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희정 “여성이 쓴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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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전후로 새롭게 일어난 페미니즘 붐을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던 저자는 이후에도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왔다. 소라넷부터 변희수 하사 사건까지, 쓰고 또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 함께하는 시공간”으로써 이 세계를 끌어안기 위해 노력하고 싸워온 시간이었다. 그동안 써 온 글들을 한 데 엮은 책에는 『다시, 쓰는, 세계』 라는 제목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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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글을 통해, 독자들은 지난 4년의 페미니즘 이슈들을 되짚는다. 때로는 성큼 한 발 나아간 듯 했고 때로는 반 보 물러선 것 같았던 사건들, 탄식은 길었고 웃음은 짧았던 기억들을 떠올린다. 그럼에도 저자는 “의외로 낙관적이 되었다”고 말한다. 우리가 남긴 족적을 되돌아보면서, 그것들을 기록하면서, 외려 낙관하게 되었다고. 책장을 덮으며, 그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다시, 쓰는, 세계』 를 관통한 뒤 ‘다음’을 고민하게 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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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크리틱’ 손희정은 『페미니즘 리부트』?와 『성평등』 을 썼다. 『을들의 당나귀 귀』 와 『그런 남자는 없다』?를 책임 편집했고 『대한민국 넷페미史』?, 『페미니스트 모먼트』?, 『그럼에도 페미니즘』?, 『소녀들』 , 『누가 여성을 죽이는가』 등을 함께 썼다. 퀴어 유튜브 채널 ‘큐플래닛’에서 <손희정의 TMI>를 진행하고 있으며 팟캐스트 <을들의 당나귀 귀>, <혼밥 생활자의 책장>, KBS 라디오 <정용실의 뉴스브런치>에도 목소리를 보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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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쓴다는 것, 늘 용기를 내야 되는 일
최근의 기사들을 보니, 숙명여대 A씨 사건과 관련해서 인터뷰를 많이 하셨더라고요.
네, 요청이 들어오면 다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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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감 때문인가요?
그렇기도 하고요. 한편으로는 제가 『다크룸』 이라는 책을 번역했을 즈음에 『맨 얼라이브』 라는 트랜스젠더 남성에 대한 책도 나왔고, 변희수 하사 커밍아웃도 있었고, 숙대 사건도 있었어요. 여러 사건을 보면서 지금 한국사회에서 트랜스젠더 담론이 티핑 포인트를 찍은 것이 아닌가, 좋은 담론이 더 풍부하게 나와야 하는 시기라는 생각을 계속 했던 것 같아요. (숙명여대 A씨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았을 사건이고 정말 고통스러운 사건이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더 풍부한 담론들이 나오게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어쨌든 마이크가 주어진 스피커로서 쥐고 있는 책임과 소명이 있다고 생각하고요. 거기에 잘 응답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다른 한편으로는 이 사건이 한국사회의 소수자 혐오가 드러난 계기였을 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혐오가 포장되는 사건이기도 했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로서의 책임감도 조금 있었던 것 같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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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에 나온 두 번째 책인데 제목이 『다시, 쓰는, 세계』 예요. 함의하는 바가 있을 것 같아요.
『다시, 쓰는, 세계』 는 2016년부터 2019년까지 쓴 칼럼들을 모은 책이에요. 2016년에 <경향신문>에서 ‘청춘 직설’이라는 코너를 시작했어요. 중간에 ‘직설’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는데요. 처음으로 쓴 원고가 소라넷에 대한 거였어요. 여성을 대상으로 한 디지털성범죄를 비판하는 글을 썼었고요. ‘직설’ 코너를 마무리하고 현재는 ‘지금/여기’라는 지면을 받아서 쓰고 있는데 첫 칼럼이 변희수 하사에 대한 글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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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신 두 편의 글 모두 이번 책에 실려 있죠.
네. ‘직설’의 첫 글이 소라넷이었고 ‘지금/여기’의 첫 글이 변희수 하사에 대한 글이었다는 게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의 어떤 흐름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조심스러운 건, 그렇다고 해서 소라넷 사건이 해결된 게 아니거든요. 거기에 ‘다시’라는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여성들이 경험하는 폭력과 차별을 해결해야 되는 조건은 여전히 남아 있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 다른 타자들을 쉽게 지우려고 하는 포퓰리즘적인 반동이 등장하게 되고, 페미니즘이 이 모든 걸 이야기하면서 갈 수밖에 없는 더 복잡한 운동으로 대중에게 다가고 있는 거죠. 이 책이 2015년 이후 한국 페미니즘의 어떤 흐름을 짚고 있다면, 그 지점에서 잘 보여주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 책에 『다시, 쓰는, 세계』 라는 제목을 붙이면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다시’의 의미와, 너무 쉽게 사회가 제자리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힘이 얽혀있는 공간에 대한 글쓰기라는 부분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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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로서 내가 계속 쓰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나’라는 고민을 하셨던 것 같아요.
