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Culture

[특별 기고] 비와 별이 내리는 이 밤을 보라 - 정연희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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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희(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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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의 일주일』? 이 국내에서 2018년 1월에 출간되었으니, 한 해하고 반이 더 지났다. 이 소설을 쓴 메이브 빈치는 아일랜드의 국민 작가로 일컬어질 만큼 우리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를 친근하게 그려내는 작가다. 메이브 빈치는 2012년 72세의 나이로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타계했고, 『그 겨울의 일주일』? 은 빈치의 사후에 출간되었다. 단편집이나 논픽션은 빼더라도, 이 소설까지 포함해 발표한 장편소설의 수만 17편이 되고, 세계적인 사랑을 받은 작가라는 것을 감안하면,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시점은 꽤 늦은 편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빈치의 소설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정말로 궁금했다. 빈치의 소설은 노벨문학상이나 퓰리처상을 거머쥘 만큼의 대단한 문학성으로 이야기하기보단 ‘잔잔한 범인류애 상’이나 ‘소소하나 확실한 행복 상’ 같은 게 있다면 기꺼이 기립박수와 함께 안겨드리고 싶은 그런 작품이기 때문이다.


추운 날 바깥에서 바들바들 떨다가 벽난로 불빛이 발갛게 반기는 실내로 들어가 누군가가 건네주는 따뜻한 담요를 덮고 벽난로 앞에 앉아 있으면 몸이 점점 더워지고 몸의 한기가 녹는 그런 느낌을 일으키는 글. 몹시 무더운 날에 여기가 에어컨 앞보다 더 시원하다며 그늘로 초대하여 자연산 바람을 안겨주는 청량한 글. 그러면서 내 마음까지 따뜻하게, 때로는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속 깊은 사랑이 깃든 글. 우리를 고립된 존재론적인 세계로 데려가 외롭게 만드는 글이 아니라, 하나둘씩 한자리에 모아 우리에게 ‘함께함’을 가르쳐주는, 우리를 외롭지 않게 만드는 글.


『그 겨울의 일주일』? 의 출간 후 반응은 예상외로, 아니 예상대로 뜨거웠다. 독자들이 그녀의 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좋아해줄까? 괜히 이러쿵저러쿵 트집을 잡진 않을까? 이런 우려는 기우가 되었다. 작품에서 배어나오는 더없이 매혹적인 인간미가 바로 우리 독자들에게도 통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국내에서 두번째로 메이브 빈치의 소설이 출간되었다. 2004년에 발표된 작품. 제목도 참 낭만적이다. ‘비와 별이 내리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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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별이 내리는 밤』? 의 공간적 배경은 그리스의 아기아안나다. 실제로 존재하는 지명이다. 그곳에 가면 옥색 물빛의 바다가 펼쳐지면서 머릿속 복작복작한 지친 정신을 달랠 수 있을 것 같다. 언덕 위 어느 타베르나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와인 한 잔과 멋진 요리를 즐기면서 여행지의 낯선 설렘을 한껏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여행의 낭만이란 그런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언뜻 평온해 보이는 우리의 삶에도 무수한 변수들이 있듯, 휴식과 충전을 위한 여행지에서도 변수는 기어코 있다. 각자 자기만의 고민을 품고 그것을 어떻게든 덜어내려 모인 그들은 아기아안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일의 목격자가 되었다. 슬픈 죽음을 만들어낸 유람선 화재.


여행자들은 독일, 잉글랜드, 아일랜드, 미국에서 온 젊은이들이다. 잘나가는 직장과 멋진 남자친구를 버리고 비장한 마음으로 이곳을 찾은 엘자, 아버지의 회사를 물려받기만 하면 되는데 그건 도무지 체질상 받아들일 수가 없는 데이비드, 사랑을 위해서는 뭐든 버릴 수 있다는 결심을 한 채 가족을 떠나 연인과 함께 정착할 곳을 찾는 중인 피오나, 이혼한 아내가 새로 만든 가정에서 자신의 아들이 잘 정착하고 살기를 바라며 떠나왔지만 그 모든 상황을 아직 받아들이기가 힘든 토머스. 그들과는 여러모로 좀 다른 피오나의 재수없는 남자친구. 그리고 누가 봐도 존경할 만한 성품을 지녔지만 자신의 아들과는 어느 순간 멀어져버린 타베르나의 주인 안드레아스, 그의 형이자 경찰서장인 아기아안나의 중심인물 요르기스, 뭔가 친근하고 궁금증을 일으키지만 더 가까워지면 슬슬 피하고 싶어지는, 거의 아기아안나 토박이인 아일랜드 태생의 보니.


