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Culture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보내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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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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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운동 없는 날이지? 그럼 퇴근하고 나서 세탁기를 돌리고, 그럼 한 시간 반 정도 시간이 걸리니까, 팩을 하고, 샤워를 하고, 오랜만에 카레 해먹을까? 카레 만들어 먹고 설거지하면 얼추 빨래 끝, 빨래 널고 청소하고… 아 그럼 땀이 나겠네. 그러면 세탁기를 돌리고 카레 만들어 먹고 청소랑 설거지하고… 재활용,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고 팩을 하고 샤워를 해야겠다. 완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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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내 마음의 소리, 하루를 시작하면서 떠올리는 그 날 저녁 일정이다. 비는 시간을 잘 못 견디기 때문에 남는 시간 없이 촘촘하게 할 일을 채운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시간 동안 가만히 쉬면 어때서, 그걸 못 견딘다. 그 시간에 최대한 효율적으로 다른 일을 같이 해서 모든 일이 한 번에 다 끝나도록 계획을 짠다.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살아요? 하고 묻는다면 더 심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있다. 한 때는 주7일 약속을 잡았어요. 2019년 5월 캘린더를 보면 하루도 빠짐없이 사람을 만나고 영화를 보고 몸을 움직였다. 그게 가능하냐고 당신이 얼빠진 표정으로 묻는다면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대답할 것이다. 가능하더라고요. 저도 제가 이 정도로 심각한 줄은 몰랐죠. 당신의 표정이 아직도 심각하다면 나는 한층 과장된 몸짓으로 한 마디 더 덧붙일지도 모른다. 다 먹고 놀자고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시간과 건강이 허락할 때 최대한 나가 놀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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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다 먹고 놀자고 하는 일이라면 내가 즐거워야 할 텐데. 대다수의 시간 동안 나는 깔깔 웃으며 행복했으나 가끔은 계획에 제 발등이 찍혀 힘들었다. 나 이제 그만 좀 쉬고 싶은데, 좀 눕고 싶은데. 오늘 또 누굴 만나야 되지? 다음으로 미룰 수 없나? 분명 즐겁게 약속한 만남이었고 만나면 깔깔대고 웃을 것이 분명하나, 몸과 마음은 매일 돌아오는 서로 다른 약속들로 너무 지쳐있었다. 나는 삶을 계획적으로 구성하는 데에 너무 큰 에너지를 쏟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시간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내 손 안에 너무 많은 시간이 주어져 있어요, 혼자 쓰기엔 이 시간들이 너무 많아요. 나는 시간이라는 공을 여덞 개쯤 저글링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감당이 안되네요, 잠시도 쉴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그만 둘 수도 없잖아요? 『어린 왕자』에 나오는 기묘한 어른처럼 굴면서 죽음의 저글링을 계속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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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에다 둘을 더하면 다섯, 다섯에다 일곱을 더하면 열둘, 열둘에 셋을 더하면 열다섯. 안녕. 열다섯에 일곱을 더하면 스물둘, 스물둘에 여섯을 더하면 스물여덞. 다시 담뱃불 붙일 시간이 없어. 스물여섯여섯에 다섯을 더하면 서른하나라. 후유! 그러니까 오억 일백육십이만 이천칠백삼십일이 되는구나.”?