여자가 쓴다는 게 2020년의 대한민국에서도 왜 여전히 의미가 있을까, 라는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디지털 미디어 환경이 바뀌면서 여성이 쓴다는 것의 문턱은 굉장히 낮아졌고 누구나 쓸 수 있는데 왜 아직도 이것은 정치적인 행위인지 생각해 보면, 일단 여성에게 읽고 쓰고 말하는 것이 금지되어 온 가부장제의 역사가 우리들의 DNA 안에 있는 것 같고요. 그래서 쓴다는 건 늘 용기를 내야 되는 일인 것 같아요. 다른 한편으로 떠올랐던 사건이 있었는데 2012년, 2013년 즈음에 어느 날 제가 신문을 봤는데 여성 필자가 너무 없는 거예요. 그래서 트친들한테 ‘여성 필자 풀(pool)을 모아서 신문사에 제안을 하자, 누구를 추천할 수 있을까?’라고 글을 남겼어요. 그때 정희진, 권김현영, 전희경 같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 사건이 떠오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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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여성들이 글을 쓸 수 있는 문턱은 낮아졌지만, 여전히 이 사회에서 권위 있다고 말해지는 지면에는 여성들이 글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잘 허락되지 않았고, 그런 지면에 글을 쓴다고 하더라도 그건 언제나 사적 글쓰기로 사소화 됐던 역사가 최근까지도 있었던 거죠. 여성에게는 쓴다는 행위 자체가 굉장히 편협하게 허락되어 있었던 것 아닌가 싶고, 그렇다면 저한테 글을 쓴다는 건 여성일 뿐만 아니라 소수자로서 허락돼 있는 굉장히 협소한 세계를 확장하는 작업인 거죠. 그 자체가 세계의 상상력과 이야기를 바꿔내는 작업과 연결되지 않나라는 생각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들에게 허락되어 있지 않은 작은 지면을 하나 받으면 악착같이 들리지 않는 이야기를 더 많이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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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지난 4년간 쓴 글들을 엮으면서 나는 의외로 낙관적이 되었다”고 쓰셨죠. 지금 시점에 『다시, 쓰는, 세계』 를 출간하신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한국사회가 너무 다이나믹해서 매일 매일 사건이 터지잖아요. 그것들을 보고 있으면 정말 일희일비하게 되거든요. 낙태죄 폐지됐다고 하면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가, 다음 날 다른 뉴스를 보면 다 망한 것 같고. 그런데 역사를 놓고 보면, 여성들의 버텨온 이야기들을 보면,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는 순간들이 있더라고요. 시간 속에 쌓여온 이야기들을 계속 드러내는 것, 그래서 시간이 우리 편이라는 걸 나누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존경하는 여성노동운동가 선생님이 얼마 전에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시간이 정말 무서운 거라서, 그 시간 안에서 반드시 풍화되는 것과 반드시 더 빛나는 것이 있다고요. 저한테는 그런 믿음이 있는 거죠. 우리의 운동과 우리의 글쓰기는 시간 속에서 빛나는 순간이 올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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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를 보면, 레인보우를 연상시키는 컬러로 채워져 있어요.
운동은 언제나 플러스의 운동이 돼야 된다고 생각해요. 마이너스의 운동이면 안 될 것 같아요. 이것 안 되고, 저것 안 되고, 하면서 가장 견고한 결정체로 굳어서 운신의 폭을 줄이는 운동은 결국 운동일 수 없지 않을까 싶고 플러스의 운동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그것이 페미니즘을 더욱 확장시킬 방법이라고 생각하기도 해요. 그래서인지 레인보우는 저한테 페미니즘 색깔이거든요. 아마 디자이너님도 그런 고려를 다 해주셨던 것 같아요. 표지 디자인을 빼고 이 책을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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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의 의미
작가님에게 ‘세계’는 어떤 의미인가요? 페미니스트로서 세계에 넌덜머리가 나기도 할 것 같은데요(웃음).