그들은 실존적인 깊은 고뇌에 빠진 인물도 아니고, 마음이 비딱하게 뒤틀려 반사회적이 된 인물도 아니고, 시대적인 진탕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인물도 아니다. 그저 고개만 돌리면 내 옆에 있을 것 같고, 거울을 쳐다보면 바로 나일 것 같은 인물들이다. 메이브 빈치의 소설이 지닌 호소력의 출발점은 바로 여기가 아닐까 한다. 이 친근함, 이 현실성, 이 구체성. 나의 어제이자 오늘이자 내일일 것 같은 이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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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무리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다 해도, 심지어 우리가 극한의 애도와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에 사로잡혔다 해도, 우리는 어제까지 유지해오던 우리의 일상을 완전히 버릴 수가 없다. 마음이 아파 죽을 것 같은데도 먹고 자고 일하고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울다가도 웃어야 한다. 그것이 말해주는 것은 이 참담하고 야속한 현실에 왜 그 정도밖에 미안해하고 슬퍼하지 않느냐는 자책이 아니라, 그저 우리가 생사를 마음대로 할 수는 없으나 생이 있는 한 주어진 시간을 살아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와 같은 일로 크나큰 슬픔에 빠졌던, 그리고 그 일을 절대 잊지 않을 우리는 어쩌면 그것을 더욱 잘 알 것이다.


산 자의 몫은 슬픔에 빠져 지내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얼른 잊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고귀하게 끌어안으면서 내 현재와 미래를 이어가는 일일 것이다. 우울과 슬픔에 관련된 것은 조금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한 이 긍정의 시대에 이 소설은 우리에게 슬픔을 가슴에 품고 긴 길을 걸어가는 법을, 슬픔에 빠진 이들을 오래오래 가만히 지켜보는 법을 가르쳐준다. 그것 또한 우리 삶을 이루는 한 부분이라고 말해준다. 메이브 빈치가 우리에게 주는 위로는 느려도 좋다고, 다른 이들과 같지 않아도 좋다고 말하는 허용의 위로다.


그렇다면 슬픔 속에서도 우리를 떠나지 않는, 내일 죽더라도 오늘은 우리를 붙들고 있는 각자만의 고민은 어떻게 하는가. ?『그 겨울의 일주일』? 에서와 마찬가지로 ?『비와 별이 내리는 밤』? 에서도 메이브 빈치는 혼자의 고민을 당사자 혼자만의 것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것 같다. 우리의 문제가 객관성을 띨 수 있게 될 때는 그 문제를 혼자 버둥거리며 끌어안을 때가 아니라, 햇볕 속에 내어놓을 때다. 혼자 끌어안으면 곰팡이가 슬기 쉽다. 혼자의 외로운 관점에 혼자의 힘이 실릴 때 종종 그 방향은 왜곡되고 궁극적으로는 자기를 괴롭히는 것이 된다. 메이브 빈치는 꺼내놓으라고 한다. 하지만 빈치가 그것을 꺼내는 환경으로 선택한 것은 일상이 아니라 여행지다. 그 대상도 아주 친밀한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적당히 친해진 사람들이다. 새로운 시각이 주는 이점에 더해 새로운 사람을 알아가는 즐거움까지. 하지만 여행을 떠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듯, 무엇이든 하지 않던 일을 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죽음을 앞둔 어느 시점에 <아이리시 타임스>와 진행된 인터뷰에서 메이브 빈치는 “나는 운이 좋았고 아직 곁에는 좋은 친구들과 가족이 있어 행복한 노년을 맞고 있다”고 말했다. 살아보니, 내 마음만 바꾸면 다 잘될 거라고 말하는 착한 글과는 다르게, 내 곁에 좋은 사람이 있다는 게 오로지 나의 매력, 성격, 장점에만 기인하지는 않는 듯하다. 당연히 다른 변수들도 작용한다. 게다가 아무에게나 나를 개방하는 것은 위험하고 전적으로 권할 만한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좋은 사람과 가까워질 기회가 찾아왔을 때 그 순간을 그냥 보내지 않는 것 또한 중요하다. 변화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에 대해서도 용기가 필요하다. 조금 힘을 내보는 것. 내 환경을 바꿀 용기, 내가 함께할 사람들을 선택할 용기, 나의 굳어진 삶의 습관을 바꿀 용기. 그러고 보면 메이브 빈치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자신을 돌아보고 어느 시점에 보여준 것은 결국 용기였다. 삶의 기적은 그럴 때 찾아온다. 마지막으로 소설 속 한 부분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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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찾고 있던 것을 몇십 년 늦게, 늙은이가 되어 발견하는 것보다 더 서글픈 일은 없을 거라고. 어떤 변화의 기회가 있는지 몰라서 변화를 시도할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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