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Culture

첼로, 나의 두 번째 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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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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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 가장 가까이에서 울리는 소리


가을이면 나의 두 번째 악기인 첼로 소리가 더 깊게 들린다. 타악기의 속성을 지닌 피아노와는 달리 몸 가까이에서 현악기 몸통의 진동을 느끼는 것은 다른 차원의 경험이다. 바이올린이나 플루트처럼 레퍼토리도 더 다양하고, 가지고 다니기도 쉬운 악기가 아닌 내 덩치만 한 첼로에 반한 건 아홉 살의 가을날 드보르자크의 교향곡을 들은 뒤였다. 바이올린으로 음반에서 듣던 근사한 소리를 내려면 까마득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걸 어렴풋이 알았던 때였다. 나는 돌이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소리에 유난히 예민해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경기를 일으키듯 숨 넘어가게 울어 엄마를 기진맥진하게 만드는 아기였다. 얼굴이 새파래지도록 우는 나에게 놀라 온 집 안의 전화기를 담요와 이불로 꽁꽁 싸맸던 엄마는 언제나 그렇듯 “네가 좋아하는 걸 해라.”라고 말해주었다.


자발적으로 고른 두 번째 악기인 만큼 첼로가 내 인생의 좋은 친구가 되어줄 것이라는 엄마의 예상대로, 나는 첼로에 빚을 많이 졌다. 애인 같은 존재인 첼로를 나는 주저 없이 파리로 가져갔다. 긴 방학에 한 달 이상 다른 도시로 떠날 때에도 첼로를 챙겼다. 약음기를 끼우면 이른 아침이나 늦은 저녁에도 악기를 잡을 수 있어 방 한쪽에 자주 악기를 꺼내두었다. 매번 케이스에 악기를 넣고 정리하기에는 내가 너무 게을렀던 탓도 있지만 그만큼 첼로가 필요한 순간들이 잦았다.


자발적으로 선택해 모국어로부터 멀어진 삶을 산다는 건 설렘과 동시에, 완전히 내 것이 아닌 불완전한 언어로 둘러싸인 일상의 무게를 견디는 일이기도 했다. 남들보다 성긴 구멍의 뜰채로 웅덩이에서 무언가를 건져 올리는 어부처럼, 아무리 애를 써서 뜰채를 건져 올려도 그 안에 남아 있는 것이 없어 모든 것이 소용없는 일처럼 느껴지고는 했다. 이대로 쓸모 없는 존재가 되어가는구나, 마음에 생채기가 생기며 잔뜩 흔들리는 날이 이어지기도 했다. 그때마다 심호흡을 하고 거실의 피아노 의자를 가져와 높이를 조절하고 첼로를 잡았다.


개방현으로 두고 활을 그을 때마다 양 무릎과 왼쪽 가슴 위에 놓인 악기가 깊게 몸을 떨었다. 그 단순한 진동이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현을 짚는 왼손의 지문 위로 붉은 자국이 남으며 적당한 통증이 지나가는 만큼, 나를 둘러싸고 외부에서 벌어지는 그렇고 그런 일들도 소음처럼 지나갔다. 손가락 끝에 옅은 굳은살이 배기며 껍질이 벗겨지고 새살이 나는 과정은 순간의 고통과 매일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뿌듯함, 오늘보다는 내일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뒤섞이며 스스로 한 꺼풀 껍질을 벗는 일이기도 했다.


매번 시험이라는 관문을 통해 스스로를 증명해 보이지 않아도 되는 첼로를 나는 마음을 다해 사랑했다. 계절이 달라질 때면 소소하게 활에 바를 송진을 바꾸며 현에 붙는 활 털이 달라지는 미묘한 변화를 느꼈고, 수명이 다한 첼로 현을 세트로 바꾼 뒤에는 달라진 소리의 질감에 어울리는 레퍼토리를 찾느라 가지고 있는 악보를 모두 꺼내 놓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심장 가장 가까운 곳에서 묵직하게 울리는 소리는 자주 칼날같이 곤두서는 예민한 기질을 많이 누그러뜨려 주었다. 나는 내 첼로에 이름을 지어주고 주기적으로 현악기 제작자를 찾아가 악기를 점검받았다. 살아 있는 생명체를 대하듯, 온도와 습도에 신경을 썼고, 계절에 맞는 높이의 브리지를 깎아 구색을 갖춰 극진히 살폈다. 동시에 완벽 그 이상의 첼로 사운드를 지닌 첼리스트들의 음반을 찾아 듣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번 생에서 이런 소리를 내지는 못하겠지만, 이상향으로 삼을 만한 대상이나마 마음속에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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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피눔 밤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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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첼로


드보르자크 〈첼로 협주곡〉은 어느새 묵직해진 가을의 공기와 잘 어울리는 곡이다. 드보르자크가 이루지 못한 첫사랑에게 바친 노래의 멜로디가 숨어 있는 3악장은 곳곳에 스며 있는 보헤미안의 감수성과 함께 이 협주곡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짧은 일주일 일정으로 프라하로 향했던 어느 가을, 나는 드보르자크 음반과 악보를 챙겼다. 인터뷰로 만났던 첼리스트 G가 프라하의 루돌피눔에서 연주하는 날과 마침 일정이 겹쳤다.


