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Culture

여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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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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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오는 비는 좀 특별하다. 몇 날을 연이어 내리기도, 축제처럼 요란히 퍼붓기도, 엉덩이가 무거운 손님처럼 한 곳에 오래 머무르기도 한다. 비는 여름을 편애한다. 장마는 비가 여름에게 우정을 고백하며 쓰는 긴 편지다. ‘다시없겠지?’ ‘다시없을 거야.’ 귓가에 소곤거리는 빗방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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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올 때 발이 젖는 것을 싫어한다. 적시는 비보다, 떨어져 건너다보는 비를 좋아한다. 비와 나 사이에 거리가 있어야 좋다. 거리는 ‘평화’와 ‘시선’을 가져다준다. 비와 나 사이. ‘사이’가 사라지면 시선도 사라진다. 빗방울을 현미경으로 보면 타원형인데, 중력 때문에 타원형의 아래쪽이 조금 더 뚱뚱해 보인다. 빗방울의 눈은 아래에 있다. 비는 한사코 하강하는 성질을 가졌다. 바닥을 향해 총알처럼 떨어진다. 비의 시작은 ‘끝의 시작’이다. 비는 끝을 시작하는 것처럼, 혹은 시작을 끝내는 것처럼 보인다. 비와 비, 사이엔 무수히 많은 시작과 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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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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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오다니! 하긴, 올라가는 비를 본 적이 없다. 본 적이 없을 뿐 올라가는 비도, 있긴 있다. 올라가는 비(수분)란 대체로 비밀스러워, 보이지 않을 뿐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증발이라 부르고, 사라지는 일로 인식한다. 말끔히 없어지는 것. 젖은 그릇을 엎어 높으면, 그릇에 묻은 물방울들이 깨끗이, 사라지는 것. 그건 비가 올라가는 일이다. 민첩한 첩보원처럼 움직이는 빗방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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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밖으로 쏟아지는 비를 본다. 장대비다. 나무들은 비를 맞기로 작정한 초록 우산처럼 서있다. 온종일 비를 맞는 게 나무의 일과다. 비를 맞는다고 불평하는 법도 없다. 비에 젖어 이파리 색색이 짙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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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에서 “갇히는 것 중 제일은 빗속이야”라고 쓴 적 있다. 그 마음은 지금도 오롯해서, 나는 이따금 비 내리는 산장에 머무는 상상을 한다. 비에 발이 묶여 한 사흘을 오도 가도 못하는 일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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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장에서, 콩나물죽을 끓여 그 뜨거운 것을 호호 불어 먹을 것이다. 하지 감자를 몇 알 골라 쪄먹을 것이다. 파슬파슬한 감자에 손가락으로 소금을 집어먹으며 옛 생각에 빠질 것이다. “심심하냐? 심심하면 소금 먹어라.” 싱거운 농담을 던지던 내 젊은 아버지를 생각할 것이다.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보며 ‘큰일인데, 언제까지 내리려나’, 마음에도 없는 걱정을 하는 척 할 것이다. 지루한 소설을 읽다 낮잠을 잘 것이다. 낮잠에서 깨어나면 밤인지, 낮인지 구별이 어려운 ‘그저 빗속인 곳’에서 머물 것이다. 새벽녘에 잠깐 비 그치면, 빗방울들이 모여 있는 창문에 손가락을 대볼 것이다. 미끄러지다 터져버리는 빗방울들의 죽음을 지켜보다, 시를 한 편 쓸 것이다. 완성하지 않고 쓰다 덮어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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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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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장에 아침이 오면, 다시 비가 내릴 것이다. 어제보다 더 굵고 사나워진 비가 내릴 것이다. 오랑캐처럼, 비가 몰려들 것이다. 나는 사약 같이 진한 커피를 끓여 호로록 마시며, 처음 나를 강릉에 데려가 준 친구를 떠올릴 것이다. 그이의 둥그런 눈망울을 그리워하며, 먼 곳에 시선을 둘 것이다.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할 것이다. ‘홈통’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누군가 오래 오래 오줌을 누는 소리 같네. 양철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겨울잠에서 깬 다람쥐 부부가 얼마 남지 않은 도토리를 던지며 명랑하게 부부싸움 하는 소리 같아. 이 양반아, 나 이제 당신하고 못 살아요! 우르르르르, 와장창! 살림살이 부서지는 소리. 나뭇잎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음, 모르겠네? 머리를 긁적이다 실눈을 뜰 것이다. 그러면 여전히 비에 젖은 나뭇잎들이 보일 것이다. 나그네의 엉킨 머리카락 같은 나뭇잎들, 막막하게 나를 볼 것이다. ‘얼굴이 사라진 앞’ 같은, 나무의 얼굴과 희미한 내 얼굴을 슬쩍 바꿔놓아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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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비가 멈추면, 나는 만기 출소한 죄수처럼 밖으로 걸어 나갈 것이다. 떠밀려 나온 사람처럼 두리번거리다, 이파리들이 반짝이는 풍경에 겁먹을 것이다. 빗소리를 삼킨 듯 맹렬히 울어대는 매미 소리를 들으며, 참새처럼 가벼이,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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