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Culture

[전고운의 부귀영화] 호르몬의 농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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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해본 적 없던 생각이 들었다. 생리가 늦어지고 있는데, ‘설마 폐경인가!’ 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든 폐경 생각에 황당해져서 ‘에이 무슨 폐경이야’ 라고 고개를 저었지만, 30대 중반이면 그렇게 억측도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산부인과 의사가 지친 얼굴로 “좀 이르지만 폐경입니다“라고 한다 해도 10초 정도만 놀랐다가 이내 수긍이 갈 것 같았다. 불규칙한 수면 패턴, 스트레스, 잦은 음주, 레토르트 식품 섭취 등 이유는 아무 곳에나 널려있는 삶이니까. 친구들에게 폐경 소식을 전한다 해도 “좀 이르네. 유감이다“ 정도일 것 같다. 이런 찰나의 생각들로 순식간에 나이가 실감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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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중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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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올라가는 숫자의 변화가 아닌, 고민의 종류가 달라질 때 나이를 실감한다. 생리가 늦어지면 임신에 대한 공포로 떨던 내가 이제는 폐경의 공포를 마주하다니. 임신에 대한 공포가 청춘의 상징이 될 줄이야. 별 게 다 상징으로 남고 지랄이라니. 근데 지금 든 이 고민의 전환은 너무나 급진적인 거 아닌가. 분하다. 새들도 세상을 뜨고, 가장 큰 공포의 대상 뜨는구나. 뜬다고 생각하니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피 흘리던 나의 과거들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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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 때 인 서울 대학의 꿈을 안고 서울로 상경 후 얼마 되지 않아 규칙적이던 생리 주기를 잃었다. 그 나이에 산부인과 가는 건 공포 그 자체였다. 치과에 가면 입을 벌려야 되듯이 산부인과에 가면 다리를 벌려야 되는 게 당연함에도 여성이 다리 벌리는 동작 하나에 성적 대상화를 해두고 나에게 ‘여자는 다리를 오므려야 된다’고 주입시킨 사회에 대한 분노는 나 혼자만의 몫이었다. ‘다낭성난소증후군‘이라고 난소가 나만큼 게을러서 호르몬 주사를 맞고서야 겨우 생리를 했다가 치료차 피임약도 먹어봤다가 에라 모르겠다 그냥 포기하고 살다 보니 잊을만하면 알아서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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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평생을 불규칙한 생리로 얼마나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가. 주먹만 한 자궁 하나 달고 태어났다는 이유로 얼마나 불안하고 위태로운 삶을 살았던가. 생리로 인한 변화무쌍한 호르몬 변화로 겪는 폭력성과 무기력성을 조절하느라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썼고, 그에 대한 조절 실패로 인해 얼마나 많은 실수를 저질렀던가. 그 많던 나의 난자들은 어디로 간 것이고, 남은 난자들은 얼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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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난자들아, 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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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하도다. 위험천만했지만 돌이켜보면 즐거웠던 것도 같다. 생리 네가 아니었다면 내가 언제 배가 아파서 방을 기어 봤을 것이며, 공포에 떨며 네가 나타나게 해달라고 믿지도 않던 신에게 두 손 모아 빌어 봤을까. 꼭 중요한 날만 귀신같이 골라서 나와 곤혹스러웠던 것은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고, 그때마다 널 대응하느라 나의 대처 능력과 위장술이 늘어난 것도 사실이다. 네가 딱히 고맙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직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들 다 하는 것 중에 하는 게 어쩌면 너뿐 일지도 모르니까 지금 너마저 없어진다면 서운할 것 같다. 나는 요즘 서운한 것에 몹시 지쳐 있으니 너만은 그러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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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며칠 후인 오늘 생리가 터졌다. 아, 다시 난 평범한 티켓을 한 장 들고 있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하루 종일 방바닥을 기어 다녔지만. 불과 며칠 전 저런 생각들로 생리를 의인화하며 저런 호소를 했다니. 이건 필시 호르몬의 농단 냄새가 난다. 보이지는 않지만 지독한 미세먼지랑 꼭 닮은 모양새다. 이런 극악한 호로몬의 지배 아래에 살고 있는 동지들이 떠오르며 며칠 전 남편과 했던 대화가 떠오른다. 남편은 출퇴근이라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일인데, 대다수의 사람들이 매일 시간에 맞춰 출퇴근을 하고 있어서 다 우울증에 걸리는 거라고. 자기였으면 매일 아침 울었을 거라고. 그 말에 정말 크게 동의를 하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생리를 하나 에스트로겐이 흐르나 프로게스테론이 흐르나 매일 억지 눈을 떠서 출근을 하는 동료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존경을 보낸다. 생리가 나와도 문제 안 나와도 문제, 결혼 전에는 임신 금지였다가 결혼하는 순간 출산을 강요하는 이 나라에서 나는 영원히 비적응자일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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