최근에 제일 많이 떠올린 단어는 ‘지긋지긋’인 것 같은데요. 지긋지긋함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열심히 살까 생각해 보면 함께 계속 잘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 때문이구나 싶어요. 결국 나를 움직이는 건 증오라기보다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하는 거죠. 너무 진부한데 그걸 부정할 수가 없는 거죠. 그리고 주목을 많이 받는 글 쓰는 사람 중에 한 명이고, 무슨 사건이 터지면 사람들이 페북이든 어디든 와서 손희정이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본단 말이에요. 그럴 때 한 마디를 하는 게 되게 큰 부담이거든요. 너무 크게 해석되거나 너무 크게 왜곡당하거나 때로는 너무 크게 실제로 영향을 미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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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부담감은 어떻게 견디세요?
내가 전부가 아니라는 걸 계속 배우기 때문에 견딜 수 있는 것 같아요. 이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해줄 수많은 신뢰할 만한 페미니스트 동료들이 있고, 내가 말실수를 하면 이 동료들이 바로잡아줄 것이고, 이 동료들이 힘에 부칠 때 내가 나서서 이야기할 수 있는 자원을 이제는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페미니스트 비평이 단일한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조각보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각각의 다른 의견들이 패치처럼 이어져나가면서 점점 확대되는 거죠. 페미니즘 내에 서로 다른 여러 가지 목소리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근본적으로 싸우고 싶은 건 단 한 가지인 것 같아요. 마이너스가 되게 하는 목소리. 다른 여러 가지 색깔들을 지우겠다고 말하는 목소리. 그것 하나한테는 단호하게 당신이 틀렸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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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의 페미니즘 이슈 중에 우리를 기쁘게 했던 것들도 있었죠. 낙태죄 폐지를 이끌어낸 게 대표적일 텐데요. 이런 몇몇 사건에 너무 도취되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그게 4부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들의 주요 내용인데요. 혁명적인 순간은 너무 좋죠. 이미지화하기도 좋고, 팔기도 좋고, 언론에서 되게 즐거워하기도 좋고. 그런데 실은 혁명이 가능하기까지의 시간은 너무 지난하고 혁명 이후의 성과를 탈취하려고 하는 사람들과 싸우는 것도 굉장히 지난한 것 아닌가 싶어요. 『백래시』?를 쓴 수전 팔루디와 이메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요. 수전 팔루디가 재차 강조했던 게 있었어요. 언론이 너무 신나게 ‘여성들이 승리했다, 여성의 세기가 열릴 거다’라고 치어링(cheering)하는 것을 경계해야 된다는 거였어요. 언론은 이게 팔리는 뉴스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하길 좋아하고, 한편으로는 여성을 비롯해서 소수자들은 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만 들리기 시작하면 되게 크게 들리거든요. 또 언론은 그걸 과장하는 걸 좋아하고요. 우리가 ‘그렇지, 이렇게 달라졌지’ 하는 순간 백래시는 굉장히 빠르게 크게 닥쳐오기 때문에 사실은 혁명 이후의 시간들을 어떻게 쌓는가가 너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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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나치게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는 것. 이야말로 야기되어야 할 또 하나의 문제다”라고 쓰셨어요. 두려움이 사슬이 될 수도 있다고요.
너무 어려운 이야기이기는 한데요. 음... 정희진 선생님이 어떤 글에서 ‘가부장제가 여성들에게 유일하게 허락한 자리가 피해자의 자리였다’고 쓰신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 정체성으로 신나게 달려가면 그것은 우리의 운신의 폭을 얼마나 줄이는 일인지, 고민을 하게 되거든요. 양면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예전에는 저 사람이 나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걸 모르고 지나가는 일들이 있었던 거잖아요. 성희롱이나 언어폭력을 당해도 ‘그럴 수 있지’ 하고. 그게 폭력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사회 변화를 위해서도 나의 건강이나 입지를 위해서도 너무 중요한 일이지만, 그걸 바꿔낼 수 있는 역량이 우리에게 있다는 걸 얼마나 믿는가라는 질문이 부족한 것 같아요. 그리고 저한테 페미니즘은 이것이 단순히 나를 피해자로 만들기 때문에 싸우는 게 아니라, 이것이 불의이고 부당하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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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공포, 두려움 같은 것들만 강조되는 측면이 있죠.
