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Culture

권경률 “역사의 행간에서 사랑을 발견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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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 는 사랑으로 다시 쓰는 한국사 이야기다. 남녀의 사랑을 실마리 삼아 삼국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역사의 맥락을 관통한다. 사랑은 가장 사소한 개인사 같지만, 알고 보면 가장 사회적인 관심사이다. 한국사의 지배층은 남녀의 사랑을 다스리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때로는 사랑을 죄악시하면서 민중에게 공포심을 심었고, 때로는 사랑을 이용해 자신들의 권력욕을 채웠다. 우리가 몰랐던 한국사의 진실이다. 사랑은 나비효과를 일으키며 역사가 되었다. ‘사랑’이라는 새로운 관점으로 한국사를 쓴 권경률 저자는 『조선을 새롭게 하라』,?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 등 역사의 행간을 기발하게 채워나가는 역사 칼럼리스트다. 팟캐스트, 유튜브에서 ‘역사채널 권경률’로 독자들과 활발하게 소통하고 있는 권경률 저자에게 새로운 역사 이야기를 들어 보자.


책 제목이 연애 소설 같습니다. 역사 이야기 아닌가요? ? ?


제목이 근사하죠? (웃음) ‘사랑은 가장 사소한 개인사 같지만, 알고 보면 가장 사회적인 관심사이다.’ 1년 전 이 책을 처음 구상할 때 제가 적어 넣은 글귀입니다. 역사가 된 사랑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습니다. 남녀의 사랑은 시대를 불문하고 사람들의 관심사였으니까요. 한국사는 거창한 명분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 내막을 살펴보면 사사로운 데서 말미암은 일들이 많습니다. 옛사랑이 그렇습니다. 그 이야기에 역사적 품격을 입혀보려고 지난 1년간 매달렸습니다. 한국사에 미친 옛사랑의 나비효과를 파고들었습니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고, 출판사에서 근사한 제목까지 붙여주셔서 만족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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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여성 나혜석


표지 그림이 나혜석입니다. 굉장히 논쟁적인 인물인데요.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요?


이 책은 금지된 사랑에 빠진 여자 이야기를 4개 장에 걸쳐 다루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가부장 사회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힘이 세졌는지, 역사적 맥락을 파악하기 위해서죠. 그 가운데 가장 먹먹하게 쓴 게 나혜석 편입니다.


신여성 나혜석은 일제강점기에 여성 해방을 위해 자신의 삶을 던져 싸웠습니다. “정조는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 여성의 해방은 정조의 해방부터 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정절을 내세워 여성의 일생을 억압하고 구속해온 가부장 사회의 역사적 본질을 꿰뚫어 보고 정면으로 도전한 겁니다. 요즘 말로 ‘성적(性的) 자기결정권’을 주장한 셈이죠. 신여성에게는 자유연애도 여자가 사람 대접받는 새 시대를 열려는 몸부림이었습니다. 가부장 사회에서 남자들이 좌지우지해온 여성의 삶을 이제 여자들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여자이기 전에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잔혹했습니다. 나혜석은 가부장 사회로부터 조리돌림 당하고 죽음의 길로 내몰렸습니다.?


지금은 어떨까요? 한국에서는 여전히 여자가 온전한 사람으로 살기 어렵습니다. 얼마 전에도 한 여성 연예인이 안타깝게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자유롭고 당당하게 살고자 하는 여성에게 가시 돋친 조롱과 비난을 일삼는 건 왜일까요? 여자는 조신하고 정숙해야 한다는 가부장적 사고방식이 아직도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00년 전에도, 지금도 여자를 남자의 부속물쯤으로 여기는 게 한국의 꼰대 남성 문화입니다. 바로 그 ‘가부장 코리아’의 역사적 뿌리와 실체를 이 책의 2부에서 찾아 나섭니다. 천추태후, 어우동, 황진이, 나혜석으로 이어지는 여자들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서요.


남자 작가인데 여성주의적인 시각이 돋보입니다. 혹시 페미니스트입니까?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일개 남자일 뿐입니다. (웃음) 사실 학문적이거나 운동 차원의 페미니즘은 잘 모릅니다. 단지 제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아내와 유치원생 아들을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려고 합니다. 여성과 아이의 눈으로요. 그것이 남자 어른 중심으로 치우친 세상을 조금이나마 바로잡는 길일 것입니다.?


제가 어떤 사람이냐고요? 사람의 바탕은 어린 시절에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 큰 상을 받았습니다. 무려 ‘세계에서 가장 착한 어린이 상’이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착한 어린이라니, 스케일이 참 크지 않습니까? (웃음) 알고 보면 이름 모를 단체에서 수여한 정체불명의 상이었지만, 어쩐지 저는 착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며 살았어요.?


한번은 어머니 손에 이끌려 역술인을 찾아간 적도 있습니다. 그분이 저를 딱 보더니 “젊은 날에 발길 닿는 대로 여행할 팔자”라고 하더군요. 어느 정도는 맞았어요. 결혼 전까지 여행자로 살았습니다. 아, 세계 일주 하는 그런 여행이 아니라 직업상 세상을 두루 구경한 겁니다. 회사원, 스피치라이터, 칼럼니스트 등등 정말 발길 닿는 대로 여행한 셈이죠. 그러다가 나이 40줄에 늦장가 들고 늦둥이 얻으면서 역사 이야기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왜 역사 이야기냐고요? 착한 사람들은 다 역사 속에 있거든요. (웃음)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했으니 먼 길을 돌아 전공을 되찾은 것입니다. 학교 다닐 때는 잘 몰랐는데 뒤늦게 역사하는 재미에 푹 빠졌어요.


