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검열, 혹은 ‘착한 여자 콤플렉스’를 벗어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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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때 과학교육을 전공했지만, 정치학 강의도 무척 흥미롭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사실 전공은 입학하자마자 포기해버렸다. 물리 문제 하나를 풀려면, 칠판을 서너 번 지울 때까지 수많은 공식을 풀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사범대라 나중에는 교직 이수로 바쁘기 때문에 일찌감치 전공을 배운 것이 그만큼 포기도 빠르게 만들었다.
내가 가장 취약한 부분이 다섯 자리를 넘어가는 수와 공식, 그리고 화학 기호이다. 그런데도 왜 이과로 진학했느냐고 묻는다면, 예나 지금이나 공부 좀 한다 하면, 누구나 가고 싶어하는 그곳. 의대가 목표였기 때문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의대는 내가 선택하기도 전에 외부로부터 주어진 목표였다.
이과로 진학한 뒤, 성적이 신나게 미끄럼틀을 나서 스트레스도 받았지만 어쨌든 빨리 대학만 가면 살 것 같았다. 관심 있는 책을 선생님이나 부모님 눈치 안 보고 실컷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대 재수하지 않겠다는 목표 하나로, 대학에 입학했고, 교정에서 어떤 건물 하나를 발견하고서 인생에 꽃길이 열렸다는 확신을 받았다. 바로 ‘도서관’이었다.?
4년 내내 잡아먹을 초식동물들이 달리는 초원을 마주한 한 마리 사자라도 된 기분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엔 입시공부만 하느라 초식동물처럼 주눅들어 지냈는데, 대학 도서관에 들어서니 나 자신이 그렇게 당당해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전공 수업에 실망한 나는 책을 통해 만난 과학을 더 이상 강의실에서 찾지 않기로 했다. 지금도 의문이다.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 같은 중요한 개념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해선 왜 아무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는지. 중요한 개념을 먼저 제대로 짚어주면, 지루한 공식이 몇 페이지에 걸쳐 계속된다 해도 호기심에 가득 차 능동적으로 공부했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이런 의문들도 떨칠 수 없다. ‘왜 과학 시간엔 우주를 움직이는 힘에 대해 토론해서는 안 되는가? 문제 풀기보다 이것이 우선 아니었던가? 그렇게 근본적인 호기심을 키워주어야 나중에 자신만의 이론을 찾아 끝까지 가보는 과학자로서의 근성을 키우게 되는 것 아닌가? 혹시 이 땅의 수학, 과학 교육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나 같은 유형의 학생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목적을 제대로 이해시키지 않은 채 수많은 공식이나 화학식을 던져주면서 문제를 풀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은 ‘무슨 문제 푸는 기계도 아니고…’ 하면서 교과서를 밀쳐낸다.
전공을 등진 나를 구원한 것은 이 세상을 포기하고 저세상 텐션으로 미친 듯이 읽은 책들이었다. 그리고 책에서 잡다하게 주워올린 지식을 정리하고 싶어 청강한 철학, 정치학, 심리학 강의를 통해 대학 생활의 재미를 찾았다. 특히 정치외교학과의 진덕규 교수님 강의는 소문대로 수강생도 많았고, 한 시간도 빠지기 아까운 명강의였다. 진 교수님은 여학생들 대부분이 취직하지 않고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 결혼하던 당시의 세태에 대해 따끔하게 조언하시고, 항상 열심히 공부하고, 자신의 일을 꼭 찾으라고 강조하셨다.
번역서까지 수십 권의 책을 내고 나서, 문득 교수님이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해졌다. 몇백 명이 듣는 대규모 강의에 수강신청도 하지 않고 들었던 강의라 교수님은 나를 모르시겠지만, 교수님 덕분에 사회와 역사를 보는 안목을 키우고 책 읽고 글 쓰는 법을 터득해 번역가도 되고, 작가도 되었으니 이보다 더한 은인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 성함을 구글링해보니 이미 은퇴하셨고, 교수님의 명언 모음이 인터넷 바다에서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떠돌고 있었다. 교수님은 철없는 여대생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미국에서 여성 대통령보다 흑인 대통령이 먼저 나타날 거라고 예언하셨다.
“흑인보다 더 아래에 여성이 있다. 그리고 너희들이 공부 못하고 가난하다고 비웃는 남자들보다 사실은 너희 여대생이 더 아래에 있다.”
이 말은 『프런티어 걸들을 위한 과학자 편지』?에서 최초의 흑인 여성 우주비행사 메이 제머슨이 한 말과 같은 맥락에 있다.
“사실 백인 여성들은 큰 착각을 하고 있어. 자신들이 백인 남자들보다는 못하지만, 흑인 남자들보다는 우월한 사회계층이라고 생각하지. 물론 1983년에 백인 여성과 흑인 남성은 우주선에 같이 탈 수 있었어. 하지만, 결국 2009년 미국 대통령에 흑인 남성이 먼저 당선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해. 좋은 집안에서 자라 최고의 교육을 받은 여성인 힐러리 클린턴은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흑인 버락 오바마를 우습게 봤겠지만, 국민이 선거에서 택한 것은 오바마였어.”
간혹 남자들이 “여자들은 왜 사회 탓, 제도 탓만 하느냐? 남자들도 사는 게 힘들다.”라고 항변하는 것을 종종 본다. 이럴 땐 “사는 건 원래 힘든 거다.”라는 말과 함께 앞에서 언급한 과학교육의 문제를 다시 꺼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고등학교 때까지는 수학과 과학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유지하다가, 대학에 진학한 후부터는 하위권으로 추락하는 것은 그들의 자질 문제인가? 아니면, 수학, 과학교육의 시스템 문제인가? 마찬가지로 사회 모든 분야의 상위 계층으로 올라갈수록, 학창 시절엔 그토록 명민하고 총명하던 여학생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은 여학생들의 자질 문제인가? 아니면, 사회 시스템의 문제인가? 개인적인 결론을 말하자면, 많은 분야에서 남녀 성비 균형이 적절히 자리 잡기 전까지 여성들은 충분히 부당함을 밝혀내고 개선을 요구할 자격이 있다고 본다.
난 진 교수님께서 여학생들에게 “너거들. 자기 검열 하지 말래이.”라고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로 해주신 조언에 힘입어, 이 책, 『프런티어 걸들을 위한 과학자 편지』?를 썼다. 교수님이 말씀하신 자기 검열, 즉 ‘착한 여자 콤플렉스’를 벗어던진 시각으로 보니, 과학과 세계사의 현장에는 부당한 일투성이였고,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정말 많았다. 그리고 묻어두기엔 아까운 여성 과학자들의 열정이 너무도 뜨거웠다.
마지막으로, 번역가로서 영미권 도서 시장을 조사하다가 알게 된, 미국의 과학교육 프로젝트 ‘미국이 꿈꾸는 미래, STEM(과학(Science), 기술(Technology), 공학(Engineering), 수학(Mathematics) 분야를 합쳐 가리키는 말)’에 대해서도 이 책을 통해 알려주고 싶었다, 이 책은 여학생들이 과학기술계로 진출하도록, 그리고 자시만의 꿈을 찾아가도록 많은 격려를 해줄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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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런티어 걸들을 위한 과학자 편지유윤한 저 | 궁리출판
세계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머 에이다 러브레이스부터 아프리카의 종교와 문화를 연구한 탐험가 매리 킹슬리 등 다양한 과학 분야에서 여성 과학자들을 선정하여 그들의 감동적인 삶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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