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Culture

시솔트 캐러멜 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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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반드시 악역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주인공이 하고자 하는 일을 방해하는 존재만 있으면 된다. 꼭 사람일 필요도 없다. 자연이 그 역할을 할 수도 있고, 우주로 그 범위를 확장해볼 수도 있다. 관습이나 제도는 인간을 좌절시키는 좋은 재료다.


다만 어떤 매체는 의인화된 악당을 선호한다. 연극이나 영화처럼 사람이 나와서 연기하는 예술 장르에서는 관습이나 제도에서 비롯된 악을 표현할 때 그 제도를 상징하는 인물을 보여주는 것을 기본으로 삼을 것이다. 예를 들어 독재가 지배하는 미래 사회를 표현할 때, 영화나 드라마가 택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독재자를 직접 등장시키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이 전략은 우리의 상식과는 맞지 않는다. 이미 사람들은 독재가 독재자 한 사람의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현대 사회의 문제는 다 그런 식이다. 심리학이 아니라 사회학이 필요한 문제들이다. 하지만 창작자들은 종종 문제를 의인화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창작물을 소비하는 사람들은 의인화된 악을 더 편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타워』의 홍보 문구 중 하나였던 “권력의 중심에 개가 있다”라는 문장은, 종종 “권력자가 개”라는 의미로 이해되곤 했다. 이것은 대중의 이해 방식이다. 내가 의도한 것은, 빈스토크라는 사회의 권력이 워낙 이상하게 왜곡되어 있어서, 그 핵심에 특별히 선하고 악할 것도 없는 동물 배우가 들어가 있는 경우에도 권력자가 권력을 행사하는 것과 똑같이 작용하더라는 내용이었다. 분명 그렇게 읽은 독자도 많겠지만, 훨씬 많은 독자가 당시 시대상을 고려해서 “대통령이 개래. 작가가 미쳤나 봐” 하는 반응을 보인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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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그만두고 나서 깨달은 사실인데, 이것은 소비자의 잘못이 아니다. 그들은 사회학과 대학원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창작자는 늘 치열하게 싸우는 사람들이지만, 때로는 안전한 감상자의 자리에 앉아 있기로 한 사람들을 배려해야 할 의무가 있다. 작가와 독자 사이를 가르는 그 선을 존중하는 일은 해가 갈수록 더 귀한 예의범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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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내 소설에는 악당 같은 악당은 잘 등장하지 않는 편이다. 일부러 피한다기보다 현대 소설의 추세가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인물을 조금만 깊이 다루면 진짜 나쁜 사람은 없다는 식의 교훈이 튀어나와 버리는 것이다. 물론 나는 세상을 그렇게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아니다. 사실 세상은 나쁜 놈 천지다. 직장인들의 세계에 수많은 악당이 존재하듯, 프리랜서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소설의 서술자는 등장인물을 고르게 조명할 의무가 있다. 양쪽의 손을 공평하게 들어준다기보다 인물들의 이야기를 비중에 맞게 들려주는 일에 가깝지만, 문제는 소설 안에서 서술자가 차지하는 절대적인 지위다. 소설의 의미를 결정하는 최종 결정권자인 서술자가 조금 오래 이야기를 들려준 것만으로도 독자는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의미를 읽어내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눈치를 채버리는 것이다. 이만큼의 분량을 차지한 사람이라면 의미 없는 사람은 아닐 거라는 식의 눈치다. 영화를 볼 때, 비싼 출연료를 받는 배우가 행인으로 등장했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리라는 기대를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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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설에 등장하는 나쁜 놈들의 문제는 일을 너무 열심히 한다는 데 있다. ?『첫숨』? 에서도 그랬고 ?『고고심령학자』? 에서도 그랬지만, 나는 인물들이 일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곤 한다. 나쁜 놈일 때 나쁜 놈이더라도 일단 일은 잘해줬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주인공도, 반대쪽에 있는 사람들도 “∼를 열심히 조사했다”라는 식으로 대충 넘어가게 놔두지 않는다. 나는 그들을 고생시킨다.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 자세히 묘사하느라 실제로 고생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지만, 나는 인물들을 고생시켰다는 사실에 뿌듯해한다.


그 결과 독자들은 이런 반응을 보이게 된다. “작가님 소설에는 진짜 악역이 없어요.” 일을 잘하는 사람은 악당이 아닌 것이다. 이 점은 물론 나도 동의하는 바다. 무능해야 악당이지, 유능하면 그게 악당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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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가까운 조언자 한 분이 소설에 원초적인 의미의 악역을 넣어보라는 충고를 한 적이 있다. 들어본 것 중 제일 설득력 있는 충고였으므로 나는 그 충고를 따르기로 했다. 설득의 근거는 대중이 좋아하니까 대놓고 나쁜 놈을 집어넣으라는 일반론이 아니었다. 작가인 내가 선호하는 재료가 아니어도 그 재료로 인해 다른 재료들이나 작품 전체가 좋아질 수 있다면 넣어보는 게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시솔트 캐러멜 초콜릿을 떠올렸다. 캐러멜 초콜릿에 바다 소금을 뿌려놓은 것으로, 단맛과 짠맛의 “조화”보다는 좀더 직접적이고 강렬한 맛의 배합이 특징이다. 특히 내 머릿속에 남아 있던 기억은 내가 잠시 뉴욕에 머무르던 시절에 유행하던 제품들이었는데, 미국인의 미각은 생각보다 균형이 안 맞아서 단것은 너무 달고 짠 것은 너무 짠 경향이 있다. 그래서인지 미국 시솔트 캐러멜 초콜릿에 들어간 소금은 살짝만 찍어 먹어도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질 만큼 강렬한 짠맛이 난다. 사실 단맛도 비슷한 수준이지만, 그래도 단맛은 단맛이라 용서가 된다. 그런데 그 둘을 같이 먹으면(사실 소금은 좀 많이 떨어내야 했다), 전에 없던 조화가 만들어진다. 인정사정없이 원초적으로 짠맛이기에 비로소 가능한 균형이다.


