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 유목민
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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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는 생각만큼 자유롭지 않다. 물론 약속 날짜를 정할 때는 좋다. 원고 마감이 있거나 딱 그 시간에 선약이 있는 것만 아니면 어느 날짜로 정해지든 대강 조정이 가능하다. 다만 “조정이 가능하다”라는 표현은 한가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시간에 할 일을 다른 시간에 할 수 있다는 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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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프리랜서는 왠지 자유로울 것만 같다. 소속이 정해져 있지 않고 어느 영주의 깃발 아래에서든 ‘랜스’를 들고 설 수 있을 것처럼 들리니까. 마찬가지로 프리랜서는 왠지 유목민일 것만 같다. 실제로 그런 측면이 있기도 하다. 그런데 유목민처럼 보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뭐가 어떻다는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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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나 인문학 분야에서 유목이라는 주제가 튀어나오면 프랑스 학자들의 노마디즘nomadism이 맨 먼저 호출되곤 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지만, 이것은 좀 안타까운 상황이다. 학문적으로야 나름대로 맥락과 의미가 있겠지만 그 사상이 정말로 유목과 관련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유럽식 노마디즘에는 뿌리 식물 이야기가 나오곤 한다. 아마도 ‘뿌리 하나에 식물 개체 하나’ 하는 방식으로 구분되지 않는 존재, 즉 겉보기에는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개체인 것 같지만 땅속에서는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존재에 대한 비유일 것이다. 의미 있는 통찰이지만, 문제는 뿌리 식물이 유목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땅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 것이 유목의 본질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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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내 접근 방식은 유목의 군사학적 측면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이런 주제에 대해 굳이 접근 방식이 필요했던 이유는, 물론 소설을 쓰기 위해서였다. 내 첫 장편소설인 『신의 궤도』는 ‘나니예’라는 개척 행성에서 벌어지는 정주민과 유목민의 전쟁 이야기다. 원래부터 행성의 관리자로 정해져 있던 사람들이 지배하는 북반구 제국과, 어쩌다 보니 남반구 전체를 장악하게 된 비행기 유목민들의 충돌. 영토 전쟁 이야기 같지만 이 싸움은 세상을 이해하는 전혀 다른 눈, 혹은 다른 삶의 규칙을 가진 사람들 간의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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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를 짓고 도시를 이루며 사는 정주민들의 군사전략은 이미 잘 정리되어 있다. 사실 우리가 접하는 것은 대부분 정주민들의 군사전략이다. 여러 이론가들이 있겠지만, 현상을 단순화해서 원리를 도출하는 작업에 치중했던 조미니 스타일로 설명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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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거점’이 있다. 부가 축적되어 있는 곳이고 궁극적으로 지켜내야 할 목표이기도 하다. 그리고 ‘부대’가 있다. 이 부대가 위치한 지점이 ‘진영’이다. 어떤 지점에 어떻게 서 있는지를 가리키는데, 영어로는 포지션이고 어떤 문맥에서는 입장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거점과 부대 사이를 잇는 가상의 선이 바로 ‘보급로’다. 거점의 부가 부대로 흘러가는 통로인데, 수많은 전쟁 이야기에서 작가들은 이 선을 끊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보급로가 끊기면 병사들이 굶게 되고, 그러면 사기가 저하된다는 논리다. 그런데 실제 상황은 조금 다르다. 인류 역사에서 자기 식량을 싸 들고 다니는 군대가 나타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근대 이전의 군대는 현지 마을을 점령하고 식량을 약탈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보급로가 끊기든 말든 그 길을 통해 식량이 오는 경우는 드물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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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 선은 여전히 중요한데, 위험에 처한 부대가 안전하게 퇴각하는 경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전선에 나가 있는 부대는 여러 차례의 싸움을 한다. 어떤 때는 이기고 어떤 때는 지는 싸움이다. 안전하게 퇴각할 공간이 있는 부대는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지 않는다. 다음에 또 싸우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퇴로가 끊긴 부대는 그럴 수가 없다. 물론 계속 싸움에서 이기면 문제 될 것이 없지만, 대신 앞으로 이어질 여러 차례의 싸움에서 한 번이라도 져서는 안 된다. 그것이 바로 퇴로를 사수해야 하는 이유다. 보급로와 퇴각로를 겸하는 이 선은 군사학 책에서는 ‘연락선’이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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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하면, 정주민의 전략은 지도상의 한 지점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거점과 현재 내가 진출해 있는 위치 사이의 관계다. 상대에게도 똑같이 거점과 현재 위치라는 게 있을 테니, 내 연락선을 지키면서 상대의 연락선을 끊는 것이 전략의 목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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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유목민의 전략에는 거점 개념이 없다. 그러다 보니 약점인 연락선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서부터 정주민 군대의 헛발질이 시작된다. 