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리뷰] 올해로 77주년 맞은 제주4·3 역사의 흔적 ① 관덕정과 제주43평화공원
[리뷰타임스=라라 리뷰어]
제주4·3 사건이 올해로 77주년을 맞았다. 하지만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보상의 길이 마련된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은 무려 반세기 가까이 흐른 뒤인 지난 2000년에야 제정됐다. 그럼에도 여전히 제주4·3에 대한 정명을 포함해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적지 않다. 올해 한 가지 기쁜 소식이 있다면 제주 4·3 관련 기록물이 ‘진실을 드러내다: 제주4·3 기록물 (Revealing Truth: Jeju 4·3 Archives)'란 명칭으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오는 17일까지 열리는 유네스코 집행이사회에서 최종 등재 여부가 결정된다.
하지만 제주도는 ‘여행지’라는 인식이 강해서인지 제주를 여행하면서 ‘제주 4·3 사건’에까지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여전히 많지 않다. 공개적으로 제주 4·3 사건을 말할 수 있게 된 게 그리 오래 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따르면 제주 4·3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약 7년 7개월의 기간 동안 3만여 명이 무고하게 희생당한 사건임에도, 소설가 현기영의 ‘순이삼촌’(1978년)이 발표되기 전까지 제주 4·3은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제주도 내 곳곳 4·3 관련 흔적들에 안내문 등이 설치된 것도 불과 몇 년밖에 되지 않았다. 현재는 4·3의 아픔을 간직한 마을들을 중심으로 ‘조천 북촌마을’, ‘오라동’, ‘아라동’, 애월 소길마을‘, ’한림 금악마을‘, ’안덕 동광마을‘, ’남원 의귀마을‘, ’표선 가시마을‘ 등 8개 마을에 ‘4·3길’이 조성돼 있고, ‘주정공장 터’라는 안내판 하나가 전부였던 곳에 ‘4·3 주정공장 수용소, 4·3 역사관’이 들어섰고, 정방폭포에도 위령공간이 마련됐다.
‘제주 4·3’의 도화선이 된 ‘관덕정’, 그리고 ‘제주 4·3’을 전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제주 4·3평화공원’을 시작으로 그 흔적을 하나씩 쫓아가 본다.
제주 4·3 사건은?
제주 4·3 사건의 시작은 1945년 8월, 해방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35년간의 일제 식민통치가 종식되고 해방을 맞았지만, 우리 민족 스스로 쟁취한 해방은 아니었기에 일본의 자리엔 또다시 미군정이 파고들었다. 북쪽 지역은 소련이, 남쪽 지역은 미국이 점령하면서 한국은 분단의 위기에 놓였다. 당시 제주도는 내륙보다 더 피폐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일본군이 물러가자 일제강점기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제주도로 돌아왔다. 당시 제주도의 총 인구가 30만명 정도인데, 일본에서 돌아온 사람이 약 6만여명에 달했다. 엄청난 규모의 인구가 갑자기 불어난 것이다. 이때 일본에서 들어오는 이들은 미군정의 제재로 인해 일본에서 번 돈을 한 푼도 갖고 들어오지 못했다. 미군정은 기껏해야 담배 1갑 정도만 갖고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했다 한다. 이 때문에 제주도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당시 제주도의 상황은 여러 가지로 좋지 않았지만 그 중에서도 두 가지 문제를 꼽는다면 첫째, 곤궁한 삶 속에 갑자기 늘어난 인구, 둘째 일제강점기 시절의 관리들이 미군정 체제 하에서 그대로 관직을 다시 차지하면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부정부패라고 할 수 있다.
해방 직후 3년간 제주도는 흉년, 역병, 그리고 또다시 흉년이라는 악순환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차, 1947년 3월 1일, 일제에 항거하며 만세를 불렀던 28년 전의 만세운동을 기억하는 기념행사가 제주북초등학교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만 제주도 전체 인구의 10%에 달하는 3만여명이 모였다.
"3·1 정신으로 통일 독립 쟁취"를 외치며 기념대회를 모두 마친 이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 한 대열은 관덕정 광장을 거쳐 서문통으로, 다른 대열은 검찰청이 있는 북신작로를 거쳐 동문통으로 가두행진을 시작했다.
그런데 시위대가 관덕정을 거의 빠져나가려는 찰나, 관덕정 부근에 있던 기마경관의 말발굽에 6살 어린아이가 치여 다치는 일이 발생한다. 경관은 자신이 어린아이를 친 사실을 몰랐던지, 그대로 가려 하는데, 흥분한 군중들이 항의하기 시작했다. 몰려드는 군중에 당황한 경관은 동료들이 있던 경찰서 쪽으로 말을 몰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요란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무장 경찰들이 군중들을 상대로 발포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민간인 6명이 숨지고, 8명이 중상을 입었다.
그리고 1년 후, 이 사건은 장장 7년 7개월간 지속된 제주 4·3 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다.
주민 6명이 사망한 사건에 항의해 9일 뒤인 1947년 3월 10일부터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민관 합동 총파업이 단행됐는데, 미군정은 평화적인 방식이 아니라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규정하고 억압에 나서기 시작했다. 다음해까지 경찰에 잡혀간 인원만 2500여명에 달했다 한다.
