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Culture

[2019 서울국제작가축제]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면서 ? 한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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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8회째를 맞이하는 ‘2019 서울국제작가축제.’ 12개 다른 국가의 작가들과 한국의 작가들, 그리고 독자가 문학을 통해 만나고 소통하는 자리입니다. 국내 작가들의 에세이를 통해, 행사의 분위기를 미리 만나보세요.
행사 일정 : 2019년 10월 5일 ~ 10월 13일
공식 웹사이트 : http://siwf.or.kr
한유주 작가 참여 세션: http://siwf.or.kr/contents/program_detail08.php




한 달 전 나는 미국을 여행했다. 처음부터 여행이 목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 삼사 년 동안 머릿속에서 제목만 여러 번 바뀐 장편소설을 이제는 끝내야 했는데, 그러다 문득 마지막 장면부터 떠올렸던 것이다. 하나의 소설을 요약한다는 것은 덧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세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개와 친구, 그리고 애도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장면은 유기되어 보호소에 머무는 개를 미국에 입양을 보내는 과정이 되어야 할 것 같았다. 이 과정을 보통 해외이동봉사라고 부른다는 것과 몸집이 크거나 나이가 들었거나 털이 검정색이라는 이유로 한국에서 입양처를 찾지 못한 개들이 주로 미국이나 캐나다로 보내진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개를 화물칸에 태울 수밖에 없으므로 직항으로 가는 비행기여야 했다. 그나마 싼 항공권을 서둘러 구입해야 했는데, 어쩌다 보니 미국 시애틀로 들어가서 애틀랜타로 나오는 여정이 되었다. 해외입양단체를 찾아 연락했더니 시애틀은 진도견이 많이 가는 도시라며 차질 없이 준비하겠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기다렸다. 그리고 두 달쯤 지나 출국 사흘 전이 되었을 때, 현지 단체 사정으로 내 여정에 개를 보낼 수 없게 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현지 담당자가 휴가를 갔다는 거였다. 한국 담당자는 무척 아쉬운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시애틀에 사세요?” 아니라고 대답했다. “미국에 자주 가세요?” 아니라고 대답했다. 작업 중인 소설을 마무리하려고 개와 이동과 미국이 필요했다고 말할 수가 없어서 부끄러움과 간지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모든 지불이 완료된 상태였다. 나는 개 없이 떠나기로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타코마 공항 입국장에서 직원이 미국에 온 이유를 물었다. 여행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나의 직업을 물었고…… 나는 작가라고 대답했다. 누군가가 직업을 물을 때마다 일종의 수치심을 느끼며 작가라고 대답하고는 하는데, 그건 내가 매일같이 정해진 시간 동안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글쓰기에 관해 생각은 하지만 실행에 옮기려면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한데, 용기를 내려고 용기를 내다보면 어느덧 새벽이 오는 것이다. 그는 재차 어떤 종류의 작가냐고 물었고, 나는 당황해서 I…… I am…… a fiction writer……라고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아니잖아, 다큐멘터리를 쓸 거였잖아,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개가 없으니 결국 허구가 되어버렸네, 나는 생각했다.?


이후 직원은 별다른 말 없이 즐겁게 여행하라는 말로 입국심사를 종료했다. 천천히 돌아가는 수하물 벨트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나는 얼굴도 보지 못한 개와 얼굴을 알지만 이제는 없는 개를 상상했다. 오전 열 시쯤이었고, 숙소에는 오후 세 시나 되어야 들어갈 수 있었다. 짐을 찾고 공항 밖으로 나왔더니 여름이라는 계절이 무색하게 쌀쌀했다. 공항 내 스타벅스에 앉아 노트북을 열고 빈 페이지를 들여다보았다. 억지로 몇 줄인가를 쓰고 지웠다. 그 후 시애틀에서 이틀을 머물렀다. 보잉필드에 다녀오는 것 말고는 딱히 보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다만 오래된 서점에 들렀다가 발레리아 루이셀리의 에세이를 샀다.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넘어오는 아동들을 위한 통역관으로 일했던 루이셀리 자신과 그의 가족들 역시 미국 영주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그들은 뉴욕주에서 남부로 자동차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러다 마주친 경찰이 그에게 묻는다. “그러니까, 영감이라는 걸 얻으려고 이 여행을 한단 말이죠?” 내 독서는 여기서 중단된다. 그러니까, 영감이라는 걸 얻으려고 이 여행을 한단 말이죠? 이 질문이 메아리처럼 자꾸만 되돌아온다. 시애틀에서 라스베이거스로, 다시 피닉스로, 투산으로, 휴스턴으로, 포트로더데일로, 마이애미로, 키웨스트로, 다시 애틀랜타로 이어지는 기나긴 여정 내내 렌터카 뒤에는 유령 개와 함께 이 질문이 탑승하고 있었다. 가부좌를 튼 채, 오만한 표정으로.?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 동안 나는 많은 친구들과 가족과 개들을 잃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쓸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감히 하지 못했다는 말이 적절할 것이다. 나는 늘 스스로를 형식주의자로 생각했고, 그 쉬운 정체성을 별로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수년에 걸쳐 친구와 가족과 개를 하나씩, 때로는 복수로 잃으면서, 그리고 때로는 시민사회의 동료 구성원들을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잃으면서, 이제는 ‘어떻게’의 문제와 더불어 ‘무엇을’ 앞에서 더는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이제는 안다. 2주에 걸친 여정에서 나는 아무런 영감도 얻지 못했다.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며칠 전 꿈에서 텅 빈 페이지를 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텅 빈 것이 아니라는 걸 차츰 깨닫게 되었다. 책의 한 페이지로 보이는 백지는 투명한 액자로 감싸여 있었고, 그 액자는 사실 내 팔이었고, 내 팔과 이어진 손목과 그 손목에서 나온 손과 그 손에 달린 손가락이 연필을 쥐고 역시 무언가를 쓰려고 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꿈에서도 그것이 형식과 내용을 일치시켜야 한다는 강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만 기억날 뿐이다. 어쩌면 내일도 영감은 오지 않을 것이다. 다만 써야 한다는 것, 실행에 옮기는 것만이 중요할 것이다. 내가 아는 한 강박을 진정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강박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뿐이다.


*한유주
1982년 서울에서 태어나, 홍익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미학과 대학원을 수료했다. 2003년 단편 『달로』로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2009년 단편 『막』으로 제43회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했다. 시, 희곡과는 다른 소설만의 고유한 장르성이 어떻게 획득되는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소설을 쓰고 있다. 소설집으로 『달로』(2006), 『얼음의 책』(2009), 『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2011) 등이 있다.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에서 세계문학강독을,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에서 글쓰기를 강의하고 있으며, 텍스트의 경계를 실험하는 문학동인 ‘루’ 활동을 하고 있다. 『지속의 순간들』『작가가 작가에게』, 『교도소 도서관』, 『눈 여행자』 등을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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