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Culture

SF가?잘?써지는?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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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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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 SF는 성장기를 맞고 있다. 지난 몇 년 사이 SF 작가의 수가 급격히 늘었을 뿐만 아니라 SF 작가로 분류되지 않던 기성작가들이 SF를 쓰는 일도 훨씬 많아졌다. 출판사에 접수되는 투고 원고 중 SF 소설의 비중이 워낙 높아져서, 예전에는 SF를 다루지 않던 출판사들도 이제는 SF를 소화해낼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 중이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SF를 쓰게 되었을까? 내 가설은, 사람들은 원래 SF를 쓰고 싶어 했는데 어떤 이유로 그럴 수 없었다는 것, 그리고 최근 몇 년 사이에 그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이 됐다는 것이다. 작가로서 내가 차지하고 있는 특수한 위치에서 경험적으로 체득한 가설일 뿐, 연역적으로 증명된 지식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를 진행해보자.


나는 한국어로 SF를 쓰는 작가라면 누구나 직면하게 되는 실질적인 장벽을 다음 두 가지 질문으로 요약하곤 한다. 주인공이 한국인인 SF를 써도 되는가? 광화문 상공에 UFO를 띄울 수 있는가? 첫 번째는 언어의 문제고 두 번째는 공간의 문제이지만, 결국 둘은 같은 맥락으로 이어진다.


먼저 언어 문제를 생각해보자. 장편소설 ?『첫숨』 의 구상을 끝낸 다음, 잠깐 동안 나를 망설이게 한 것이 바로 이 문제였다. 우주 공간에 떠 있는 인구 50만 명이 사는 도시 곳곳에 한국어로 된 지명을 부여해도 될까? 주인공 이름을 전부 한국 이름으로 지어도 괜찮을까? 소설 안에서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한국어로 해도 어색하지 않을까?


아마 미국 작가들은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할 수도 있지만 안 한다고 큰 흠이 되지는 않는다. 미국 SF에서 외계인들은 영어를 잘하는 경우가 많다. 영화 「아바타」를 떠올려보자. 낯선 행성의 원주민들에게는 모종의 영어 교육 과정이 있다. 그리고 그들 상당수가 지구에 사는 나보다 영어를 잘한다. SF 드라마에서 과학자가 어려운 개념을 설명할 때 듣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잉글리시!” 하고 외치는 장면은 어떤가. 이 말의 의미는 물론 외국어처럼 알아듣기 어려운 말로 설명하지 말고 쉬운 말로 이야기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을 영어로 하면 쉬워지는 게 맞는가.


이 현상의 의미를 따지기 전에, 작가로서는 우선 부럽다는 생각이 앞선다. 저 언어권 작가들은 언어에 대한 고민을 정말 안 하는구나. 그런데 한국어로 SF를 쓰다 보면 이 부분이 항상 막힌다. ?『첫숨』 을 쓸 무렵 나는 이미 열 권 이상의 SF 단행본을 낸 상태였지만, 이 점이 망설여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어떤 한국 작가들은 주인공이 미국 사람인 SF를 쓴다. 우주를 배경으로 활약하는 주인공이 한국인인 이야기를 보면 어쩐지 부끄럽다는 생각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붐을 맞이하기 전 중국 SF계나, 심지어 미국에 맞먹는 우주 관련 기술을 보유한 러시아 SF에서도 미국 사람이 주인공인 작품들이 발견되곤 한다는 것이다. 작가들에게 이 문제가 얼마나 보편적인 고민거리인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가 감히 SF를 가져도 될까? 작가들은 오랫동안 이 문제를 고민해왔다.


사실 한국 문학계는 이제 한국인 주인공이 등장하는 SF를 어색하게 여기지 않는다. 한국 SF계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 문학계에 관한 이야기다. 한국 소설을 잘 읽지 않는 독자에게는 예전의 어색함이 아직도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창작자들의 영역에서는 더는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다. 비결은 무엇일까? 특별한 비결은 없다. 그냥 나 같은 작가들이 계속해서 한국 사람이 주인공인 SF를 써왔기 때문이다.


다음은 공간 문제다. 광화문 상공에 UFO를 띄워도 될까? SF 영화에서 지구를 점령하러 온 외계인들이 찾아가는 곳을 떠올려보자. 뉴욕, 런던, 베이징, 파리, 타지마할, 앙코르와트, 피라미드……. 강대국 주요 도시 아니면 관광지다. 랜드 마크가 있는 곳에 가까운데, 아무튼 서울은 포함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나는 강연 중에 종종 이런 화두를 던지곤 한다. “UFO가 나타나서 어느 나라 정보기관이 추적에 나섰는데 그 기관 이름이 국정원.” 청중들은 보통 이 말을 듣자마자 웃음을 터뜨린다. 한국인의 머릿속에서 한국 정부가 지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는 상황은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어색하게 들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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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현실 세계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한국은 세계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주로 북한을 상대하면서 가끔 주변 지역 문제로 골머리를 앓을 뿐이다. 난민 문제가 세계 주요국들의 가장 중요한 이슈였던 해에 한국 사람들은 이 고민에 동참했을까? 하지 않았다. 지구온난화를 구체적인 정책 문제로 받아들이는 한국인은 얼마나 될까? 한국 사람들은 화성 탐사에 얼마나 관심이 있을까? 달 탐사에 한국 정부의 예산이 투입되는 것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한국인은 얼마나 될까?


해방 이후 한국에는 글로벌 이슈가 없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우리 문제가 아니다. 미국이 해결할 문제다. 한국의 국제정치는 그런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니 외계인도 굳이 한국까지 찾아올 이유가 없다. 여기에서 광화문을 콕 집어서 예로 든 것은, 그 공간이 한국 사회와 정치의 변화를 이끄는 상징적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제일 중요한 사건이 벌어지는 무대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공간에서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일어나도 될까?


