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Culture

나를 선명하게 만드는 시간

메인(출처 언스플래쉬).jpg

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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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4호선 긴 의자에 앉은 내 얼굴이
복사된 얇은 종이가 벌써 수억만 번째
희미한 빛 속에 가라앉고
원본은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내 얼굴
이미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진 내가
또 한 번의 출퇴근 궤도를 그리고 있다
김혜순 지음 , 『당신의 첫』? 중 「환한 방들」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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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넷에 첫 직장에 들어갔다. 그때의 난 나를 희미하게 만드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이 말은 틀렸다. 사실 그 방법밖에는 몰랐다.


나를 희미하게 한다는 건 이런 것이다. 면접을 볼 때는 야근(초과 근무라고 불러야 하지만)도 할 수 있고, 고객 응대 및 박스 포장, 택배 보내기 등의 업무도 할 수 있고, 적은 연봉도 충분하다는 듯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다. 야근 수당이 있는지, 왜 주 업무가 아닌 다른 일도 해야 하는지, 연봉을 더 올릴 수는 없는지 등의 질문은 삼켜 버리면 된다.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늘 수월하게 합격했다. 회사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이 방식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방식으로 꽤 오랜 시간 일했다. 어떤 음식이든 좋아한다고 말하고, 동의하지 않는 대화에 맞장구를 치고, 최대한 웃으면서.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말도 더럽게 안 듣고 공부도 못(안)하는 학생이었다. 성인이 되자 그 시절이 후회됐다. 나의 내면은 얼기설기 위험하게 쌓여 있는 젠가 같아서 가뜩이나 위태로운 블록 중 한 개를 누군가가 쏙 뽑아 내면 그대로 무너질 것 같았다. 내가 공부를 하지 않아서, 남들 말을 잘 듣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대학에 갔는데 이젠 남의 말을 너무 잘 듣는 사람이 돼 버렸다. (나는 도무지 중간이 없다.) 소설이나 시를 합평할 때마다 감정이 과잉되어 있다는 말에 감정이 드러나는 단어와 문장을 다 없애 버렸고, 문장이 길다는 말에 최대한 줄이고 줄이다 보니 ‘단문병’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남의 말을 잘 들으며 나를 열심히 쌓아 보려던 노력은 오히려 남도 아니고 나도 아닌 괴상한 모양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나는 나를 잃어 가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잘 몰랐다. 나에 대해서 잘 몰랐고, 알려고 하지 않았으면서도 타인의 평가는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너질까 봐 겁이 났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건 어렴풋이 느꼈지만 그 이유를 알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내가 아닌 나는 차곡차곡 쌓여 갔고, 진짜 나는 점차 희미해졌다. 그리고 그 모습에 익숙해져 버렸다. 나는 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다른 사람의 말에 동의했고 내 의견은 삼켜 버렸다. 그러면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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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오면 모멸이라는 이름의 비누로 얼굴을 씻고
마멸이라는 이름의 크림으로 얼굴을 지우고
오늘 밤 복사된 내가 칠해진
스프링 노트를 힘껏 찢어버린다
과연 나는 내 몸에 살고 있는 걸까
김혜순 지음, 『당신의 첫』? 중 「환한 방들」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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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오랜만에 지하철을 탔다. 2호선 지하철은 언제나 그랬듯이 사람이 많았고 조금 더웠다. 분홍색 임산부 배려석엔 한 여성이 앉아 있었는데, 가방에는 분홍색 배지가 달려 있었다. 사람이 많았는데도 다른 임산부 배려석은 비어 있었다. 신기하다고 생각한 순간, 한 아주머니가 냉큼 그 자리에 앉더니 감자를 까먹기 시작했다.


지하철 안에 서서 정면에 어둡게 비치는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그 얼굴이 참 싫었다. 나이가 아주 많아 보였고 팔자 주름도 깊었다. 친구들은 조명이 머리 위에 바로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일러 주었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어둡고 흐리멍덩하게 비치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갑자기 눈물이 흐를 때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거슬리지 않았다. 내 모습이 거슬리지 않는 나를 발견했다. 그때보다 훨씬 나이가 들고 살이 쪘는데도. 예전에는 흐리멍덩한 모습으로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어딘가에 가서 흐리멍덩한 채로 돌아오기 바빴는데, 어느 순간 꽤 선명해진 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 느낌은 낯설고 새로웠다.

회사에 다녔던 몇 년 동안 반절은 나를 희미하게, 반은 선명하게 만들며 시간을 보냈다.


그냥 딱 어떤 순간이었다. 집에 돌아와 몸을 씻고 자리에 누웠는데 내가 텅 비어 버렸다는 느낌을 받았다. 두드리면 빈 소리가 날 것 같았다. 그때부터 시간을 다르게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의견을 말하고, 감정을 적당히 드러내고, 내가 잘하는 것을 찾고 정리했으며,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조금씩 준비했다. 내가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천천히. 절대 무리하지 않고.


오랜 시간이 지나 지하철에서 내려 카페에 들어가 이번 주에 써야 할 원고의 글감을 찾고, 한 시간 후에 있을 강연의 내용을 정리하는 나를 발견했다. 낯설긴 하지만 지금 내 모습은 선명하고 생동감이 넘친다.
내가 내 몸에 살고 있는 게 맞는지 의구심이 들고,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조급했다. 그래서 많은 것에 쉽게 도전하고 쉽게 포기했고, 영원히 달라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마음속에 단단히 굳어지며 용기를 내기 힘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필요한 일은 반드시 있는 법이다. 체력과 근육을 단번에 만들 수 없듯, 나를 원하는 방향으로 만드는 데에도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뜬금없지만 지금 난 조금 행복하다. 방금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거절했고, 먹고 싶은 음식을 주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선명해질 나를 위해 하던 일을 계속해 나간다. 아침에 일어나 침구를 정리한 뒤 청소를 하고, 강아지들과 산책하고 밥을 제때 챙겨 먹는 일. 기한에 맞추어 최선을 다해 글을 쓰고 시간을 내어 책을 읽는 일. 대화하고 싶은 이들과 대화하고 지금의 나를 지켜 나가는 일.


물론 나를 엉망으로 만들 때도 많다. 밥을 제때 먹지 않고 한 번에 많이 먹거나 폭음을 하고, 마감일까지 글쓰기를 미루고 미루거나 잔뜩 사 둔 책에 손도 대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시간이 더 걸릴 뿐이라고 생각한다.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이 당연하게 비어 있는 날이 올 거라고, 자꾸 반복하면서 결국 내가 원하는 내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내게 속삭인다. 바이러스처럼 맴도는 조급함과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은 시간을 잘 보내는 방법밖에 없다는 걸 뒤늦게 알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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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첫김혜순 저 | 문학과지성사
시인의 상상 세계가 출발이 애초에 나와 타자, 나와 사물, 나와 세계의 구분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며 이미 구분 지어진 것의 통합이 시인의 도착점이자 출발점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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