공포와 두려움은 나를 지키는 감정이기 때문에 너무 중요한데, 모든 것이 공포와 두려움으로만 귀결되면 나를 갉아먹는 감정이 되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개개인마다 다른 경험들을 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기는 너무 어려워요. 공포와 두려움으로 못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그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나세요’ 이런 이야기로 들리고 싶지는 않거든요. 운동 전반으로 봤을 때는 공포라는 감정을 어떻게 우리의 힘으로 가지고 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해야 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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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쯤 세상이 바뀔까?’ 하고 생각해 보면 아득해질 때가 있어요.
제가 2012~2013년 즈음에 박사 논문을 쓰고 있었는데, 정말로 행려병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과 공유했었어요. 한국에서는 페미니스트뿐만 아니라 공부하는 사람들이 너무 힘드니까요. 그런데 지금 제가 그런 고민을 하지는 않아요. 어쨌든 저한테 지면이 온다는 건, 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역시 변했다는 거거든요. 2014년과 2020년의 신문 지면을 비교해 보면 필자의 성별이나 다양성은 비교할 수가 없어요. 이건 확실히 지난 5년간 페미니즘이 바꾼 것 같아요. 페미니즘이 여자들만 챙긴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저는 한국사회의 소수자 의제가 훨씬 더 다양하게 드러날 수 있었던 데에는 페미니스트들의 역할 역시 있었다고 보거든요. 물론 페미니즘 운동과 다른 소수자 운동이 특히 인식론의 차원에서 그렇게 명확하게 분리되는 것도 아니고요. 어쨌거나 다른 소수자 운동이 페미니즘 운동을 확장시켜준 것만큼이나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겠죠. 그것이 연대가 하는 역할 중 하나가 아닐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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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소수자들과의 연대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제가 영화 관계자이기 때문인 것 같은데요. 스웨덴, 호주, 영국 등 성평등 영화 정책을 시행하는 국가가 있어요. 예컨대 국가에서 제작비나 배급비 등을 지원해줄 때 감독, 촬영 등 키 스태프 안에 여성 비율이 몇 퍼센트인지, 배우는 얼마나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기용되는지 등을 기준으로 지원을 하는 거죠. 가까운 선배인 조혜영 영화평론가가 이런 성평등 영화 정책 연구를 계속하고 있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남녀동수제와 같은 성평등 영화정책을 논의하기 시작하면 그것이 결국 인종, 성적지향, 신체조건 등을 아우르는 다양한 소수자를 위한 다양성 영화정책으로 확대된다고요. 페미니즘과 여성이라고 하는 이슈는 어쨌든 인구의 절반이기 때문에 굉장히 파워가 있고, 그래서 성평등 영화 정책이 힘을 가지고 끌고 가기 시작하면 다른 소수자 의제가 같이 온다는 거죠. 그런 부분에서 우리가 연대의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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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가능하게 하는 움직임
?“남성 페미니스트는 가능하다”고 쓰셨어요. “그건 이 망가진 세계에서 생존하기 위해 필수적인 정체성”이라고요.
남성 페미니스트는 당연히 가능하다고 생각하고요. 페미니즘이 우리를 옥죄고 있는 성적 질서 자체와 싸우는 거라면, 남자가 이 질서의 수혜를 더 많이 받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성 전부가 동질적인 계급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안에 차이가 굉장히 많고, 가부장제가 마치 남성들에게 수혜를 주는 것처럼 하면서 남성들을 더 착취하는 부분들도 있고요. 그래서 당연히 남성들도 페미니스트가 돼야 된다고 생각해요. 다만 믿지 않는 남성 페미니스트는 ‘내가 너희 여성들의 권리를 위해서 페미니스트가 되어 줄게’라고 하는 사람들이에요. 당신 자신의 권리를 위해서 제대로 이 사회를 분석하고 어떻게 싸울 것인지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경향신문> 칼럼에 그 이야기를 쓴 적이 있는데 이런 댓글이 있었어요. ‘아줌마, 그 좋은 거 너나 해.’ 이때의 ‘아줌마’는 멸칭인 거죠. 멸칭으로 깎아내려서 조롱함으로써 자기가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잖아요. 그 댓글을 캡쳐해서 강의에 활용했어요. ‘이런 것이 여성혐오입니다’라고 말씀드렸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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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가 규정한 ‘남성다움’에 부합하지 않는 남성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남성들이 자각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는 성별 고정관념이 너무 세다는 거예요. 이 성별 고정관념을 어떻게 깨야 될까가 요즘 저의 고민인데요. 사람은 여러 가지 정체성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런데 남자들은 여러 가지 정체성 중에서도 ‘남자’에 제일 먼저 클릭되는 것 같아요. 그건 여성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제가 종종 비교하는 사례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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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건가요?