이와 관련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황제가 어느 날 유목민인 스키타이족을 정벌하기 위해 아나톨리아 반도로 원정을 나갔다. 대병력이 출동했지만 이 전쟁은 결말이 없다. 페르시아군이 스키타이족 군대를 발견하지 못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농경 민족들은 이와 비슷한 일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약탈을 일삼는” 유목 민족을 정벌하기 위해 어느 어느 황제가 백만 대군을 이끌고 원정길에 나섰다는 이야기. 광대한 영토를 수복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지만, 유목민은 좀처럼 정복되지 않는다. 한자로만 남아 있는 역사 기록과 달리 양쪽 군대는 아예 마주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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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유목 전략의 희한한 장점이다. 인터넷의 익명성을 연상시키는 특징이기도 하다. 실명제와 익명성의 공방은, 이름 없는 존재들의 현실적인 근거지인 몸에 관한 정보를 콕 집어 말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개인의 신상을 공개해버리는 것이 보복이 되는 이유다. 전통적인 정주민 전략에 따르면, 주소지를 찾아가 문을 두드리면 상대의 얼굴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익명의 인간은 얼굴을 볼 수도 없고 다음 단계의 대응을 할 방법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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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도 물론 집은 있다. 다만 집을 싸 들고 다닐 뿐이다. 이론상 순수 유목민을 가정했을 때 이야기지만, 아무튼 원리는 그렇다. 실제 역사에서도 유목민 군대의 후방에는 부족의 구성원들이 가축들과 함께 머무르고 있었다고 한다. 유목민의 경우에도 집을 찾으면 사람을 찾을 가능성이 높지만, 집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거점이 지도 위 특정 지점에 고정되지 않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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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사람들은 이 좋은 것을 왜 안 하는 걸까? 이 부분이 핵심이다. 거점이 따로 없는 이유는 유목민들이 부가 축적된 지점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이들에게 자원은 부의 원천인 거점으로부터 연락선을 따라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들을 먹여 살리는 것은 초원 어디에나 널려 있는 보잘것없는 에너지원인 풀이다. 어디에나 있어서 아무 데도 매여 있을 필요가 없지만, 그 자원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바꿔 말하면 너무나 보잘것없는 자원이기 때문에 그 정도는 어디에나 널려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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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가 유목민의 전략을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는, 결국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달려 있다. 빈곤하지만 자유로운 삶. 그래서 어떤 칸khan은 중국의 사악한 물질문명에 영혼을 뺏기지 말고 조상들의 비옥한 초지에서 진짜 행복을 찾자고 부르짖었지만, 무리를 이끌고 초원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 다른 칸은 정주민 시절의 화려한 삶을 잊지 못해 시름시름 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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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렇게 대단한 부와 명예가 쌓여 있다고 거점씩이나 운운하나 싶겠지만, 점점 작아지는 지금의 문학계에도 “잘 데뷔하는 법”은 널리 알려져 있다. 지면은 어느 작가에게나 소중하지만 모든 작가에게 배분될 만큼 충분하지 않으며, 업계 관계자와 독자가 관심 갖고 지켜보는 지면은 더 적다. 기회가 하나 생기면 그보다 훨씬 많은 창작자가 꿈을 품게 되므로 지면은 언제나 부족하기 마련이다. 문학계뿐 아니라 다른 예술 분야나, 혹은 예술이 아닌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정주민의 전략은 나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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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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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가 일반적으로 좋은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영리하게 데뷔하는 일’은 부정적인 일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창작자에게 다른 창작자와 작품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거점으로 삼는 선택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거점은 돈과 명예가 쌓여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우선 아름다운 것들이 잔뜩 모여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유목민의 눈으로 봤을 때 정주민의 물질문명은 사악해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의 눈에 정주민의 문명은 진심으로 훌륭한 것으로 비쳤을 것이다. 좋은 것을 알아보는 눈은 좋은 것들이 많이 있는 곳에서 길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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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거점 또한 지도상에 찍혀 있는 특정한 지점이라는 사실이다. “○○○ 예술 단체는 무엇을 아름답다고 규정하고 있는가?” 이런 판단은 기대와 달리 중립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작품에 대한 평가를 오로지 인물 중심으로 하고 그 안에 담긴 세계를 덤으로 간주하는 어떤 문학계나, 천문학이나 물리학을 바탕으로 한 상상력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보고 사회학적 혹은 인문학적인 사고실험은 가벼운 시도로 취급하는 어떤 SF 모임 등등. 이 또한 반드시 누군가의 잘못은 아니다. 