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Culture

너는 쓴다, 몇 줄의 문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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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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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쓴다. 손가락에 물을 묻혀 쓴다. 몇 줄의 문장을. 몇 줄의 진실을. 몇 줄의 거짓을. 거짓 속의 진실을. 진실 속의 환각을. 환각 속에 망각을. 망각 속의 과거를. 과거 속의 현재를. 현재 속의 미래를. 미래 속에 우연을. 우연 속의 필연을. 필연 속의 환멸을. 환멸 속의 울음을. 울음 속의 음울을. 음울 속의 구름을. 구름 속의 얼굴을. 얼굴 속의 어둠을. 어둠 속의 문장을. 다시 몇 줄의 문장을. 다시 몇 줄의 희미한 문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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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중 「달과 돌」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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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창작학과로 편입했을 때 나는 제목도 이름도 들어본 적도 없는 책을 다들 당연하단 듯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주눅이 들었다. 어떤 교수는 전혀 검열하지 말고 그냥 손이 가는 대로 아무 글이나 써오라고 하길래 정말 신나게 아무 생각 없이 쓰고 제출한 적이 있는데, 다음 수업 때 그 교수는 내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쓴 글 중 한 문장을 읽으며 초등학생보다 못한 글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너무 충격적이라 학교 화장실 칸에 들어가 친구에게 전화해서는 오열하며 학교 그만둘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니 그렇게까지?)


굳이 따져보자면 그때부터 책을 엄청 많이 읽기 시작했고 거짓말도 많이 했다. 수업 중에 교수가 어떤 책을 언급하고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면 나는 듣도 보도 못한 책이면서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책 읽은 척을 하도 많이 해서 친구가 <위대한 개츠비>를 끝까지 안 읽었다며 어떻게 끝나? (나는 읽었다고 거짓말했음)라고 물었을 땐 당황해서 기억이 안 난다고 답했었다. 급히 찾아보니 기억이 안 날 정도의 결말은 아니었는데… 뭐 이 정도는 흑역사까지는 아니고.


가장 부끄러웠던 일은 회사에 다닐 때였다. 마케팅팀에 있었을 때 꽤 애정을 가지고 좋아했던 작가의 책이 출간됐는데 그 책의 굿즈인 에코백에 적힌 일본 말이 있었다. 당시 내 후배는 그 일본어를 가리키면서 선배님 엄청 웃기죠!라고 말했는데 난 그 일본어를 알지도 못하면서 그러게 완전 웃기다! 하면서 같이 웃었다. 그때 갑자기 나타난 동기 언니가 내게 왜? 이게 무슨 뜻인데?라고 물었지만 나는 당연히 대답하지 못했고… 뭐지?라는 말이 얼굴에 쓰여있는 듯한 후배의 얼굴을 보았을 땐 진짜 창피했다.


또 친한 언니는 책을 읽기 시작한 계기가 책 읽는 사람들은 뭔가 있어 보이고 멋있어 보여서 자기도 그렇게 보이고 싶었다고 했다. 와 그 말을 실제로 뱉다니! 너무 신기하고 멋있었다. 나도 대학생 이후로는 그런 마음이었는데. 하지만 그런 말을 내뱉으면 또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책에 대한 모독이라며 질타를 받거나 가볍고 무식한 사람 취급을 받을 거 같았다. 아무튼 내가 이런 책을 읽고 이런 생각도 한다는 걸 온라인 오프라인 가릴 것 없이 전시하다 보니 이젠 당최 내가 뭔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도 책 읽는 나를 멋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내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들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고 애썼다. '난 날씬해 그리고 책도 많이 읽고 글도 많이 쓰지' 이런 느낌으로? (너무 구리다. 그리고 당연히 이런 것들이 사라지면 살지 못할 것 같았다)


지금도 그렇다. 몇 줄의 진실과 거짓, 멋있어 보이는 단어를 찾고 글을 다듬으면서 어떻게 하면 내가 글을 잘 쓰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지를 생각한다. 이 생각에 계속 빠져드는 날 보며 친구가 조심스레 말했다. 자기 생각이지만 에세이가 좋은 이유는 솔직함과 용기인 거 같다고. 그래서 공감하거나 피식 웃기도 울기도 하면서 재밌게 읽는 거라 그냥 독자인 내게 필력이 엄청 중요한 거 같지는 않다고.


맞아, 사노 요코도 록산 게이도 아니 에르노도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거였지. (물론 필력도 엄청나지만) 내가 우울증 책을 냈을 때도 공감해주는 사람들이 있었을 뿐이지 나의 필력에 감탄하는 사람은 드물었으니까.


그래서 아주 진부한 말이지만 몇 줄의 희미한 문장일지라도 솔직하게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막 또 큰일이 날 것처럼 조바심 내지 말고. 조금이라도 재밌게 봐주는 사람들이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 아무도 없다면 좀 슬프겠지만. 지금도 내 글은 다 비슷하고 뻔한 거 같다는 불안에 시달리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뭐 어떤가. 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


아무튼 결론은 글 쓰는 거 너무 어렵다. 잘 쓸 수 있는 방법은 많이 읽고 많이 쓰는 수밖에 없다는 걸 아니까 기쁘면서 슬프기도 하고 그렇다. 내일은 읽다가 만 책을 다시 꺼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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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이제니 저 | 문학과지성사
그는 사물의 본래 모습을 찾기 위해, 쓰고, 다시 쓰고, 덧붙이고 지우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의미라는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그 믿음들 사이의 균열'에 리듬을 흘러넘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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