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내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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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어떻게 생겼을까? 이름표를 붙이지 않고 작가를 작가처럼 표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작가 룩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룩을 구성하는 요소는 어떤 것들일까?
작가는 꽤 오래된 직업이다. 사람들은 세상 어딘가에 소설가라는 직업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소설을 거의 읽지는 않지만, 한국에서도 소설이 나온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으므로 한국 어딘가에 소설가가 살고 있으리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런데 실생활에서 소설가를 만나면 사람들은 마치 마법사나 우주 비행사를 만난 것처럼 깜짝 놀라곤 한다.
“소설가 실물은 처음 봤어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있는데 정말이었네요!” 영어 학원에서 만난 많은 사람이 이런 신기한 반응을 보였는데, 그 뒤에는 반드시 이런 말이 덧붙곤 했다. “책은 서점에 가면 살 수 있나요?” 그러면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책 소개를 한다. 공부를 그만둔 나이에 영어로 말하는 법을 다시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오로지 외국인들에게 내 책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으니 나로서는 딱히 피할 이유가 없다.
물론 내 안내를 받은 사람 중 상당수는 책을 사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에 있는 영어 학원이란 그런 곳이다. 모두가 데면데면하게 남남으로 앉아 있다가 선생님이 수업 시작을 선언하면 갑자기 마음을 열고 서로 자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는 마법의 시공간. 그 마법이 끝나고 나면 책 제목 같은 것은 휘발돼도 어쩔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상 공간에서 소설가를 목격한 사람들의 반응이다. 그리고 소설가를 처음 본 사람들의 반응은 외국인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소설가는 실물로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신기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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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업계 등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작가를 만나면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하지 않을 법한 방식으로 호기심을 드러내곤 한다. 예를 들면, 수입이 어느 정도인지를 묻는 것인데, 초면에 묻고 답하기에 적절한 질문은 아니지만 이런 일은 생각보다 흔하다. 물론 나도 그때마다 버럭 화를 내지는 않는다. 무례의 증거라기보다는 당황한 징후에 가깝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일상에서 작가를 만나는 것은 미리 대비하기 힘들 만큼 보기 드문 상황이다.
소설가가 초면에 받는 질문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작업실이 따로 있으신가요?” 많이 듣는 질문이지만 들을 때마다 의아한 질문이기도 하다. 다른 작가들은 대체로 작업실이 있단 말인가? “수입이 얼마인가요?”와 “작업실이 있으신가요?”는 쌍벽을 이루는 질문치고는 서로 너무 모순되는 질문 아닌가? ‘그래 봐야 얼마나 벌겠어’와 ‘그래도 작업실 임대료는 낼 수 있겠지’는 전혀 다른 두 세계에서 온 것 같은 가정이니까.
아무튼 나는 집에서 일한다. 또한 많은 작가가 나처럼 집에서 일하리라고 믿는다. 지중해 문명 시절 유럽인들이 태평양 같은 다른 바다도 결국 육지에 갇힌 거대한 호수 형태를 하고 있으리라 믿은 것과 유사하다. 그런데 직장과 주거가 분리되지 않은 환경에서는 “집에서 일을 하고 있다”라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기가 힘들다. 그래서일까, 요즘도 드라마에 나오는 소설가들은 종이에 뭔가를 끄적이다가 화가 난 듯 종이를 구겨버리는 행동을 하곤 한다. 그 장면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은 현실적이지 않다는 지적보다는 언젠가 나도 한번 저렇게 해보고 싶다는 쪽에 가깝다. 왠지 그렇게 해야 진짜 작가처럼 보일 것 같아서다. 전형적인 작가의 모습이랄까.
작가처럼 보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국회의원이나 변호사처럼 배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작가 룩이라는 것을 특별히 떠올리기도 쉽지 않다. 작가처럼 입고 작가처럼 말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 게 전혀 없지는 않다. 자기를 소개할 때 “소설가 누구누구입니다” 대신 “소설 쓰는 누구누구입니다” 하는 것이라든지, 방송에서 “저는 소설 쓰는 누구누구이고요” 할 때 맨 마지막 ‘요’를 ‘요오’ 하고 길게 끌어서 발음하는 독특한 방식처럼 문학계 종사자라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특징이 몇 가지는 있다. 문제는 문학계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 신호를 읽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하는 방식 자체도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작가는 누구보다 많은 양의 글을 써대는 사람이지만, 또한 그에 못지않게 많은 양을 지워대는 사람이지만, 이 작업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카페에 종이를 싸 들고 다니거나 바닥에 종이를 구겨서 버리지 않는 탓이다. 장편소설 교정지를 확인하거나 문학상 심사를 하는 경우는 예외다. 종이를 잔뜩 들고 다닐 기회이므로 때를 놓치지 않고 여기저기에 종이를 싸 들고 다니기도 하는데, 평소에도 그렇게 종이를 싸 들고 다녀야 한다면 소설가라는 직업은 지금보다 훨씬 고달픈 일이 될 것이 분명하다.
