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위에 놓이는 것
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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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다. 다른 곳이다.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 뇌가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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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호텔에 묵을 때면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진다. 낯선 장소에서의 기분 좋은 긴장, 시트의 감촉,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들! 내겐 특별한 계획도 없다. 다리 사이에 시트를 말고 누워 하품을 하고, 눈을 끔뻑인다. 태평히 지나는 아침 시간. 욕실로 가 오줌을 누고 양치를 한다. 세수는 하지 않고 눈곱만 뗀다. 아무 옷이나 꿰어 입고 식당으로 내려간다. 여행지에서 호텔 조식을 먹는 일, 먹고 올라와 침대 위에서 좀 더 뭉그적거리는 일을 나는 퍽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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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안은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로 붐빈다. 얇은 책 한 권을 테이블에 올려두고(펼쳐보지도 않고!) 오른쪽 식탁에 앉은 중국 남자를 구경한다. 그는 엄청난 양의 햄과 치즈를 빵 위에 올려 먹는 중이다. ‘아침부터 과식이군, 먹는 것에 비해 살이 안 찌잖아?’ 쓸 데 없는 참견을 (속으로) 해본다. 왼쪽 식탁엔 금발에 트렌치코트를 입은, 말라깽이 여자가 앉아있다. 견과류를 넣은 요구르트와 커피 한 잔을 ‘달랑’ 앞에 두고는, 그마저도 잘 먹지 않는다. ‘나도 그녀처럼 간결하고 우아한 식탁 풍경을 연출해볼까?’ 몸은 그럴 생각이 없다. 나는 스크램블과 샐러드, 볶음밥과 연어, 크루아상을 양껏 차려놓고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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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부르니 식탁 위 풍경에 눈이 간다. 크기가 다른 숟가락과 포크, 칼, 반짝이는 식기들, 소금통과 후추통, 냅킨과 테이블용 수건이 음식과 어우러져 있다. 식탁 위에 음식과 식기만 놓이는 것은 아니다. 그날 날씨, 어제의 피로, 몇 세기에 걸쳐 곤고해진 동서양의 식문화가 ‘같이’ 놓인다. 눈길을 돌려 다른 여행자들의 식탁을 본다. 식탁 위에 무엇이 더 놓이는가, 상상한다. 조간신문에서 흘러나온 정치 이슈, 환경 문제, 연쇄살인범의 몽타주가 놓일 수 있다. 성난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나란히 놓일 수 있다. 기다림이나 후회가 놓일 수 있다. 쇼핑 목록이나 여행 일정이 놓일 수 있다. 어쩌면 신혼부부의 식탁 위엔 피로한 사랑이, 노부부의 식탁 위엔 편안한 권태가 놓일 수도 있겠다. 아이들이 자리한 식탁은 산만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음식 외의 것에 더 관심이 많고, 식탁 곳곳에 자기 상상으로 만든 피조물들을 세워놓기도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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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들의 식탁’을 궁금해 하다 보니, 내 식탁 위가 난삽한 상상으로 그득하다. 접시 옆에 아무렇게나 놓인 칼과 포크가 작은 무기처럼 보인다. 내 나라에서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식탁 풍경이 생경하게 느껴진다. 동양문화권에서는 식탁에 칼을 올리지 않는다. 요리할 때 재료를 먹기 좋게 자르기에, 식탁에서 음식을 썰어 먹을 일도 없다. 포크의 생김새를 찬찬히 살펴본다. 작은 삼지창이다. 서양 사람들은 사냥이나 전쟁을 할 때 쓰던 도구를 식탁 위에 ‘그대로’ 끌어왔다.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가 일본을 여행한 후 쓴 『기호의 제국』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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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젓가락은 음식물을 나누기 위해 서양의 도구처럼 자르거나 찌르는 대신 분리하고 헤쳐 놓거나 흩뜨려둔다. 젓가락은 절대로 음식물을 침해하지 않는다. 조금씩 해체하거나 찔러서 몇 조각으로 나눔으로써 원래부터 있던 재료의 균열을 다시 발견한다.”
??????― 롤랑 바르트 『기호의 제국』 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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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는 서양의 나이프나 포크에 비해 ‘평화와 중립’을 추구하는 젓가락을 예찬했다. “창과 칼로 무장한 서양의 영양 섭취 행위에는 약탈의 몸짓이 여전히 남아있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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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엔 포크와 나이프를 양손에 쥐고 음식을 썰어 먹는 서양의 식사가 근사해 보였다. 양식당으로 외식을 하러 갈 때면 “칼질하러 간다”며 즐거워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흐른 지금, 더 이상 나는 서양 식탁의 풍경을 동경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고기를 덩어리째 식탁 위에 내어놓는 것, 그것을 포크와 나이프로 자르고 찔러 섭취하는 것, 음식을 자기 접시에 조금씩 덜어와 개인적으로 먹는 것. 이런 것들이 어린 내 눈에 왜 좋아보였을까? 나도(우리도) 강자가, 침략자가, 선진국민이 되고 싶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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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멀리 왔다. 식탁에서 일어나면,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갈 것이다. 식탁에 음식만 놓이는 게 아니듯, 침대 위에도 사람만 눕는 게 아닐 것이다. 침대 위에는 무엇이 더 누우면 좋을까? ‘열정과 쾌락’에 충직한 사랑이 좋을까? 또 모른다. 누군가는 그저 ‘고요와 책과 잠’만이, 같이 눕고 싶은 전부라 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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