한국 대중의 머릿속에는 그렇지 않다는 답이 암묵적인 전제처럼 탑재되어 있다. 그래서 그 대중에게 읽힐 소설을 구상하는 SF 작가는 구상이 거의 끝난 소설을 두고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우리는 과연 SF 이벤트를 유치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나라의 국민일까?


세상에는 SF가 잘 써지는 공간이라는 것이 있다. 장르를 막론하고, 작가가 한 편의 소설 속에서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공간의 크기를 떠올려보자. 어느 정도의 크기일까? 아마 마을 하나 규모를 넘어서기 힘들 것이다. 대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의 생활 반경에 있는 장소 여러 군데가 등장할 수는 있지만, 하나의 플롯에서 대도시 전체를 빠짐없이 다루기는 어렵다. 『타워』에 나오는 빈스토크는 인구가 겨우 50만 명밖에 안 되는 중간 규모의 도시이지만 나 또한 이 도시의 모든 면을 책 한 권에 담지는 못했다. 사람은 그런 식으로 살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의 작가도, 소설 속 등장인물도 마찬가지다. ‘생동감 넘치는 주인공’을 공간 중심으로 다시 표현하면, ‘공간을 잘 이해하고 자연스럽게 그 공간을 활용하는 사람’ 정도가 될 텐데, 이런 인물들이 활약할 수 있는 공간의 크기는 대충 마을 하나 정도인 셈이다.


그런데 SF는 그런 작은 공간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주인공을 통해 세계를 다루고 우주를 펼쳐 보여야 한다. 어떤 전략이 가능할까? 가장 쉬운 방법은 주인공이 사는 동네를 세계의 중심지 혹은 우주적인 이벤트가 일어나는 바로 그 지역에 갖다놓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주 공항이 직장인 서비스직 노동자 이야기처럼 주인공의 생활 반경 자체를 우주와 관련된 공간으로 옮겨버릴 수 있다. 아니면 이웃집 여자와 점심을 먹었는데 그 여자가 내일모레 화성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 경우처럼 평범해 보이는 일상 공간이 갑자기 우주와 이어지게 만들 수도 있다.


이런 플롯을 구상하기에 뉴욕 같은 도시는 참 편리한 곳이다. 저녁 먹고 산책하다가 강 건너를 바라보니 유엔 본부가 보이기도 하는 공간이니까. SF가 잘 써지는 공간이란 이런 곳이다. 일상이 전 지구적인 공간 혹은 우주적인 이벤트와 직접 닿아 있는 곳. 시카고에 사는 내 지인 부부는 영화 <트랜스포머>에서 자기들이 사는 집이 외계인의 공격으로 박살 나는 장면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곤 했다. 늘 지나다니던 곳에 외계인이 쳐들어오는 이야기가 낯설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새로 하나 지어내는 것은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문제는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런 공간에서 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한국인의 생활공간에는 우주가 없다. 사실은 대양도 없고 대륙도 없었다. 묘하게도 한국인은 지구의 한구석에 웅크린 채로 살아가고 있다. 애초에 구석이 있을 수 없는 구형의 행성에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SF는 제국의 장르다. 좀 덜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SF는 자신감의 영향을 많이 받는 장르다. 한국 작가가 쓴 SF의 주인공이 미국 사람인 것은, 작가가 한국인이 전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건의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를 다소 뻔뻔스럽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대중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작가가 지레짐작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해당 문화권에서 성장하지 않은 사람이 외국인을 문학적으로 잘 다루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미국인이 주인공인 한국 SF는 왠지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 나오는 외국인 재연 배우처럼 되고 만다. 사실 그 주인공은 진짜 미국 사람조차도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에게 이것은 그냥 웃어넘겨도 되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SF가 잘 써지지 않는 공간에서 사는 우리가, 미국 사람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지도 않은 채, 과연 생동감 넘치는 인물과 그 사람이 살아갈 공간을 만족스러울 만큼 잘 표현해낼 수 있을 것인가?


결과부터 말하자면, 이것은 극복 가능한 과제였다. 이 또한 특별한 비결은 없었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나 같은 한국 작가들이 꾸준히 한국인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써내면서 결국은 이 문제를 극복해냈다고 믿는다.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한국에 있는 미국 고전 SF 팬들이 현대 한국의 SF 작가를 평가할 때 종종 사용했던 ‘생활 SF’ 같은 키워드를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도 종종 들었던 이 평가는, 사실 칭찬을 위해 고안된 용어는 아닌 것으로 짐작된다. 과학이나 기술 같은 “중요한” 주제보다는 왠지 한국인의 삶을 표현하는 “사소한” 목적에 더 집중함으로써 한국 SF를 영 이상한 곳으로 몰고 가고 있다는 부정적인 평가와 연결되곤 했던 말이니까. 아무튼 표현을 만든 사람들조차 꾸준히 증언해온 바와 같이, 나를 포함한 한국 SF 작가들은 SF에서 한국어와 한국인과 한국적인 공간을 다루는 법을 오래 연마해왔으며, SF가 잘 써지지 않는 공간에서 모국어로 SF를 쓰는 일이 그다지 실험적으로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결과를 부지런히 축적해왔다.


아직도 한국어로 SF를 쓰는 것이 어색하게 여겨지는 작가가 있다면, 나는 이런 간단한 해법을 권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냥 현대 한국 SF 작가의 최신작을 몇 권 읽어보면 된다. 즉, 이 문제는 이미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 기여가 별것 아닌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기를 바란다. 15년간 주인공 이름이 김은경인 SF를 써서 발표하는 일은 생각만큼 단순한 과정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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