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렸지만 틀리지 않은 말
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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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비건이 어느 나라 사람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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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근처에 채식 식당이 생겨서 식당 사장님과 인사를 나누었다는 이야기를 마친 후 엄마가 물었다. 나는 말 그대로 빵 터지고 말았는데, 휴대폰 너머로 전해지는 엄마의 말투에서 너무나 순수한 호기심이 배어났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를 영어로 말하면 비건이고, 따라서 비건은 누군가의 이름이 아니라 채식하는 사람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하자 엄마는 아아 그렇구나, 읊조렸다. 대화하면서 채식하는 사람이라고는 얼추 알아챘는데, 채식을 널리 알린 외국인 이름인 줄로만 알았다며 웃었다. 식당 사장님한테 직접 물어보기에는 조금 부끄러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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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이 첫 번째는 아니다. 엄마는 요즘 유행하는 말을 자주 틀린다. 한때 언니랑 나 모두 ‘아 빡쳐’를 입에 달고 다녔더랬다. (둘 다 회사를 다닌 지 만 1년으로 넘어가던 시기였다.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해도 되겠지?) 반찬은 반찬통에서 덜어내 유리 그릇에 정갈하게 담아 먹어야 하며 중요한 자리에는 화장을 꼭 하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엄마는, 우리가 ‘빡쳐’를 말할 때마다 “어우 고운 말을 써야지. 빡쳐가 뭐니, 빡쳐가”라면서 빡쳐 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엄마도 빡친다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다만 모음이 하나 달라졌다. ㅏ가 ㅓ로. 양말을 아무렇게나 벗어두면 “아 이정연 양말 뻑쳐~”, 먹다 남은 과자 봉지를 제대로 안 여며두면 “아 과자 봉지 뻑쳐~”,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 불이 켜져 있으면 “화장실 불 뻑쳐~”. 용례와 용어가 미묘하게 어긋나지만, 가끔 그 오용이 바른 말과 쓰임보다 더 적절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언뜻 외국어로도 욕하는 것 같고 말이지. (f로 시작하고 k로 끝나는 그 욕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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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는 동네 도서관에서 그림책 작가 강연을 듣고 오시더니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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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미니스트 얘기하고 자기는 일이 즐겁다고 하면서, 가족이 좋은데 일과 아이 가족 함께 해나가는 것이 쉽지는 않다고 하면서 동화책 읽으면서 얘기해 나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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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한 문장 속에서도 나는 ‘패미니스트’라는 문구에 홀리고 말았다. 모음 하나 바꾸었을 뿐인데 이렇게 전투적으로 바뀌다니! 페미니즘의 앞길을 가로막는 건 다 패버리겠다는 의지가 묻어난달까? 엄마가 의도하고 쓴 건 아닐 텐데 또 다시 절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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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엄마의 요즘 말을 좋아하는 건 비단 절묘함 때문만은 아니다. 엄마가 언니와 내가 쓰는 말을 따라하고 싶어하고, 알고 싶어한다는 사실이 느껴지기 떄문이다. 우리 엄마는 엄청난 라떼다. ‘라떼는 말이야’로 시작하지 않을 뿐, 살아온 햇수가 많은 것을 말해준다고 믿는 꼰대. (엄마 미안) 얼마 전에는 통화하다가 생리통 때문에 힘들다고 했더니, 어떻게 길거리에서 ‘생리’라는 단어를 소리 내어 말할 수 있냐며 기겁을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며 성급하게 통화를 마친다. 하지만 간헐적으로 페스코 채식을 하는 딸 생각에 채식 식당에 들어가 사장님에게 채식 이야기를 듣고, 나에게 비건이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묻는 엄마를 보면 가끔씩 후회가 된다. 조금 더 길게 싸워볼 걸. 지레 포기하지 말걸. 며칠 전에는 부처님도 채식은 하지 않았다며 세상 일에 너무 선 긋는 건 좋지 않다고 말하는 엄마에게 내가 왜 육고기를 자제하는지 말해주었다. 먹히기 위해 딱 자기 몸집만 한 곳에서 길러지는 동물들의 이야기. 엄마는 그런 이유라면 자신도 노력하겠다며 대신 단백질이 중요하니까 콩을 많이 먹으라고 말했다. 우리는 채식육개장을 먹고 청국장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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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언니에게 무엇을 입을지 골라주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했다. “네가 화사고, 엄마가 그 여자야. 그 왜 TV 나오는 스타일리스트 있잖아. 슈스스!” 꺽꺽거리며 웃다가 눈물을 훔쳤다.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서 ‘슈퍼스타의 스타일리스트’ 한혜연이 화사를 자기 집에 초대해 코디해준 에피소드를 같이 봤더랬다. 언니랑 나는 엄마가 요즘 말을 쓸 때마다 사랑스러워서 깔깔대고, 엄마는 우리와 함께 웃기 위해 새로운 말을 배운다. 며칠 전에도 집에 가는 길 지하철에서 메신저를 보고 또 피식 웃고 말았다. “엄마♥: ㅋㅋㅋㅋㅋ얼릉와” 엄마의 학습능력이 날로 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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