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Culture

감정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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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감정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정도는 모두 다르다고들 한다. 같은 사건을 겪고도 잠깐의 고통 뒤 빠르게 자신의 일상으로 복귀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 혹은 몇 년 동안 지속되는 고통에 일상을 잃어버리는 이도 있다. 선생님은 내가 부정적 감정을 느끼는 강도가 크고 그에 비해 긍정적 감정을 느끼는 강도는 낮은 편이기 때문에, 너무 깊은 감정을 받아들이기엔 몸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저 너무 슬프다고, 세상엔 슬픈 일들이 너무 많고 나는 그걸 지켜보는 일이 너무 힘겹고 또 지친다고 했더니 하신 말이었다. 남들보다 슬픔을, 아픔을 더 큰 강도로 느낀다고. 그것을 견디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더 많은 기쁨을, 더 잦은 즐거움을 찾아야만 한다고 했다. 슬픈 일들은 내가 어찌할 수 없지만, 그 대신 기쁨과 즐거움을 찾는 것은 스스로 연습할 수 있는 일이라고.

그건 어떻게 가능할까. 선생님 앞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해보겠다고 답했지만, 사실은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거듭했다. 그렇지만 세상엔 슬픈 일들이 정말이지 너무도 많았다. 가정폭력을 고발한 앰버 허드에게 가해진 폭력적인 백래시는 절망적이었고, 반복되는 총기난사 사건으로 또다시 학교에서 수십 명의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여전히 총기규제는 이뤄지지 않는다. 아이들은 911에 일곱 번이나 신고를 했지만, 경찰은 80분이나 지난 뒤에 학교에 진입했다고 했다. 점심시간 1시간을 보장받기 위해 50일이나 단식을 했지만 여전히 회사는 묵묵부답이다. 구조적인 차별은 없다고 당당하게 외친 사람들이 중요한 정책적 결정을 내리는 자리에 올랐다. 세상은 느리게 변하는듯 하다가도 금방 또 열 걸음 뒤로 물러나 버린다. 그 공포와 분노, 슬픔과 절망 앞에서 나는 속수무책으로 마음을 잃어버리고 만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매일 내 기분과 씨름하는 것 같다. 편안하고 괜찮은 시간을 보내다가도, 어느 순간 가슴 한편이 덜컥 내려앉는다. 알약을 삼키듯 힘겹게 기분을 넘겨 보지만 잘 지워지지 않는다. 지치지 않으려 애쓴다. 애쓴다는 말은 힘들다는 말이다. 힘들어도 노력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더 많은 기쁨과 즐거움을 찾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선생님과, 그리고 나와 약속을 했으니까 그래도 연습해 보는 수밖에 없다.

오늘은 동네 카페 테라스에서 햇볕을 쬐며 책을 읽었어. 햇볕은 뜨겁고 바람은 선선해서 기분 좋은 오후였다. 황정은의 『일기』를 뒤늦게 읽었다. 지난 시간 동안 내가 해왔던 생각의 결들과 맞닿아 있어서, 좋기도 했지만 조금 고통스럽기도 해서 실은 기분이 너무 좋지 않았다. 달리기를 하며 고통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달리기가 끝나면 조금은 명쾌해진 기분을 만날 수 있겠지.

오늘은 퇴근길에 지하철 출구 앞에서 너와 우연히 마주쳤다. 어떻게 이렇게 만났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너는 만세 하듯 팔을 벌리며 달려오는 나를 보며 마주 웃었다. 손에 쥔 망고튤립처럼 노랗고 분홍색으로 물든 그 순간 찰나의 따스한 감정을 잊지 않으려 기록해둔다.

하루하루가 덧없다가도 기쁘고 기쁘다가도 한없이 우울하며 그러다가도 또 괜찮아지기도 한다. 어떤 드라마틱한 변화를 기대하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회기는 너무도 짧았고, 사실 길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지지부진하고 쉽지 않은 일이기도 했을 테다. 다만 이렇게 짧았던 회기를 마치고 지난 대화들을 복기하며, 다시 내 앞에 주어진 일상을 어떻게 지내면 좋을지 가만히 들여다보는 수밖에. 그러니까 나는 아픈 나를 이끌고 어떻게든 살아가 보는 수밖에 없다.

많은 것을 잃겠지만 그만큼 기회가 올 겁니다. 관계들은 더 가까워지고, 삶은 더 저미도록 깊어지고, 가치는 더 명료해질 거예요. 당신에게는 이제 자신의 일부가 아니게 된 것들을 애도할 자격이 있지만, 슬퍼만 하다가 당신이 앞으로 무엇이 될 수 있는지 느끼는 감각이 흐려져선 안 돼요. 당신은 위험한 기회에 올라탄 겁니다. 운명을 저주하지 말길, 다만 당신 앞에서 열리는 가능성을 보길 바랍니다.  _아서 프랭크 『아픈 몸을 살다』

“너는 고통받고 많은 것을 잃게 되겠지만 고통과 상실은 삶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 저자의 말을 속으로 되뇌어 본다. 고통과 상실은 삶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다. 그러니까, 슬픈 일들은 내가 어찌할 수 없지만, 그 대신 기쁨과 즐거움을 찾는 것은 스스로 연습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조금은 덜 아픈 날이 오겠지.



일기 日記
일기 日記
황정은 저
창비
아픈 몸을 살다
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저 | 메이 역
봄날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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