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송 “차녀들이여, 이제 우리가 마이크를 쥘 차례입니다”
내 성격이 이상한 걸까? 우리 집이 유별난 걸까? 너무 사소하고 미묘해서, 치사하고 유치해서, 차마 말하지 못했던 그 모든 서러움의 뿌리를 찾아 과거를 되짚어보는 『차녀 힙합』이 출간되었다.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공고한 만큼, 태어나자마자 ‘또 딸’이자 아들이 아닌 ‘꽝’으로 집안에서 소외당했던 둘째 딸의 이야기는 어느 한 개인만의 특수한 삶이 아니다. 딸은 출가외인으로 여겨지던 전통이 아직 유효하던 때부터 현재의 ‘딸 바보’ 열풍까지, 그사이에 태어나고 자란 무수한 딸들의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 책은 쓰였다.
마침내 세상에 데뷔한 『차녀 힙합』! 출간 소감이 궁금합니다.
출간 직후에는, 많은 분이 공감하시겠지만, 아쉽고 불안한 마음과 후련함 사이를 왔다 갔다 합니다. 그래도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물꼬를 터서 기쁜 마음이 크죠.
'차녀'라는 소재로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계기가 있나요?
초음파 기계가 발명된 후 태어난 모든 ‘첫 번째가 아닌 딸’들은 탄생 자체가 생존이었다는 생각을 했어요. 초등학생 때 이미 박완서의 「꿈꾸는 인큐베이터」를 읽으면서 80~90년대에 여아 선별 임신 중지가 얼마나 횡행했으며, 내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아들 낳기’가 얼마나 중요한 과제인지 알았으니까요. 이 시기 태어난 차녀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아들인 줄 알고 낳았다”, “딸인데도 안 뗐다” 같은 말을 듣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이를 둘 이상 잘 낳지 않으니, 형제자매 간의 위계에 따른 경험차나 차녀라는 신분 또한 곧 사라지리라 생각했죠. 그래서 이러한 경험을 문화인류학적인 차원에서, 사회적인 차원에서,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살펴보고 기록하자고 생각한 것이 『차녀 힙합』의 시작입니다.
가족 풍경을 담은 이야기이다 보니 아무래도 개인적인 이야기나 가족 사이에 일어났던 일들을 쓸 수밖에 없으셨을 텐데요. 그런 점이 마음에 부담이 되지는 않으셨는지, 가족들과 사전에 미리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에세이는 자기 관점에서 해석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항상 적절한 거리두기와 균형 감각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언어와 전달력을 가진 사람이 윤리적 검토 없이 사적 이야기를 쓰면, 그건 일방적인 매도나 왜곡이 될 수도 있잖아요. 책을 쓸 때 가장 많이 신경을 쓴 부분은 이 이야기가 결국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가였어요. 예를 들면 차녀로서 나를 괴롭게 했던 이유를 탐색할 때, 내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괴로웠는지 면밀하게 살폈어요. 개개인의 과오나 실수 때문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이 각자의 최선을 다했음에도, 사회적인 맥락과 시대적인 배경이 결합하면 개인의 선의로 어찌할 수 없는 낙차가 생긴다는 점에 주목하는 식이었죠.
그래도 쓰는 동안 마음이 많이 힘들었어요. 결국 내 상처를 말한다는 것은,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어느 정도 다치게 할 수밖에 없는 작업이니까요. 평소 주고받았던 대화를 중심으로 가족의 입장을 구성해서 에필로그로 넣었는데, 그게 또 차녀의 중립 기어답다는 감상을 들어서 웃었습니다.
작가님께서 생각하는 '차녀성'이 어떤 것인지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모두가 따라야 할 모델로서의 바람직한 가족상이 존재하는 한국 사회에서, ‘차녀’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띱니다. (같은 성별로서 두 번째기에) 잉여의, (아들로 태어나지 못했기에) 실패이자 실망스러운, (아들의) 대체재가 되어야 하는, (가정 내에서 가장 중요하지 않은 구성원이기에) 언제나 가장 별로인 것을 배당받는 취급이 당연한 존재. 연령과 성별에 따른 위계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놓이면서 자연스레 지니게 되는 특성을 차녀성이라고 부릅니다.