앞으로 쓰게 될 소설에는 이런 맥락을 지닌 악역이 등장할 가능성이 크다. 혹시 2020년 이후에 발표된 내 소설을 읽다가 이런 인간을 만나게 된다면 ‘아, 얘가 바다 소금이구나’ 하고 반갑게 맞아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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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언을 받아들인 후 나는 악당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원초적인 악당이 뭔지 모르지는 않지만, 갑자기 그런 인물을 소설에 등장시키기는 쉽지 않다. 악당의 기능을 이해하게 됐다고 해서 소설이나 활자 매체가 악당들의 말에 지나치게 오래 귀 기울이는 일의 부작용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악당들의 말을 꼭 들어줄 필요가 있는가? 우리 사회는 이미 악당들에게 자기 악행을 설명할 기회를 너무 많이 허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다른 한편으로 창작자로서 하게 되는 기술적인 고민도 있다. 악행이든 뭐든 등장인물이 그런 행동에 이르게 된 계기를 설명하지 않은 채로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작가가 일부러 악당에게 발언권을 주지 않았다 해도 독자는 그 사실을 알 수가 없을 테니.


이 고민에 대한 결론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다. 아마 악당이 등장하는 소설을 몇 편 더 써봐야 소설 안에서 통하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작가에게 소설은 사고실험의 도구다. 몇 편의 소설을 통해 만족스러운 시뮬레이션 결과가 나온다면, 그제야 만족하고 다른 연구로 넘어가곤 하는 가상의 실험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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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인 악당은 일단 보류하고 다른 악당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이른바 사회학적인 악당이다.


정치학에는 정책결정론이라는 분야가 있다. 어떤 정책이 만들어질 때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연구하는 학문 분야다. 여기에는 흥미로운 몇 가지 설명 방식이 있다. 두 가지만 예로 들면, 합리적 행위자 모델과 관료정치 모델을 꼽을 수 있다. 합리적 행위자 모델은 단일 행위자 모델이라고도 한다. 국가는 하나의 단일한 조직이고,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는 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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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정치 모델은 국가를 조직 이기주의에 빠져 있는 다양한 조직들의 모임으로 이해한다. 나는 공군에서 군 생활을 했다. 내가 있던 비행대는 딱 들어도 공군의 핵심 조직이다. 지원 부서들은 비행대를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실제 일은 이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전쟁이 없는 군대에서 비행대와 수송대는 어떤 의미에서 대등한 조직이다. 서로 무언가를 주고받아야 일이 원활하게 돌아가는 상황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수송대는 비행대에 해줄 일이 많지만 비행대는 수송대에 해줄 것이 없다. 수송대는 비행대에 교통수단을 제공해줄 수 있지만, 비행대가 수송대를 비행기로 실어 나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 결과 아쉬운 소리를 하는 쪽은 오히려 조직의 주 임무를 담당하는 비행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현실 세계의 의사 결정은 이런 엉망진창인 상황을 거쳐서 일어난다. 이것 자체가 재미있는 SF 소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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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점은, 창작물이 우리 편과 악당을 묘사하는 태도다. 보통 우리 편은 엉망진창인 상태, 즉 관료정치 모델과 비슷한 형태로 그려진다. 반면 지구 정복을 노리는 악당은 단일 행위자 모델로 묘사된다. 명령 체계가 일사불란하고 목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으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최적의 수단을 합리적인 방식으로 활용하는 조직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 편은 무능하고 대체로 아무 비전도 없으며 구성원 각자가 사리사욕만을 추구하면서 하루하루를 낭비하는 반면, 상대는 분명한 악의와 그것을 실천할 구체적인 계획을 지니고 있으며 효율적으로 의사소통하고 구성원 모두가 같은 목표를 향해 밤낮없이 매진한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사람들이 실제 세계에서 우리 편과 상대를 파악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늘 충돌을 한다. 현대 사회에서 충돌은 상수다. 다만 충돌한 뒤에 사람들은 고의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근거를 끌어모은다. 그 내용은 결국 우리 편이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혹시 의도했더라도 우리 편은 너무나 무능해서 그 의도를 실행에 옮길 수 없었을 것이며, 애초에 그 의도를 가진 사람과 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강이 다섯 개쯤 있어서 그 사람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은 오히려 나에 대한 공격이라는 논리 구조다. 상대편의 경우는 정반대여야 한다. 그들은 유능하다. 일사불란하고 빈틈이 없다. 한 명의 유능한 리더가 무시무시한 악의를 가지고 모든 사람을 조종하고 있으며, 조종당한 사람들도 사실은 악당과 이익을 공유하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이상한 싸움이다. “너네가 더 유능해, 이 멍청한 놈들아!”로 점철된 이 싸움에서 선과 악의 구분은, 우리 편과 상대편을 구별한 결과로 파생되는 부수적인 윤리 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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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나는 쓰고 있던 소설의 바다 소금 악역으로, 대단히 유능하고 장기적인 안목을 지니고 있으며 결단력과 실행력을 두루 갖춘 이상적인 리더를 등용했다. 우리 편은 물론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는 엉망진창 관료 조직이다. 원초적 악당을 찾아낸 것은 아니지만, 우선 그 정도만 해도 악역의 느낌은 충분히 날 것이다.


물론 이 방침은 작가의 개인적인 견해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모르긴 해도 유능한 사람들 과 어울려 함께 일하는 것은, 인간이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수많은 에피소드 중에서도 가장 보람 있는 경험에 속할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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