아무튼 디지털화된 작가의 작업 방식은 컴퓨터 앞에서 노닥거리는 것과 구별되지 않는다. 이것이 21세기의 풍경이고, 가내 등단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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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를 명확하게 정의해보면 이런 식이 될 것이다. 별수 없이 집에서 일을 해야 하는데 전혀 일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상황. 집에는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다. 같이 살지 않더라도 부모나 친지들은 원격으로 걱정스러운 말을 보태곤 한다. 분명 작가로 데뷔를 했고 그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어째서인지 ‘어서 직장을 찾아야 할 텐데’ 하는 걱정을 하는 것이다. ‘어서 첫 소설집을 내야 할 텐데’나 ‘어서 문학상을 타면 좋을 텐데’가 아니다. ‘어서 취직을 해야 할 텐데’다.
대학원생의 처지도 이와 유사할 것이다. 분명 학자가 되겠다고 선언을 하고 20대 내내 그렇게 살아왔는데도, 부모님은 어째서인지 내가 교양을 쌓느라 고시 공부를 잠깐 미루고 있다고 생각하셨다. 내내 퀭한 얼굴로 낡아 빠진 도서관 책 따위를 짊어지고 다니던 시절이었는데도 그랬다. 갓 데뷔해서 아무도 안 보는(물론 몇 명은 본다) 잡지에 단편소설이나 한두 편 내곤 하는 작가란 걱정할 만한 상태조차 아닌 셈이다. 직업이 아니라 아예 취미 영역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로는 고양이와 같이 사는 프리랜서 저술업자들의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고양이를 잘 모르지만, 고양이가 사냥 하나 못 해오는 인간을 한심하게 여긴다는 이야기는 자주 듣는다. 같이 사는 고양이에게 인간 저술업자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행위는 도대체 무엇으로 보이는 걸까? 소셜 미디어에는 자판 위에 드러누운 고양이 때문에 일을 할 수 없다는 작가들의 사진이 종종 올라온다. 고양이의 눈에 비친 작가란 정말이지 천하에 쓸모없는 짐승이 아닐지, 문득 숙연해지는 순간이다.
인간 배우자나 인간 부모님의 인식은 물론 그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또한 무심코 야생의 습성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있다. 작가가 “집에서 일을 하고 있다”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마는 것이다. 소설 쓰기처럼, 아무도 방해하지 않아도 작가가 스스로 방해받을 요인을 찾아내서 어떻게든 방해를 받아버리는 직업 활동에, 같이 사는 생명체들의 악의 없는 방해는 치명적일 수 있다.
가내 등단은 이 상황을 타개해가는 과정이다. 내가 만들어낸 말이고 누구나 알아듣는 말은 아니니 주의해서 사용하자. 가내 등단의 목표는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속 편하게 일하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집필에 들어가기 전,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단계의 작업을 당당하게 해나가는 일이다. 작가는 멍하게 하늘만 바라보고 있어도 일을 하는 중이라지만, 막상 해보면 기나긴 구상 단계를 지나는 작가의 모습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한심할 때가 있다. 많은 구상 과정이 결과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정말로 아무것도 안 한 게 되는 것이다.
