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예스24 인문 교양 위클리 레터입니다.
기원전 5세기, 인도에서 한 수행자가 가르침을 펼칩니다. 그는 삶이 괴로운 이유가 고정된 실재가 없는데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이라는 실재가 없으니, 당연히 나라는 실재도 없습니다. 제법무아, 제행무상, 이른바 붓다의 가르침입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삼법인, 사성제, 연기 등의 개념으로 '내'가 없다는 걸 증명합니다. 대신 모든 존재의 상호 의존성을 강조했습니다.
데리다와 들뢰즈 등 현대 철학자들의 사유에서도 엿볼 수 있는 지점이지요. 아집과 탐욕을 지양하고 다른 존재와 공존을 모색하자는
훌륭한 가르침입니다.
다만 개인 차원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보자면 불교가 유효한 세계관인지는 의문이 듭니다. 내가 지도자라고 생각해봅시다. 인구와
영토가 늘고 산업이 발전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세계관에 더 눈이 가지 않겠습니까? 불교는 내가 없고, 소유할수록 불행해지며,
이성에 끌리지 말라고 합니다. 게다가 인도의 카스트에 반발해서 나온 게 불교입니다.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계급을 부정합니다. 기득권이 보기에 위험한 세계관입니다. 이런 이유로 중국이나 한국, 일본에서 고대 초반에는 불교를
받아들였다가도 국가 운영 원리를 유교로 바꾼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주 잠시나마 불교를 국가의 종교로 채택한 순간이 있었다는 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데이비드 흄의 무아론은 일개
철학 사조였지만, 불교는 한때나마 국가 공인 종교였습니다. 고대 인도와 중국 그리고 한반도에서도 삼국과 고려가 그러했죠.
왜일까요? 날마다 벌어지는 전쟁, 물질을 향한 탐욕이 누가 보기에도 너무나 끔찍했던 게 아닐까요. 우리 모두 좀 덜 가지자,
공동체를 생각하자, 이렇게 집단 무의식 차원에서 생각할 때 불교가 탄생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받은 거죠. 실제로 칼 야스퍼스가
'축의 시대'라 명명한 그 시기는 역설적으로 세계 곳곳에서 살육이 끊이지 않았던 때입니다.
지금이라고 상황이 많이 달라진 건 아닌 듯합니다.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더 많은 걸 만들기 위해 화석 연료를
태우고, 지구는 뜨거워지고 있죠. 5월 15일 부처님 오신 날이자 스승의 날, 인류의 스승인 붓다의 가르침을 되새겨 볼까요. - 규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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