‘차녀성’은 출생 순서에 따른 차녀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밑으로 남동생을 둔 장녀나 위로 오빠가 있는 장녀 또한 ‘차녀성’을 경험하고요. 한국 사회가 여성을 2등 시민 취급하고 딸에게 여전히 더 많은 과제를 요구하기에 모든 딸은 ‘차녀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차녀 힙합』을 쓰면서 나와 가족, 주변 사람에 대해 새롭게 깨달은 점이 있다면요?
차녀들은 집안의 해결사이자 중재자 역할, 카운슬러 역할을 도맡아 하면서도 정작 원가족 구성원들에게 “가장 성격이 안 좋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점이 재미있었어요. 그리고 아버지의 책임감, 어머니의 희생, 장녀의 부담감처럼 가족 프레임에 익숙한 우리가 정작 ‘차녀의 OOO’는 낯설어하면서 “뭘 그렇게까지…” 하며 부정한다는 사실도요.
저에 대해서 새로 알게 된 사실은, 제가 항상 저의 감정과 호불호를 참고 억압하는 것에 익숙하다는 점이에요. 타고난 기질도 있지만, 그 ‘무던하고 손 안 가는 애’라는 캐릭터 안에는 내 취향이나 감정을 존중받기 어려웠던 차녀의 성장 배경도 있었던 거죠. 엄마 아빠는 먹고살기 바쁘고, 형제자매는 많고, 각자가 요구하는 건 너무 다양한데, 그걸 일일이 충족시키시는 건 저들에게 너무 힘든 일이니까 나라도 그냥 참자. 나는 괜찮아, 뭐 그런 점이요.
작가님께서 유년 시절을 보낸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와 2022년인 현재 대한민국 가족의 모습은 어떻게 다른가요?
일단 가족 내에서, 어린이를 대하는 태도가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해요. 예전보다 아이를 훨씬 적게 낳고, 그만큼 물질적으로나 감정적으로 풍족하게 키우고 싶어 하고요. 아직도 훈육 또는 체벌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많이 일어나지만, 적어도 그것이 그 시절만큼 ‘자연스럽고 당연’하진 않더라고요. 육아 관련 정보도 늘어났고, 그래서 어린이의 욕망과 감정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리고 자아 추구의 관점에서 ‘정서적으로 행복한 가정’을 원하다 보니 이전보다 딸 선호가 두드러집니다. 육아 예능이 인기를 끌면서 소위 ‘딸 바보’ 열풍이 시작되었죠. 딸은 ‘키워놓고 나니 남인’ 아들보다 훨씬 더 사랑스럽고, 키우는 재미와 보람이 있는 존재로 여겨져요. 나이 들어서 부모를 돌보는 것도 결국 딸이라는 기대도 한몫하고요. 저는 이것이 이전 세대의 ‘딸 멸시’와 양상만 다를 뿐 같은 뿌리를 공유한다고 생각해요.
이 책을 선물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
자기 자신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마음 졸였던, 내가 좀 더 노력하면 더 사랑받고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늘 심리적인 종종걸음을 쳤던 모든 딸에게. “차녀들이여, 이제 우리가 마이크를 쥘 차례다. 소외된 차녀들 왼발을 한 보 앞으로.” 그리고 그다지 눈여겨보지 않았던 둘째 딸의 세계가 궁금한 양육자와 형제자매들에게 드리고 싶습니다. “너는 듣고 있는가 성난 차녀의 함성!”
*이진송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과 여성학, 동대학원에서 한국현대소설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독립잡지 <계간홀로>와 미루는 사람들을 위한 팟캐스트 <밀림의 왕>을 만들고 있다. 『오늘은 운동하러 가야 하는데』, 『하지 않아도 나는 여자입니다』, 『연애하지 않을 자유』 등을 썼다. 공저로는 『미운 청년 새끼』,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비혼』, 『미루리 미루리라』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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