집필 단계는 그나마 낫다. 매일매일 일정 시간 집필을 해도 글이 이상해지지 않는 스타일을 지닌 작가라면 집에서도 한 번쯤 보여주기식 작업을 시도해볼 만 하다. 그런데 모든 작가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단 나조차도 그런 스타일과는 맞지 않는다. 충분히 준비하지 않고 매일매일 조금씩 써버리면 매일매일 조금씩 설익은 엉터리 글만 쥐어짜는 꼴이 되는 사람도 많다. 작가처럼 보이기란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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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내 등단을 완성하는 것은 사실 미디어다. 스스로의 힘으로 작가라는 이름을 얻어내는 과정은 문학계 안에서도 더디고 긴 여정이다. 계절 주기로 느릿느릿하게 돌아가는 출판계의 시간 속에서 무럭무럭 성장해가는 작가도, 21세기 현대 한국 사회의 시간개념을 기준으로 보면 그저 머뭇거리는 것으로만 비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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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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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가 시켜주는 등단의 정석은 장년층이 많이 보는 신문에 인터뷰 기사가 실리는 것이다. 다음 단계는 조금 복잡하다. 그 기사를 부모님이나 친척 등 내 가족이 직접 읽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핵심은 부모님의 지인이 내가 실린 신문기사를 보고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어 신문 기사를 봤다고 제보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이야기를 들은 부모님은 “그걸 가지고 뭐……” 하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이게 되는데, 여기까지가 한 세트다. 이 과정이 완성되었다면 가내 등단이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마지막 단계가 남아 있기는 하다. 내가 저 대화를 어떻게 알고 있을까. 저런 일이 일어났다고 나에게 통보하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작가는 비로소 멀쩡한 직업을 가진 가족의 정상적인 일원으로 살아남는다. 그 신문 인터뷰를 고양이도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고양이도 인정하는 등단법은 고양이와 함께 사는 사람들의 과제로 남겨두기로 한다.
우리 집의 경우는 한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안녕, 인공존재!」라는 단편소설로 문학상을 받았을 때 잡지에 함께 실린 심사평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심사위원장이셨던 박완서 선생님의 평을 본 어머니는 그때야말로 진심으로 내가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신 듯하다. 그전에도 내가 무슨 일을 하든 대체로 지지해주시는 편이었지만 이 순간은 조금 더 특별했을 것이다.
대학 시절 친구들은 김윤식 선생님의 교양 수업을 들으러 여럿이 함께 몰려다니곤 했다. 나는 그 수업을 듣지 않았는데, 내 글은 언젠가 선생님의 레이더에도 걸려들어서 여러 편의 월평으로 남기도 했다. 친구들에게 그 일은 꽤 의미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중 하나는 선생님의 입버릇을 흉내 내며, “이런 너절한 글” 하는 소리를 듣지 않은 것만으로도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말해주기도 했다.
이 두 분과의 일화가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이분들이 읽고 언급해주신 덕분에 내가 발표한 글들이 괴상하고 통통 튀는 우당탕탕 SF로 여겨지는 단계를 넘어, 소설로 읽힐 기회를 얻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고양이에게도 이런 게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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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아니었던 사람이 작가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겪는 일은 그 외에도 많다. 예를 들어, 나는 자기 이름으로 된 작가의 첫 단행본을 박사 학위 논문에 비유하곤 한다. 업계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업계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혼자서 채운 책 한 권을 냈다는 것은 앞으로도 계속 그 일을 하겠다는 강력한 인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작품이 아무리 훌륭해도 여럿이 함께 낸 책밖에 없는 작가는 추천할 수 있는 범위에 제약이 있다. 그 심리적 저항선을 넘어서는 일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여전히 의미가 있다.
또한 작가는 편집자와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 단순히 편집자를 만나 함께 일하는 일, 그중 나와 잘 맞는 편집자를 만나게 되는 일, 두 가지 모두 작가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결정적인 장면들이다. 큰 상금이 걸린 공모전에서 당선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 말고도 많은 일들이 작가를 작가로 만들어간다. 맨 처음 작가라는 이름을 얻는 일 자체는 사실 큰 의미가 없고, 결국은 좋은 작가로 성장하고 살아남는 것만이 유의미하다. 이 말은 데뷔를 마친 작가들이 작가 지망생에게 한결같이 하는 말이지만, 작가 지망생들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엄연한 사실이다. 어찌어찌 작가라는 타이틀을 얻어냈지만 끝내 자신을 설득해내지 못해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슬그머니 그 이름을 도로 내려놓고 마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 모든 일을 헤쳐 나가기에 앞서 우선 가내 등단을 완성해보자.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각자에게 달린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는 거쳐야 할 과정과 멍하게 바라보아야 할 창문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그때마다 일일이 이유를 설명하기에는 창문의 숫자가 너무나 많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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