기존의 역사물과는 접근법이 다른 것 같습니다. 본인만의 역사관이 있나요?


저는 인생의 정답이 아니라 좋은 질문을 구하기 위해 역사합니다. 그것이 생각을 깨어 있게 만드니까요. 자동차 내비게이션에 비유할 수 있는데요. 혹시 한밤중에 내비게이션 켜고 운전하다가 낯설고 어두운 산길로 빠져서 고생한 경험이 있습니까?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정답은 편리하긴 하지만 생각을 잠들게 합니다. ‘조금 더 가면 나들목이 나오는데 왜지?’ 하고 질문을 던져야 생각이 깨어납니다. 이런 질문들이 역사에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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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어떻게 역사해야 할까요? 저는 세상에 던져진 삶에 관심이 많습니다. 엉뚱한 얘기 같겠지만 제가 사는 아파트 화단에 길고양이 남매가 살고 있습니다. 재작년쯤 화단에서 아장아장 걸어 나오는 녀석들을 처음 봤습니다. 동네 캣맘에게 들었는데 어미가 차에 치여 죽고 인근의 왕초 고양이에게 몹시 시달렸다고 합니다. 그 녀석들이 지금은 왕초를 물리치고 아파트를 여유롭고 당당하게 활보합니다. 얼마 전에 보니 귀여운 새끼들까지 거느렸더군요.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생명이었는데 훌쩍 자라나 일가를 이룬 것입니다. 아름답고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이런 이야기를 저는 역사 속의 사람들에게서 찾습니다. 사람을 읽고 생각하고 쓰면서 역사의 행간을 채워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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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장군


역사의 행간을 채운다?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요?


역사는 꼬불꼬불한 기록만으로는 온전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진실은 언제나 빛바랜 사료의 행간에 숨어 있는 법이죠. 이 책의 3부는 사랑을 이용하는 남자 이야기입니다. 그 가운데 김유신을 예로 들어 볼까요? 제 아들이 작년에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라는 옛 가요를 즐겨 불렀습니다. 요즘은 유치원에서 이 노래를 가르치죠. 그런데 2절 가사의 ‘말목 자른 김유신’이 이상하다는 거예요. 말의 목을 자르는 건 나쁜 짓 아니냐고요.


김유신은 왜 애인 천관녀(天官女)의 집 앞에서 말의 목을 베어 역사적인 동물학대자가 되었을까요? 이 일화의 출처는 고려 문신 이인로의 저술입니다. 그것을 저는 『삼국사기』 비교해 재해석했습니다. 화랑 김유신이 산에 들어가서 삼국통일을 맹세하다가 천관신(天官神)의 기운을 받는다는 대목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천관녀는 술 파는 여인이 아니라 말의 피로 하늘에 제사 지내는 신녀가 아닐까, 자문해보았습니다. 김유신은 눈에 안 보이는 천관신 대신 아리따운 천관녀를 내세워 삼국통일이라는 비전을 홍보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역사의 행간을 채우는 일은 이렇게 기록과 기록, 사료와 사료 사이로 길을 내어 자기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것입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사소한 사랑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그게 한국사를 바꾸는 밑거름이 되었군요.


사랑은 힘이 셉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표면적인 힘은 공포와 욕망이지만, 사람의 역사를 움직이는 진정한 원동력은 사랑입니다. 조선 숙종은 사랑하는 여인 장옥정을 왕비로 만들기 위해 집권당을 갈아치우며 당쟁을 사생결단으로 격화시켰습니다. 고려 멸망의 결정적 계기는 우왕을 둘러싼 출생의 비밀이었습니다. 공민왕과 신돈이 한 여인 반야를 사랑했기 때문이죠. 옛사랑은 이렇게 나비효과를 일으키며 역사가 되었습니다.


끝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자랑거리도 좋습니다.


오래된 사랑 이야기에 독창적인 숨결을 불어 넣고 싶었습니다. 재미있게 읽다가 어느 순간 뭉클해지는 책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출판사에서 책을 예쁘게 만들어주셨어요. 거실, 서재 장식에도 안성맞춤입니다. (웃음) 표지는 물론 페이지마다 조그맣게 들어가 있는 임지이 작가님의 그림이 신의 한 수죠. 작업을 함께하면서 팬이 됐습니다. 저의 여행은 역사 속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좋은 동행을 만나고 싶습니다. 독자들이 이 책의 행간을 상상력으로 채워 진정으로 완성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함께 역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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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


역사 칼럼니스트, 작가. 서강대학교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사람을 읽고 생각하고 쓰면서 역사의 행간을 채워나가고 있다. 인생의 정답이 아니라 좋은 질문을 구하기 위해 역사한다. 『조선을 새롭게 하라』(앨피, 2017),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앨피, 2015), 『드라마 읽어주는 남자』(포럼, 2011) 등을 썼다. 팟캐스트, 유튜브, 페이스북에 ‘역사채널 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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