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Culture

목소리의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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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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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동시에 침묵했던 순간


인터뷰를 정리하며 나는 인터뷰이가 나를 보던 시선, 그와 둘이 마주하고 있던 순간의 분위기, 그의 목소리의 변화 같은 언어 외적인 요소들을 반추한다. 이 복기의 과정을 통해 문장과 문장 사이에, 이런 비언어적 요소들을 담을 수 있기를 바라며 단어를 고른다. 어떤 문장들은 귓가에 아주 오랫동안 남는다. 짤막한 말이지만 여운을 남기는 문장들에는 내가 살아보지 못한 순간들의 진실이 들어 있다. 그리고 문장을 넘어 우리가 동시에 침묵했던 순간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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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명의 인터뷰이들을 만났지만 가장 느린 템포로 길게 이어졌던 인터뷰였다. 가장 자주, 오래 들은 음반의 주인공인 피아니스트를 만났다. 그리스 제국을 세운 알렉산더 대왕과 이름이 같은 덕에 자신의 뵈젠도르퍼 피아노를 ‘부세팔루스’라 이름 붙였다는 그는 유쾌한 대화 상대였다. 이어서 그는 나에게도 이름 붙인 악기가 있는지 물었고 내 첼로의 이름을 말하자 그가 첼로는 남성(프랑스어에서)이 맞다고, 근사한 이름이라며 웃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처음 만나는데도 마치 수년간 알고 지낸 친구 같은 대화가 이어졌다. 파리 오페라의 발레리나였던 어머니 덕에 5살에 피아노와 발레를 시작했다는 그가 긴 팔을 뻗어 뽀르 드 브라로 몇몇 발레 레퍼토리를 흉내냈고, 이어서 우리는 피나 바우슈와 존 노이마이어 이야기를 하며 가장 좋아하는 파리 오페라의 에투알(최고등급수석무용수)이 누구인지 말하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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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음악가이기는 하지만 나는 사실 춤을 더 동경합니다.” “저 역시 살 플레옐(클래식 공연장)보다 무용 공연을 보러 오페라에 더 자주 가는걸요.” “내가 진짜 가장 이상향으로 삼는 건 사실 사람 목소리예요.” “목소리요?” “노래 말이에요.” “바바라를 알아요?”라고 묻는 그에게 고개를 저었더니 그가 스마트폰을 꺼내 음악을 틀었다. 피아노 선율과 함께 나직하면서도 호소력 넘치는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운데 테이블을 놓고 마주한 상태에서 나는 크리스털 물잔의 남은 물을 얼른 들이켜고 비워진 잔에 그의 스마트폰을 집어 넣었다. “이러면 소리가 더 공명되면서 생생하게 들려요.” 그가 집게손가락을 입술에 가져갔다. 우리는 말없이 바바라의 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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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미 와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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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력 짙은 나직한 목소리에 실린 시와 같은 가사들이었다. 노래하는 이의 감정이 목소리에 고스란히 실려 있었다. 노래를 들으며 몇몇 단어들을 따라가다 보니 눈앞이 점점 흐려졌다. 애써 눈물을 참는 나에게 그가 얼른 냅킨을 내밀었다. “이렇게 단숨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거든요. 그게 목소리예요.” 그가 바바라에게 속절없이 반해버렸던 소년 시절의 몇몇 일화를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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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애써 감정을 절제하려 가장 건조한 단어들을 골랐다. “목소리에는 정말 신기한 힘이 있어요. 듣는 순간 우리를 꼼짝없이 사로잡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고 온 신경을 다해 거기에 집중하게 만들거든요. 목소리가 들어간 음악을 들으면서 다른 걸 하는 건 좀 힘들지 않아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바라는 우리가 영원히 잃어버린 목소리가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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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잔뜩 흔들린 마음은 쉽게 감춰지지 않는다. 그가 발음한 ‘영원히 잃어버렸다’는 표현이 화살처럼 나를 찔러왔다. 나는 고개를 떨구고 냅킨을 펼쳐 얼굴을 가렸다. “한 곡만 더 같이 들어요.” 우리는 숨죽인 채로 를 들었다. 그가 머무는 호텔 스위트룸의 거실에는 크리스털 잔에 담겨 한층 더 울림이 깊어진 바바라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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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로 다다르고 싶은 지점, 목소리