공연이 끝나고 만난 그에게 사인을 받고 싶다며 드보르자크의 원전 악보를 내밀자 그가 주저했다. 이 곡은 너무나 아름다운 걸작이며 슬라바(로스트로포비치의 애칭)를 비롯해 이미 위대한 첼리스트들이 엄청난 레코딩을 선보였다면서 경외심을 표했다. 고심하던 그가 분리된 솔로 파트 악보를 펼쳤다.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라며 3악장 속 드보르자크가 재사용한 멜로디를 짚었다. 작곡가의 내면을 유영하듯, 그의 감정을 절절히 느낄 수 있다며 첼리스트는 나에게 언젠가 꼭 한 번 이 멜로디를 직접 연주해보라고 권했다.


몇 달이 지나 파리에서 다시 만난 그는 나에게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중에 어떤 곡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별 망설임 없이 4번이라고 답했다. 아마도 5번이 더 유명하고 더 널리 알려졌으며 더 자주 연주되겠지만 그래도 4번이 내 심장에 더 가까이 있는 곡이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가 첼로를 짊어진 채 곧 연주할 쇼스타코비치 첼로 협주곡의 주요 선율을 휘파람으로 불었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리허설을 듣고 가라는 그의 권유에 대기실에서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공연장으로 향했다.


무대 위 오케스트라는 아직 다 착석하지 않은 상태였다. 빈 무대에 그가 먼저 자리에 앉아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모음곡 2번이었다. 꽉 들어찬 객석이 아닌 텅 빈 콘서트홀에서 듣는 첼로 소리는 더욱 잔향이 섬세했다. 소리가 청중들의 머리카락이나 옷, 피부에 의해 흡수되지 않고, 빈 객석의 나무 의자에 와닿아 부딪히는 덕이었다. 프렐류드, 알라망드를 지나 사라방드가 시작되었고, 나는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조심스럽게 호흡을 내뱉었다. 어떤 미세한 소리도 사라방드의 선율에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라방드의 느린 선율이 중간쯤 지나가는데 갑자기 콘서트홀의 조명이 꺼졌다. 말 그대로 암전, 칠흑같이 깜깜했다. 실황 녹음과 방송을 미리 준비하러 나온 프랑스 뮈지크 기술팀의 실수였을까. 순간 무척 당황한 나와 달리 무대 위 첼리스트는 아무렇지 않게 연주를 이어나갔다. 어둠 속에서 사라방드가 끝나고 미뉴에트와 지그가 이어졌다. 눈을 감고 음악을 들을 때처럼, 모든 시각 정보가 차단된 공간 속에서 들려오는 바흐는 역설적으로 가장 눈부시게 찬란했고 생동감이 넘쳤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가 어둠 속에서 춤을 추는 듯, 무한한 자유를 누리며 한껏 공간을 지배하다가 저 너머로 그 차원을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영혼의 춤 중간중간 들려오는 소리가 생생함을 더했다. 악보가 바로 떠오르는 익숙한 선율 속 음표 하나하나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날아와 피부 아래에 박혔다. 첼리스트의 굳은살 배긴 왼손이 지판을 강하게 짚는 소리가 무용수가 무대를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오를 때 슈즈를 신은 발끝이 바닥에 부딪는 소리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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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미술관 피라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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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를 지나며 모음곡이 끝나갈 때, 거짓말처럼 다시 조명이 들어왔다. 사위가 밝아지며 콘서트홀의 모든 풍경이 다시 눈에 들어오는 순간,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모든 시각 정보가 사라지고 청각만이 오롯하게 존재하는 경험을 지속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모음곡이 끝나고 첼리스트가 활을 내리고 나서야 나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이어서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들어왔고 지휘자와 함께 쇼스타코비치의 〈첼로 협주곡〉 리허설이 이어졌다. 빈 콘서트홀에서 홀로 듣는 쇼스타코비치는 너무나 강렬한 청각적 경험이었다. 처절한 사투를 벌이는 듯, 모든 것이 다 헝클어지고 소멸해가는 쇼스타코비치 특유의 세계가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격렬한 4악장과 처절한 울음 같은 카덴차를 지나며 나는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다. 잔뜩 구겨진 알루미늄 캔처럼 차갑고 불균질하며 날 선 소리가 파편처럼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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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로 소리에 잔뜩 취한 채, 나는 첼리스트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리허설이 끝나자마자 콘서트홀을 빠져나왔다. 메트로를 타는 대신 귀마개를 끼고 어둠이 내린 길을 걸었다. 방금 경험한 순도 높은 음악에 불쾌한 소음으로 불순물을 더하고 싶지 않았다. 개선문을 지나 센 강변을 따라 걷다가 밤의 불빛이 아름다운 루브르 앞 피라미드로 향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루브르 앞 가로등 아래를 천천히 걸으며 이 부드러운 노란 빛으로 오늘을 기억하겠다고 다짐했다. 갑작스레 콘서트홀의 조명이 사라졌던 것처럼 전혀 닮지 않았다고 여겨온 바흐의 사라방드와 쇼스타코비치가 맞닿아 나를 깜짝 놀래며 새로운 세계로 인도했던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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