관점이란 원래 구체적이기 마련이고 예술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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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의 특수한 입장이 거점을 이루고 그 주위에 사람과 작품이 잔뜩 모여 있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작가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사회과학적인 상상을 바탕으로 세계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목표인 작가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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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경우 정주민이 되어 적당한 거리까지 거점에 다가가거나, 아니면 자기 글이 지향하는 지점에 그대로 머무르며 유목민이 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거점으로부터의 거리가 너무 멀어지면 거점과 나 사이의 거리, 즉 연락선의 거리도 따라서 멀어진다. 퇴로가 끊길 위험이 커진다는 의미다. 그러니 되도록 거점에 가까이 붙어야 한다. 그러려면 그 거점이 지니고 있는 특수한 입장에 스스로를 적응시켜야 한다. 이것은 물론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뜻을 접다니, 그럴 바에야 거점이니 연락선이니 하는 것 자체를 치워버리고 유목민이 되는 편이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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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것은 창작자 개인이 선택할 문제다. 결과를 책임질 사람도 아마 자신밖에 없을 테니까. 관건은 이름에 이끌려 괜히 쓸데없이 유목민이 되지 않는 것이다. 별로 중립적이지 않은 충고이지만, 이 문제에 관해서는 이렇게 충고하는 것이 중간에 가깝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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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은 빈곤하다. 유목민은 풀을 뜯어 먹고 산다. 풀을 뜯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아니라 가축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유목 생활의 근간은 풀이다. 빈약하기에 그쯤은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는 사소한 가치들로부터 존재의 이유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여기에서 가치란 돈과 명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작가가 작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평가가 필요하고 독자와의 상호작용이 절실하다. 그 모든 것들이 다음 글을 쓸 수 있는 계기를 이루는데, 이 계기를 충분히 모으지 못하는 프리랜서는 더 이상 직업을 유지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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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덧붙이자면, 사실 유목 전략이 어울리는 사람은 따로 있다. 똑같은 숙제를 받아도, 일단 도서관으로 달려가 관련된 자료들을 모으는 것으로 일을 시작하는 사람이 있고,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느라 남들보다 늦게 도서관을 찾는 바람에 쓸모 있는 자료는 거의 손에 넣지 못하는 인간이 있다. 유목은 후자에 어울리는 전략이다. 이미 쌓여 있는 좋은 것들을 빨리 받아들여서 그 위에 좋은 것 하나를 더 보태는 일이 익숙한 사람은, 어쩌면 유목을 할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 거점에 대한 갈망을 버릴 수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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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을 해도 좋은 사람은, 이미 있는 것을 빨리 흡수하는 요령은 별로 없지만 자기 속도대로 천천히 고민해서 스스로 해법을 찾아내는 일이 몸에 익은 사람이다. 언뜻 보기에 이런 사람은 발전 속도가 느리다. 어떻게 도달해야 하는지 모두가 알고 있는 지점까지 이르는 데 남들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스스로 해결 방법을 만들어온 사람의 진가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방법을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발휘된다. 평소에도 다른 것을 참고한 적이 별로 없으므로, 이런 사람은 늘 해왔던 것과 똑같이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한발 더 전진해버린다. 모두가 멈춰 있는 지점이므로 그의 한 걸음은 이제 느려 보이지 않는다. 일이 아주 잘 풀렸을 때 이야기지만, 유목 전략은 이런 유형의 성장을 꿈꿔본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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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 문제 삼아 이야기하자면, 사실 위의 두 단락은 연락선이 지나치게 길어진 사족이다. 요새화된 본문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주장이라는 뜻이다. 이런 말을 너무 길게 쓰면 퇴로를 차단당해 논파되기 딱 좋다. 이럴 때는 어서 거점으로 돌아가서 연락선의 길이를 0으로 만드는 방법이 상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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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다시 맨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이 장의 거점에 해당하는 질문이다. 프리랜서는 자유로울까? 정주민이라면 별로 그렇지 않다. 유목민이라면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그 자유도 거저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가능하면 회사에 다니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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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궤도배명훈 저 | 문학동네
아빠가 만든 이 역겨운 낙원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방법은 요원하기만 하다. 게다가 나니예를 탈출할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는 이는 분명 죽은 줄로만 알았던 바클라바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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