1948년 4월 3일에는 한반도의 분단을 막아서기 위해 5·10단독선거 반대투쟁을 결합해 경찰과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관덕정, 제주 4·3의 출발지
제주도의 관덕정 앞 광장은 서울의 광화문광장 같은 곳이다. 관덕정은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로, ‘관덕(觀德)’은 문무의 올바른 정신을 본받기 위해 ‘사자소이관성덕야(射者所以觀盛德也)’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평소에 마음을 바르게 하고 훌륭한 덕을 쌓는다는 의미다. 『탐라지』에 따르면 조선 세종 30년(1448) 안무사 신숙청이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1969년 보수한 것으로 원래의 건축 기법은 17세기 전후의 것으로 추정한단다. 조선시대 관덕정에서는 군사들의 활쏘기, 과거시험, 각종 진상을 위한 봉진행사 등이 진행되었다. 1901년 '이재수의 난'으로 잘 알려져 있는 ‘신축민란’ 때는 300여인의 교인들이 관덕정 앞에서 척살되었다. 또 4·3사건 당시 무장대 사령관이었던 이덕구의 시신도 관덕정 앞 광장에 내걸렸다. 4·3 이후에는 제주 지역의 끊임없는 민주화운동과 4·3 진상규명 운동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제주에서 가장 먼저 봄을 맞는 축제인 ‘탐라국입춘굿’이 열릴 때면 관덕정 앞에서 농경의 신 자청비를 향한 의식이 치러지기도 하지만, 평상시에는 제주목관아와 더불어 늘 조용한 공간이다.
조용한 공간에 잠시 걸터앉아 제주4·3의 도화선이 된 그 날, 1947년 3월 1일로 시계를 돌려보자. '제28주년 3·1 기념 제주도대회' 참석자들이 제주북초등학교를 나와 가두시위를 시작한다. 관덕정이 가두시위의 거의 끝 지점이어서 행사가 곧 마무리되는 찰나인데, 갑자기 어린아이 하나가 기마경관의 말발굽에 치여 울기 시작한다. 사과조차 하지 않는 군경의 태도에 군중들은 화가 났고, 항의를 시작한다. 잠시 후 총 소리가 울려 퍼진다. 경관들이 성난 군중을 향해 발포한 것이다. 6명 사망, 8명 중상. 이날의 총성이 남긴 흔적이다.
오랜 역사를 가진 건물답게 관덕정은 제주의 대표적인 광장 문화가 꽃피웠던 곳이다. 대개는 밖에서 건물만 훑어보고 그냥 발길을 돌리는데,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다. 건물 안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들보와 그 아래 부분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작자는 미상이지만 상당히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벽화라 한다.
관덕정
- 주소 : 제주시 관덕로 19
- 운영시간 : 상시 오픈
제주4·3평화공원
2008년 3월 개관한 제주4·3평화공원은 한라산 자락인 봉개동에 위치하고 있다. 약 12만평 정도의 부지에 제주4·3평화기념관을 비롯해 위령탑과 위령광장(위령제단), 위패봉안실, 행방불명인표석, 봉안관 등이 들어서 있다.
매년 4월 3일 4·3 추념식이 열리는 곳이다. 제주4·3평화공원에서 가장 먼저 들러봐야 할 공간은 제주4·3평화기념관이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6개의 전시관으로 구성돼 있어 제주4·3이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제1관으로 들어서면 동굴 같은 터널을 지나 누워 있는 흰 색의 비문과 마주한다. 비문 없는 비석인 ‘백비’다. 제주4·3은 아직도 그 명칭이 명확히 정리되지 못한 역사이기에 비문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고, 백비도 누워 있다. 4·3의 진정한 해결이 이뤄지는 날, 비문이 적히고, 누워 있는 비석도 세워질 예정이라 한다. 제1관의 동굴은 제주4·3 전 기간에 걸쳐 주민들에게 피신처가 돼주었던 중산간 지역에 산재한 천연 동굴들을 모티브로 구성한 것이라 한다.
제2관에서는 해방 직후 제주4·3이 발생하기까지의 역사가 이어진다. ‘전쟁-해방-자치-미군정-3·1 발포사건-탄압’으로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 직전까지 제주4·3 사건의 시작에 대한 스토리다.
제2관을 지나 제3관에서는 1948년 4월 3일 새벽에 시작된 무장봉기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향후 초토화 작전의 직접적 원인이 되는 5·10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볼 수 있다.
제4관의 주제는 ‘불타는 섬(초토화와 학살)’으로. 초토화 작전과 민간인 대량 학살, 그리고 이후 한국전쟁 기간 형무소에 있던 재소자 학살까지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4·3사건 희생자의 80%가 이 기간 중에 희생됐다. 벽에는 죽음의 다양한 형상들이 부조물로 표현돼 있다.
제5관에서는 제주4·3의 후유증과 진상규명 운동을 다루고 있다. 제주4·3의 상처와 아픔, 그리고 회복의 과정을 거쳐 진상규명에 대한 끝없는 요구와 도민들의 투쟁을 통해 얻어낸 2000년 4월의 ‘4·3특별법’ 제정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마지막으로 제6관은 에필로그다. 출구 통로에 걸린 4·3 희생자들의 사진, 아픈 기억을 통해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공간이다.
기념관을 전체적으로 돌아보고 나오면 입구 쪽에 메모를 남길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제주4·3평화기념관을 나와 위령탑 쪽으로 향하면 제주 4·3 희생자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힌 비문들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 적힌 희생자 수는 총 14,231명이라고 한다, 위령탑 순환도로를 따라 성명, 성별, 당시 연령, 사망일 등이 새겨져 있는데, 당시 1948년생, 6세의 아이 이름도 있다.
슬픔의 공간, 기억의 공간이라 그런지 제주4·3평화공원을 다녀오고 나면 헛헛함이 느껴진다. 그 시대의 아픔을 안고 계신 분들이 아직 살아계실 때, 제주4·3과 관련한 모든 것들이 해결될 수 있기를 바래본다.
제주4·3평화공원
- 주소 : 제주시 명림로 430
- 운영시간 : 화~일 (09:00~1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