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Culture

다시 한번 수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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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열심히 편지를 썼다. 절망하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살아남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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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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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멈출 때면 찾는 책이 있습니다. 거친 분노, 그마저도 보듬고 성찰하게 만드는 책들이 있습니다. 너무 바쁜 나날들 속에서도 몇 번씩이나 호흡을 멈추게 하는, 나의 일상적 게으름 내지는 관성과 타성에 젖어가던 무미건조한 가슴을 아프게도 만들고, 너무 아파 주저앉을 찰나 다시 내달리게 만드는 책들이 있습니다. 제게 있어 서준식의 책이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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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단된 공간은 존재로 하여금 짙은 외로움과 깊은 좌절에 빠지게 할 거라고, 단절의 고통은 존재로 하여금 또 다른 존재와 세상을 향한 분노와 적개심을 갖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닫힌 공간에서도 오히려 ‘좀 더 착한 존재’가 되어 타자와 세상을 향한 더욱 결연한 사랑을 각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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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히 노력하고 무언인가를 이루어놓은 것, 세상의 온갖 악이나 어리석음과 타협하지 않고 강직하게 살아가는 것,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하고 약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분노할 줄 안다는 것,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그 얼마나 중요한 일들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나는 이런 식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소망을 끝끝내 버릴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소망에 더하여 나에게는 요즘 또 한가지 작은 소망이 생겼다. 좀 더 착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

( 『서준식 옥중서한 1971-1988』 , 노사과연, 572~5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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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식은 일본에서 태어나 엄혹한 시절에 한국으로 유학을 왔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통치하던 1970년, 대학생이었던 그는 북한을 다녀왔고 이듬해 간첩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7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징역을 꼬박 살아낸 이후에도, 사상 전향을 거부한 까닭에 사회안전법상의 피보안감호자로 그는 여전히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서준식 옥중서한 1971-1988》은 감옥에서 쓰여진 17년간의 편지들을 모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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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식에게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존재를 지켜내는 양심의 문제였습니다(“저의 지상 목표는 ‘석방되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타협할 줄 모르는 사회주의자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국가가 간섭하는 것 자체를 경계하고 거부하였던 자유주의자였던 까닭입니다. 그는 스스로 수인(囚人)이 되어 지인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양심에 따라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약자에 대한 연민에 대하여, 인간이란 존재의 보잘것없음에 대하여,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적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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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옛날부터 나는 ‘슬픔의 사람’이었다. 나에게는 언제나 이루지 못할 꿈이 있었고, 그 꿈이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구조를 가진 사회 속에서 그 사회에 먹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으로 저항해야 하는 슬픔을 가지고 나는 살아왔다. 이 슬픔은 옥중서한의 가장 밑바닥에 깔린 ‘라이트모티프’이다.
(2002년판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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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하지 않고 인간을 사랑하기란 쉽다. 그러나 관찰하면서도 그 인간을 사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깊은 사색 없이 단순 소박하기는 쉽다. 그러나 깊이 사색하면서도 단순 소박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자신을 기만하면서도 낙천적이기는 쉽다. 그러나 자신을 기만하지 않으면서 낙천적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어리석은 자를 증오하지 않고 포용하기는 쉽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를 증오하면서 그에게 애정을 보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외롭지 않은 자가 온화하기란 쉽다. 그러나 속절없는 고립 속에서 괴팍해지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적개심과 원한을 가슴에 가득 품고서 악과 부정과 비열을 증오하기란 쉽다. 그러나 적개심과 원한 없이 사랑하면서 악과 부정과 비열을 증오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5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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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은 닫힌 공간에서도 오히려 ‘좀 더 착한 존재’가 되기를 각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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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사회과학연구소(노사과연)에서 펴낸 2008년판에는 야간비행에서 펴낸 2002년판에 실리지 않았던 15통의 편지와 80여 개에 이르는 주석이 새롭게 실렸고, 이 책은 다시 2015년에 ‘저자교열판’이란 부제를 달고 재출간되었습니다. 2002년판의 머리말 제목은 “꿈을 지키기 위해서”였으나, 2007년판 머리말에서는 “마르크스와 예수 사이를 고통스럽게 오가며 참으로 진지하게 예수를 사색”했으나 끝내 기독교를 거부한 ‘변(辯)’과 출옥 이후 희망을 움켜쥐고 헌신했던 인권 운동에 대한 ‘실패의 기록’을 담담한 언어로 적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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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실패’ 사이 그 어딘가에서, 저는 다시 이 책을 꺼내어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책에 갇힌 수인이 되어 한 줌 희망을 곱씹으며 ‘더 착한 존재’에 이르지 못한 ‘실패의 기록’을 적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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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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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존재론을 다루기 위해서는 결국 책과 책 읽기의 본질을 궁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 편집자란 무수한 통념과 싸워 마침내 통념의 균열을 이끌어내는 사람이라는 것. 세상의 전복은 대체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비관론적 현실주의자이면서도, 언젠가 도래해야 할 세상을 끝내 긍정해내는, 그리하여 내가 만든 책으로 세상에 작은 균열을 내고자 하는 틈입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우리가 지금껏 나눴던 이야기들을 다시 꺼내어 읽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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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작정했지만 결국 나누지 못한 더 많은 이야기의 목록은 다른 노트에 옮겨놓습니다. 우리의 남은 이야기는 당분간 각자의 자리에서 기록하기로 합시다. 은밀하게, 치밀하게, 단단하게. 그리고 때가 되면 ‘서로에게 갇힌 자가 되어’ 편지를 씁시다. “곱은 손에 호호 입김을 불면서, 혹은 봉함엽서 위에 뚝뚝 떨어지는 땀을 손바닥으로 자꾸만 훔치면서 나는 열심히 편지를 썼다. 절망하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살아남기 위하여…”(‘일어판 머리말’에서) 다시 한번, 절망하지 않기 위하여, 살아남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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