현실이었다. 이런 상황들이 두 지략가에게 전혀 다른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제갈량은 더욱 완벽주의로 빠져들었고, 사마의는 최적주의자로서의 변모를 선택할 운명이었던 것이다.



만약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지 않았다면 조정에 의해 죽었을 것인데, 사마의가 처한 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사마의는 간이 작은 것처럼 연기를 해서 살아남았다. 이순신이 자발적으로 자신을 위험으로 내몰아 자살한 거라는 주장이 사실이라고 볼 때, 이순신과 사마의는 행동양상이 서로 달랐지만 자신을 둘러싼 정세를 정확히 읽고, 그에 대한 결단을 내렸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물론 제갈공명 또한 판도를 정확히 읽는 인물이었으며, 그래서 유독 사마의만은 꺼리고 피하려 했다는 내용이 책 속에서 설득력 있게 제시되고 있다.



제갈량은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환경에서 자라났고, 사마의는 비교적 넉넉한 집안에서 무엇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리고 제갈량은 이제 막 세력을 키우려고 하는 거의 맨손이다시피한 소군벌 유비의 측근으로 갔고, 사마의는 가장 강성한 세력이고 인재도 풍부한 조조진영으로 갔다. 당연히 두 사람의 행동 양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완벽주의자이자 이상주의에 불타는 지혜의 상징 제갈량의 최대 경쟁자가 바로 최적주의자였다는 묘한 대비가 현대에 와서 다시 사마의를 재조명해보고 싶은 유혹을 강렬하게 해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는 우리가 사마의라는 인물을 통해서만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사마의라는 인물을 제갈공명과 대비하며 주목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 간결한 분량임에도 인간사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 밀도 깊게 녹아들어 있으며, 특히 그 시선이 배어나오는 필체가 감명 깊다. 설득력 있게 주장하기는 오히려 쉬워도, 그 주장하는 바가 거침 없이 활달하게 읽히도록 만드는 것은 어려운데 이 책의 저자는 수월하게 해낸다. 나이를 살펴보니, 1946년생으로서 올해로 66세가 되는 분이다. 앞선 인생의 선배가 들려주는 인생의 지혜를 신뢰하고 진지하게 귀 기울일 수 있다는 것은, 한국에도 비소설 분야에서 팬이 될 수 있는 작가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지.



세상에는 남보다 앞서가는 지적 능력을 가진 수재만이 값어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실타래처럼 엉켜 있는 세상사를 감안해서 바라보면, 자신만의 독선에 빠진 인간형보다는 사유의 영역을 확산시켜 유연하게 적응해간 인간형이 더 값진 세상을 만드는 데 공헌한 예가 무수히 많다.


언제나 자신이 처한 여건이 좋을 수는 없다. 또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조직 전체가 잘 굴러갈 수만은 없다. 모든 조건이 구비되어야만 움직이는 조직이나 사람은 변화에 취약하다. 하지만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하는 조직이나 사람은 항상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비록 남들에게 그 움직임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멈춰 있는 사람과 움직이고 있는 사람의 차이는 매우 크다.


목표를 줄일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사마의의 인생에서는 그런 행운도 상당 부분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는 함부로 남의 이야기를 하는 자들이 넘친다. 예나 지금이나 그런 자들이 전매특허처럼 사용하는 말이 '자신은 속을 탁 터놓고 이야기하지 마음속 깊이 담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자신은 정직하고 순수하다는 것처럼 말하지만 한 꺼풀만 벗겨보면 믿을 수 없는 인물이라는 뜻도 된다. 장점과 단점도 위치와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뒤바뀌는 법이다.



이 책 속 내용을 다 읽고 맺음말을 보니, 여기서는 아예 저자가 독자에게 하고 싶은 얘기를 따로 정리해 놓았다. 다시 한 번, 이런 작가가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1. 세상을 살펴라

2. 유혹에 흔들리지 마라

3. 나를 위하라

4. 나이에 연연하지 마라

5. 자신의 길을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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