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분 활동은 매우 독특하다. 교직에 있으면서도 신문에 삽화도 그리시고 서화도 그리셨다.
1905년 11월 국민교육회의 편찬업무를 맡은 것을 시작으로, 1906년 대한자강회 간사원과 보성관 편집사무원, 1907년 대한협회 교육부원과 공업전습소 기수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이도영은 다양한 단체 활동을 통해 계몽운동가들과 교유하면서 시사만화, 교과서의 삽화, 신소설 삽화 등 인쇄 및 출판과 관련된 미술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06년 국민교육회에서 발행한 『초등소학(初等小學)』을 비롯하여, 보성관의 『초등소학(初等小學)』, 『몽학필독(蒙學必讀)』 등의 교과서 삽화를 제작하였다. 1909년 6월 『대한민보(大韓民報)』가 창간되자 1910년 8월 폐간 때까지 1면의 시사만화를 그렸다. 1908년 유원표의 소설 『몽견제갈량(夢見諸葛亮)』을 시작으로 이해조의 『홍도화(紅桃花)』(1908), 최병헌의 『성산명경(聖山明鏡)』(1909), 쥘 베른(Jules Verne, 1828~1905)의『십오소호걸(十五小豪傑)』(1912) 등의 신소설·번안소설에 삽화와 표지화를 그렸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도영<1>(李道榮))] |
이 시기만 하더라도 그림으로 풍족하게 먹고 살 수 있는 시대가 아니어서 노년에 병으로 곤궁하게 돌아가셨다는데, 그게 "50세"다.
기명절지 이 작품은 서구로 치면 "정물화"가 아닐까. 탁상과 토기의 구도가 독특하며 바닥에 죽순까지 있는 걸로 봐서는 봄을 형상화한게 아닐까 싶다.
이도영, 기명절지, 1920년대, 수묵채색, 이건희, 국립현대미술관, 2022년,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