같이 노래를 듣다 인터뷰 시간이 모자라게 된 나에게 그가 점심을 같이 먹을지 물었고, 우리는 호텔 로비로 내려갔다. 식사를 주문하고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는 그에게 괜찮느냐고 묻자 그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약의 부작용이 생겼거든요. 매번 무대에 서는 게 너무 떨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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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작용이라는 단어에 눈을 동그랗게 뜬 나에게 그가 별거 아니라며 여전히 웃는 얼굴로 캐시미어 스웨터를 걷어올려 옆구리를 슬쩍 보여주었다.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손을 잡아 옆구리에 가져갔다. 마른 몸에 마디마디 등뼈가 드러난 그의 허리 부분에 슬쩍 부풀어 오른 덩어리진 무엇이 손끝에 느껴졌다. 그는 오래되어 몸의 일부 같다며, 지금은 많이 크기가 줄어들었다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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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서야 나는 그가 지고 있던 두려움과 스트레스가 이렇게 덩어리진 채 몸에 자리잡았다는 것을 촉감으로 인지할 수 있었다. “연주할 때 긴장하면 손이 정말 많이 떨려요. 그래도 우리는 피아노가 앞에 있어서 청중을 정면으로 바라보지는 않아 다행이죠. 노래하는 사람들은 정면으로 청중을 바라보며 노래를 하는 거니까, 몸을 떨지 않으면서 목소리를 꺼내놓는 거니까 정말 대단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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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나서도 우리는 좋아하는 목소리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매일의 연습과 피아노 소리에 지친 그에게 가장 위안이 되어주는 건 사람의 목소리라고 했다. “피아노로 도달하고 싶은 지점이기도 해요. 내 피아노가 그대로 노래처럼, 한순간에 듣는 사람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가서 그들을 포로로 만들기를 바라죠. 듣는 즉시 속절없이 사로잡아 꼼짝없이 만들어버리는 건 음악만이 가능한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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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나에게 좋아하는 목소리들에 대해 물었다. 넉넉하고 깊고 풍성하면서 동시에 빛이 깃든 목소리를 지닌 소프라노 제시 노먼을 말하자 그가 스마트폰을 뒤져 제시 노먼이 부르는 에릭 사티의 를 틀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늦은 점심이라 로비 안에는 우리 둘뿐이었다. 탄산수를 얼른 들이켜고 빈 물잔에 그의 스마트폰을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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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 노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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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사티의 음반도 녹음했던 그가 말을 이었다. “이런 목소리라면 이 곡은 마땅히 소프라노에 의해 불리워져야 해요. 피아노로는 그저 간신히 흉내만 낼 수 있으니까요.” 에 이어 생상스의 삼손과 데릴라 중 가 흘러나왔다. “제목대로 정말 그래요. 우리의 심장이 보통 꽁꽁 문을 닫고 있지만 누군가의 목소리에 반했을 때에는 활짝 열리거든요. 그 목소리는 우리의 심장에 들어와서 우리와 같이 사는 거라고, 우리 안에서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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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십대 청년이던 어느 혁명기념일에 들었던 잊을 수 없는 <라 마르세예즈>에 대해 말했다. 프랑스 국기를 드레스로 만들어 입은 제시 노먼의 목소리가 콩코드 광장에서부터 샹젤리제 거리를 어떻게 가득 메웠는지, 그의 표정은 그날의 흥분과 감동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들었던 제시 노먼의 <라 마르세예즈>는 전무후무한 충격적인 경험이었으며, 특별하고도 장엄한 아름다움이었다고 말하는 그가 제시 노먼의 <하바네라>를 틀었다. 인터뷰는 이미 안중에도 없는 눈치였다. 이어서 그는 마리아 칼라스의 를 틀었고, 노래와 노래 사이에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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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라와 칼라스를 들으며 음악을 꿈꾸고 열망했던 십대 시절과, 음악원을 다니면서 콩쿠르를 준비한 이야기, 음악원을 졸업하고 콩쿠르에 입상하고 나서도 밥벌이가 시원치 않아 무성 영화 클럽의 반주 아르바이트를 맡아 하면서 생계를 이어나간 시절의 에피소드가 술술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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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저트를 주문하며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이 궁금하다는 그에게 아델과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노래를 아느냐고 묻자 그가 탁월한 목소리에는 장르의 구분이 없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로만 보면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가진 건 아니지만 노래를 부르는 순간, 그 목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특별해지고 호소력을 갖는 마법이 일어난다는 걸 아는 그가 연달아 노래를 틀었다. 에이미 와인하우스, 아델, 휘트니 휴스턴, 에디트 피아프, 사라 브라이트만…..


질감과 결과 색채가 다른 목소리들에 귀 기울이며 우리는 천천히 디저트를 먹고 샴페인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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