- 『어린 왕자』? , 생 택쥐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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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이러다가 큰 일이 나겠다는 경각심이 들었다. 업무상 실수와 실존적 분노(이라고 쓰고 퇴근길 숨도 쉬기 어려울 만큼 사람으로 가득 찬 버스가 신호등마다 멈춰 서 머리 끝까지 화가 올라온 것이라 읽는다. 일인분의 숨조차 보장되지 않는 버스!)를 겪고 나서 나는 뻗어 버렸다. 저녁을 먹을 기운도 없었다. 씻지도 못하고 아주 일찍 잠에 들면서 어렴풋이 생각했다. 이대로는 안돼, 이렇게 살다가는… 다음 날 잠에서 깬 나는 느리게 살아 보기로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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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빨리 가다가는 죽을 만큼 뛰다가는 아 사뿐히 지나가는 예쁜 고양이 한 마리도 못보고 지나치겠네?- 『느리게 걷자』, 장기하와 얼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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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지난 주말에는 아주 조용하고 느린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나오는 소설을 보았다. 이전에 몇 번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소설이었다. 생활의 태도는 독서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정보가 차곡차곡 쌓이는, 속도감이 있는 지적 대화를 지켜보길 즐기는 나는 그 소설의 속도를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자꾸 조바심이 났다. 언제까지 이들은 이런 대화를 반복하는 걸까. 그럴 때마다 나는 책을 내려놓았다. 이번 시도는 성공이었다. 소설을 손에 잡자마자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 무엇이 달라졌는고 하니, 나 스스로 느린 사람이 되고자 템포를 늦추는 과정 중이었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곱씹는 듯 천천히 움직이고 말하는 그 소설을 읽으면서 편안함을 느꼈다. 안정적이었다. 세탁기가 정해주는 한 시간 반이라는 데드라인이 없었다. 당신이 필요한 만큼 시간을 가져요. 우리의 상황과 대화를 천천히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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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재 씨, 춥네요. 가만히 서 있어서 그래요. 죽겠다. 죽겠다니요. 그냥 죽겠다고요. 입버릇인가요. 죽을 것 같으니까요. 무재 씨가 소매로 풀 즙을 닦아 내고 똑바로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죽을까요? 여기서, 라고 너무도 고요하게 말하는 바람에 나는 겁을 먹었다. 새삼스럽게 무재 씨를 바라보았다. 검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소엔 좀 헝클어진 듯 부풀어 있던 머리털이 빗물에 젖어서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은교 씨,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정말로 죽을 생각이 아니라면 아무렇게나 죽겠다고 말하지는 마요.
- 『백의 그림자』 ?, 황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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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지런한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여덞 개의 공을 던지고 받는 삶을 지속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부지런이 아니라 조바심이었다. 아마 부지런한 것이었다면 스스로 지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더 많은 일을 더 빨리 처리하고 싶은 욕심, 데드라인에 대한 압박감, 이해 받고 싶은 마음은 나를 경주마처럼 몰아붙였다. 시간을 가져요. 숨을 쉬어요. 때마침 손에 잡힌 소설은 자신의 리듬에 따라 내가 쉴 수 있도록 본보기를 보였다. 이렇게, 천천히, 이야기해도, 괜 찮 아 요 . 평소의나라면저만치먼저달려가어서오라고손을흔들었을텐데, 그 날의 나는 얌전히 그들을 따랐다. 괜 찮 았 다.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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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그저 안전한 장소를 찾고 있을 뿐이야. 만일 그런 곳을 찾지 못하면, 그때는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배워야만 해.” 나는 이게 절대 내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생은 너무 꽉 차 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니까.
- ?『연애의 기억』? , 줄리언 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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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도 그 다음으로 읽은 소설에 위의 문장이 나왔고 나는 조금 울고 말았다. 수전은 중년이 될 때까지 자신이 안전한 장소를 찾지 못했고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 절실했다. 아직 대학생에 불과한 케이시 폴은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시간이 흐르고 역시 중년이 된 그는 그 역시 어느 순간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깨우쳐야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도 소설의 문장을 읽는 순간 깨닫는다. 내가 버리지 못한 저글링 공들이 시간을 보내기 위한 나름의 방법들이었구나. 눈물을 닦으며 생각한다. 그래도 방법 때문에 내가 힘들어져서는 안되지. 다른 방법을 더 찾아보자. 천천히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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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에는 시간을 조금 더 무용하게 쓰기 위해 노력했다. 많이 자고 오래 시간을 들이는 요리를 하거나 아무 목적 없이 동네를 걸어 다녔다. 늦게 일어나 차를 마시고 오후부터 다시 잠에 들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 노력했다. 조바심이 발목 근처로 기어오를 때는 소리 내어 스스로에게 말했다. 피곤했구나, 더 자자. 아니다, 실은 다정한 척이라도 한껏 더 하기 위해 길고 요란하게 말했다. 그래애, 피곤했구나아~ 더 자, 더 자자아~ 코 자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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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법을 연습하던 연휴의 끝자락에 친구들을 만났다. 농담을 주고 받다 사뭇 진지해진 대화에서 나는 그녀 역시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음과 시간을 쏟을 대상을 찾는 우리를 보며 문득 시간의 흐름을 느꼈다. 답이 정해진 노력에 익숙했던 우리가 이제는 각자의 답을 찾아 헤맬 때가 되었구나. 최근에 친구의 어머니는 우리의 여행 사진을 보고 미안한데, 너희도 나이가 들긴 들었다, 고 하셨다지만 어머님, 우리는 이제 정말 어리지 않은가봐요, 시간을 보내는 법을 익힐 때가 되었어요. 느리게, 어쩌면 최선의 노력을 하지 않는 방법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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