청년 여성들이 양진호 웹하드 카르텔의 문제를 계속 이야기했을 때 한국사회가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거든요. 양진호가 남성 노동자를 때리는 동영상이 풀리면서 반응이 폭발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어요. 위력에 의한 갑질, 폭력이라는 거에 되게 빠르게 반응한 거죠. 그 그림을 보면 빠르게 노동자에게 동일시하는데, 똑같은 사례라고 볼 수 없지만 비교해 볼 만한 사례는 안희정 전 지사 성폭력 사건이었다고 생각해요. 위력에 의한 폭력인데 이게 성폭력이 되었을 때는 노동자로서 김지은과 동일시하지 않아요. 저는 남자들이 새벽 2시에 담배를 사서 상사한테 가야 되는 상황을 분명히 이해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자기들도 당하는 일이니까. 그런데 이게 성폭력의 문제가 되어버리면 빠르게 안희정이랑 동일시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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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도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요.
당신들은 안희정이 아니고, 기득권들이 자기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성별 고정관념이라는 걸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지 보고 노동자로서 손잡아야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자기가 훨씬 더 쉽게 동일시할 수 있는 곳으로 빨리 위치를 바꾸는 게 되게 기만적인 이중 잣대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성별 고정관념의 연장선상에서 또 트랜스젠더 여성은 여성이 아니라는 생각이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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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말미에 「돼지를 그대 품 안에」라는 제목의 글이 실려 있어요. 마리아 미즈가 쓴 책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 속의 ‘어머니와 암퇘지’ 일화와 관련된 이야기인데요. “기대와 희망이 무너져 내린 광장의 폐허를 돌아보며 세상이 망했다고 한탄하면서 시류에 떠밀려가는 것은 언제나 쉽다. 무엇보다 어렵지만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일은 당장 잡아먹어도 부족할 돼지를 부득부득 먹이고 키워내는 일이다”라는 구절이 인상적이었어요.
그게 ‘혁명 이후를 어떻게 가능하게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아요. 눈에 보이는 화려한 성과를 이뤄내고 그것을 나의 자원으로 가져가는 건 너무 중요하지만, 그것과 더불어서 일상을 계속 유지해 나가는 노력들이 되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리아 미즈가 돼지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서 비교하는 게 그런 거였어요. 남성 철학자들이 파국을 이야기하고 세계가 망했다고 울부짖으면서 땅을 뒹굴고 있을 때, 실제로 사람을 살리는 것은 하루하루 먹을 것을 키워내는 농부의 노동이고 여성의 노동이라고 이야기하거든요. 일상을 가능하게 하는 움직임들은 뭘까, 미운 사람을 짓밟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움직임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고민이 계속 드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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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영 감독의 영화 <어른이 되면>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죠.
그 일상이라는 말을 구체화시키려고 이야기했던 게 <어른이 되면>이었던 거죠. 같이 사는 일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뭘 준비해야 되는가 생각해 보면, 저는 ‘정성’이라는 말을 되게 좋아하는데, 뭐든 정성을 들이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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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다시, 쓰는, 세계』 를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 딱 한 편의 글만 보여줄 수 있다면, 어떤 글을 고르시겠어요?
하나만 읽어본다고 하시면, 역시 소라넷에 대해 쓴 글인 것 같아요(「괴물은 침묵을 먹고 자란다」). 아니면 유튜브에 있는 여혐 시장에 대해 쓴 「백래시와 여혐 시장」이요. 그 글 한 편을 쓰려고 정말 리서치를 많이 했거든요. 그 사람들의 유튜버 계정을 다 들어가 보고... 그건 정말 극한직업이었어요. 봐줄 수가 없더라고요. 이야기와 이미지가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여성성과 남성성의 신화 구축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가 사실 저의 전문분야예요. 그 글들이 제 작업의 성격을 제일 잘 보여주지 않나 싶어서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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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세계손희정 저 | 오월의봄
그는 새삼 스스로에게 ‘쓰는 행위’란 무엇인지 성찰한다. “정의롭지 않고 불평등한 세계를 다시 쓰기 위해 쉬지 않고 반복해서 쓰는 존재”로 기억되고 싶다는 그는 혐오와 배제로 가득한 이 세계의 이야기를 페미니스트 지혜와 상상력으로 다시 쓰자고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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