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한나 아렌트, 쫓겨난 자들의 정치
한나 아렌트, 쫓겨난 자들의 정치
양창아 지음 / 신국판 / 416쪽 / 23,000원
쫓겨남에 대항하여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한나 아렌트의 ‘정치 행위’ 개념을 통해 보는 쫓겨난 자들의 정치
이 책은 한나 아렌트의 사유를 통해 보는 쫓겨난 자들의 정치적 주체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쫓겨난 자’는 근현대 유대인의 정치사에서 초창기에 등장한 주체 개념인 파리아(pariah)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기도 하고, 오늘날 사회‧정치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아렌트가 나치 독일에서 ‘독일계 동화 유대인 지식인’이자 ‘무국적 난민’으로서 겪었던 쫓겨남의 경험을 통해 획득한 관점 ― 파리아의 관점 ― 은 아렌트의 정치 행위 개념을 구성하는 중요한 계기이자 기준점이 된다. 이 책은 아렌트의 유대인으로서의 경험이 그의 정치 사유에 끼친 영향을 다각적으로 고려하되 조금 더 나아가 그 경험을 유대인의 경험에 한정하지 않고 근현대 국민국가 및 사회에서 ‘쫓겨난 자’의 경험으로 확장하여 살펴본다. 즉 이 책은 한나 아렌트의 쫓겨난 자로서의 경험을 다른 쫓겨난 자들의 경험과 연결하여 그의 ‘정치 행위’ 개념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밝혀나간다.
아렌트가 독일계 동화 유대인 난민으로서 겪었던 쫓겨남의 경험은 우리가 오늘날 직장에서, 동네에서, 내 집에서, 심지어 자기 자신으로부터 쫓겨나는 무수한 경험과 겹쳐진다. 우리는 가난하다는 이유로, 몸이 평범하지 않아 보인다는 이유로, 정규직이 아니라는 이유로, 성별을 이유로 또는 기존의 성별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쫓겨나거나 그러한 이유로 가족이나 동료를 잃는 경험을 한다. 우리는 이러한 쫓겨남에 대항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누군가를 잃고 삶을 이어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며, 기억하겠다는 약속은 어떻게 지켜질 수 있는가? 정치적 경험이 일천한 사람들이 어떻게 정치적 언어를 구성하고 집단적 행위를 시작할 수 있는가? 고통과 상처의 정치적 의미는 무엇인가? 상처가 고립과 혐오로 이어지지 않고, 저항과 연대로 이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책은 아렌트의 사유의 궤적을 따라가며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고자 하는 동시에, 아렌트에게서 이후의 탐색을 위한 개념적 자원을 발견해나가면서 우리 시대의 문제를 확인하고 공유하고자 한다.
쫓겨난 자들의 저항과 함께 사는 장소의 생성
아렌트의 사상은 그가 독일철학(특히 현상학과 실존철학)을 고향으로 삼으면서 나치 독일에서 독일계 동화 유대인 지식인이자 무국적 난민으로서 유대 정치에 개입하면서 형성되었다. 아렌트의 행위 개념은 이러한 ‘철학과 정치의 긴장’과 ‘유대인 정체성 경험’으로부터 길어 올려진 것이다. 이 책은 아렌트의 유대인으로서의 특수한 경험이 쫓겨난 자들의 보편적인 정치와 역사를 사유할 수 있는 개념들을 발명하게 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는 ‘버려진 자들’ 또는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 자들’의 자리에서 시작된 저항과 투쟁의 정치적 의미를 탐구해나간다. 이러한 투쟁의 승패가 아닌 투쟁의 과정에 주목함으로써 이 책이 발견하는 것은 투쟁의 현장에서 또 다른 ‘장소’에 관한 사유, 즉 ‘함께 사는 삶의 장소’가 모색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아무리 밟고 억눌러도 다시 시작되는 쫓겨난 자들의 말과 행위에 이미 ‘다른 세계’의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근현대의 혁명과 크고 작은 투쟁들이 결국 실패하고 투쟁하는 사람의 상처만 남은, 더 나빠진 상황에서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일은 시대착오일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낙천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관주의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하다. 또한 차별받고 억압받는 약자들의 권리 주장과 이들의 정치적 주체성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많이 반복되어서 이제는 특별히 더 이야기될 것도 없지 않냐는 냉소적 태도 역시 매우 익숙하다. 하지만 인간의 경험은 구조를 초과하며, 그 경험을 간과하지 않을 때 이야기는 같지 않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아무리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그 파장이 미미할지라도 자신의 상황에서 힘을 다해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 배제와 추방의 현실이 존재하고, 그 속에서 투쟁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한 여러 번 반복된 오래된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이자 다시 쓰이기를 요구받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쫓겨난 자들의 자리에서 또 다른 삶의 장소에 대한 전망을 사유하는 일이야말로 갈 곳도 머물 곳도 잃은 이 시대에 우리가 사유해야 할 현안이자 철학적 사유의 과제임을 이 책은 역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