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지긋지긋할 때
책이 지긋지긋했다. (책들아 눈 감고 귀 막아) 어떻게 책이 지긋할 수가 있지, 그것도 책 권하는 사람이. 아마도 책을 무척 사랑할 여러분은 이해 못할 일일 수도 있겠다. 의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책을 다른 말로 바꿔보자. 책은 검토해야 할 서류, 풀어야 할 문제집이다. 개학을 앞두고 펼쳐 든 빈 일기장이고 냉장고에 조각조각 쌓인 비워내야 할 자투리 채소다. 그렇다. 이곳에서 책은 일이다. 취미인데 숙제 같은 그런 것. 가족과 일까지 같이하면 이런 기분일까. 편하고 좋지만 가끔은 하루 종일 너무 붙어있어서 숨 돌릴 틈이 없는 느낌?
당연한 것인 양 이런저런 부연을 했지만 사실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을 때 가장 먼저 찾아온 건 당황이었다. 이래도 괜찮나.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유일한 것은 아니어도 가장 큰 이유는 책이 좋다는 건데 이래도 되나. 책이 일이기는 하지만 지겨움의 대상이 일인 것과 책인 것은 또 다른 문제니까. 잠깐 뒤통수라도 맞은 것처럼, 어떤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처럼 번쩍했다가 퓨즈가 끊어진 듯 깜깜해졌다.
출근 준비를 하다가 느닷없이 죄 없는 책장을 노려보다 ‘여기 꽂아둔 책 수십 수백 권 싹 처분하면 공간도 넓어지고 얼마나 좋아, 이거 당장 없어져도 아무 일도 안 생길 걸’ 하다가 ‘아 맞다 저 책 봐야 하는데’ 하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다. 싫은데 이게 싫다는 게 너무 싫어서 울컥했다. 왜 이게 지겨워지도록 그냥 뒀어 나 자신 그동안 뭐 했어 싶고, 과연 애증이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싶기도 하고, 감정이 소용돌이치다가 폭풍같이 몰아치다가 고요해졌다. 마음속 세상에서 거리의 나무는 꺾이고 잎을 잔뜩 떨구고 창에는 금이 가고 어딘가는 진창이 되고 우산은 뒤집어지고 도로시는 오즈에 떨어지지만 그러고는 잠시 고요가 찾아왔다.
우리 엄마 아빠는 이런 걸 몇 번이나 겪었을까. 일하면서 아이도 키우는 파워 워킹맘 K는 대체 어떻게 그걸 다 해내는 거지. 아이 셋을 돌보는 Y는 이 말할 수 없는 지겨움을 어디에 토해내고 있을까. 저 사람은? 또 저 사람은? 고요 속에서 하나둘 슬슬 생각들이 가지를 치고 뻗어나가면서 이상하게 어떤 마음들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차분해졌다. (이렇게 슬쩍 어물쩍 넘어가는 게 후에 일을 더 키우는 건 아닐까,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한번 넘어가 본다)
어찌되었든 무엇이든 아무리 좋다 한들 나만큼 사랑할 수는 없으니, 어쩌면, 자기 방어선에 위협이 되는 위험신호를 감지하면 우리 심신에 환기 체계가 작동하는 것 아닐까. 삐- 삐- 책 그만. 만능 엄마 그만. 착한 아이 그만. 배려왕 그만. 좋은 사람 그만. 일단 멈추고 잠시 쉬어. 신호를 받았으니 잠깐 서서 숨을 고르고 다시. 기어이 다시. 기꺼이 다시.
“할머니, 나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용쓰는 것 좀 봐. 나 너무 형편없지?”
할머니는 드라마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귤을 까 입에 넣으며 우물우물 말했다.
“그럼, 형편없지. 근데 세상도 형편없어. 아주 엉망이야. 똥 같아. 그니까 네 맘대로 더 형편없이 굴어도 돼.”
_박지영, 『고독사 워크숍』 22-23쪽
종종 ‘나는 어째서 이 모양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형편없어지는 것을 두려워 말고 똥 같은 세상을 살다 보면 그런대로 나쁘지는 않네 싶은 순간도 온다. 끝까지 지긋지긋해하지 못하고 싱겁게 회복해 버린 것에 실망한 분들에게는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하며, 일신상의 문제로 여기서는 더는 솔직할 수 없으니 이 정도로 마무리한다. 농담이다. 그런 걸로 하자. 진실은 저 너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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