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 리뷰] "겹겹의 시간, 섬", 제주의 과거, 현재가 함께하는 곳
“대정조점_오른쪽에는 보성초등학교와 동계 정은선생 유허비가 있고 왼쪽으로는 추사적거지, 대정우물터, 삼의사비가 보인다. 성을 지키는 동문, 남문, 서문의 돌하르방도 각각 그려 넣었다. 멀리 가파도에는 가파초등학교가, 마라도에는 마라도성당이 보인다.”
대정현의 돌하르방은 1754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돌하르방은 조선시대의 제주 삼읍인 제주, 정의, 대정성의 성문 입구에 세워졌는데, 대정의 돌하르방은 현재 삼의사비 옆 공간에 4기가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탐라순력도에는 돌하르방이 없지만, 2024년 홍진숙 작가의 탐라순력도에는 돌하르방을 비롯해 가파도의 가파초등학교, 마라도의 마라도성당까지 꼼꼼하게 자리하고 있다.
“수산성조_수산초등학교와 학교 밖의 진안할망당이 보인다. 학교 안에는 답사하는 본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마을 곳곳에는 제2공항 반대 현수막이 보이고, 멀리 섭지코지에는 호텔들이 들어서 있다. 제주에 2개의 공항은 필요하지 않음을 상징하는 소재로 종이비행기를 그려 넣었다.”
수산진성이 옛 흔적 그대로 남아있는 수산초등학교, 학교 밖 진안할망당 등 꼼꼼한 스케치는 물론, 작품 속에는 비오는 날 우산을 쓰고 답사 중인 본인의 모습도 들어 있다.
지난 5월 8일부터 서울 종로구 인사아트센터 제주갤러리에서는 홍진숙 작가의 개인전 ‘겹겹의 시간, 섬’이 열리고 있다. 대정조점과 수산성조는 총 41첩으로 구성된 ‘탐라순력도’ 작품의 일부다. 이번 전시 작품의 소재는 조선시대 기록 화첩인 탐라순력도, 곶자왈, 용천수로 짧게는 300여년 전 시간부터 길게는 수만 년 전까지 제주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전시회를 찾게 되면 보통 그림의 전체적인 느낌만 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은데 조선시대의 원본 화폭 41첩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탐라순력도는 탐라순력도 원본과 더불어 작가의 간단한 설명이 곁들여져 있어 설명을 읽은 후 작품으로 다시 눈을 돌려 하나 둘 디테일을 찾게 된다. 작품 속 장소들이 대부분 답사여행을 통해 한번쯤 가본 곳들인데다 ‘어찌 저렇게까지 꼼꼼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세심하게 디테일을 담아내 더욱 친숙하게 느껴져서인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모티프로 채용한 ‘탐라순력도’는 1703년 제주목사 이형상이 가을 순력과 제주도에서 치른 다양한 행사 장면을 화공 김남길에게 그림으로 기록하게 한 41폭의 화첩이다. 홍진숙 작가가 탐라순력도를 그리기 시작한 건 2020년대부터라고 한다. 2000년대에는 제주 섬의 신화를 소재로 작품 활동을 했고, 2010년대에는 제주 곳곳의 용천수와 제주의 허파라 불리는 용암숲인 곶자왈을 눈으로 발로 직접 기록하며 화폭에 담아왔다. 오랜 세월에 걸친 현장 답사와 역사 탐구, 그리고 무엇보다 제주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나오기 어려운 작품들이다.
전시 공간 한가운데를 꽉 채우고 있는 탐라순력도의 매력에 흠뻑 취한 후 옆으로 눈을 돌리니 생명의 물인 제주 용천수가 기다리고 있다. 법환, 조천, 고내 등 제주 해안가를 중심으로 퍼져 있는 용천수가 작품을 통해 서울의 갤러리에 한데 모였다. 용천수는 제주도민들의 생명의 물로, 대부분 해안가를 따라 분포하고 있기 때문에 올레길을 걷다보면 수없이 많은 용천수를 만나게 된다. 2022년 작품인 ‘제주도 산물’에 제주도의 모든 용천수가 담겨 있다.
용천수가 제주의 ‘생명의 물’이라면, 곶자왈은 제주도를 살아 숨 쉬게 하는 ‘제주의 허파’라고 할 수 있다. 용암이 흘러간 자리, 돌 위에 뿌리를 내리며 강인한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는 곶자왈의 나무들을 직접 눈앞에서 마주하는 듯하다. 작가의 손끝에서 꿈틀거리는 생명력을 뿜어내는 원시 곶자왈의 태곳적 모습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홍진숙 작가가 자연이라는 씨실과 역사라는 날실로 직조한 ‘생명의 태피스트리(tapestry)’를 통해 제주의 과거와 현재를 만난다. 그가 기록한 제주의 이미지에는 오랜 시간 직접 경험한 경이로운 자연과 삶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이 담겨 있다”는 김보라(홍익대학교 회화과 초빙교수) 교수의 평론 그대로 제주의 원초적인 자연과 현재의 삶이 전시장을 꽉 채운다.
홍진숙(1962년~) 작가는 제주토박이 작가로 30년 넘게 제주에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해오고 있다. 세종대학교 회화과와 홍익대학원 판화과를 졸업했으며, 채색화, 소멸목판, 실크스크린, 모노타이프 등 다양한 매체를 이용해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1990년 제주도 미술대전 수상을 시작으로, 대한민국 미술대전, 한국현대판화 공모전 등에서 다수 입상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제주현대미술관, 제주도립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이번 전시는 오는 20일(수) 19:00까지 열리며, 관람료는 무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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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겹의 시간, 섬”
장소 :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인사아트센터 지하 1층 제주갤러리
전시기간 : 2024년 5월 8일(수) ~ 20일(월)
관람시간 : 10:00~19:00 (매주 화요일 휴관)
관람료 :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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