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Culture

[인아영의 잘 읽겠습니다] 연주가 끝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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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이전처럼 일기를 자주 쓰지 않게 된다. 산더미처럼 쌓인 할 일들 사이에서 조용한 시공간을 마련하고 가만히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점점 귀한 일이 되어가는 걸까. 하지만 연말연시의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만나 왁자지껄 떠들다가도 문득 멍해질 때가 있다. 이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에 빠져있으면 그 깜깜한 바다 속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고 허우적거려도 어디에도 닿을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정확히 무엇이 괴로운지 곰곰이 생각해봐도 속 시원히 대답할 수 없고 끝도 바닥도 없는 미로를 헤매는 느낌에... 그럴 땐 문득 일기가 쓰고 싶어진다. 나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누군가에게, 혹은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이에게, 무엇을 말해야 할지는 모르겠는 심정으로도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진다.


천희란의 『자동 피아노』?(창비, 2019)에도 무언가를 말하려는 사람이 있다. 서른다섯 살인 ‘나’는 여기가 어디인지 지금은 언제인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도 알지 못한다. 여기에 온 것은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기억이 나지도 않고 명료한 질문을 할 수도 없다. 분명한 것은 이 꿈같고 지옥 같은 세계 속에 혼자 잠겨있다는 것. 그리고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는 것. 아름답게 조각된 문장들이 긴긴 페이지에 걸쳐 고통스럽게 흘러가는 동안 알 수 있는 사실은, ‘나’가 이야기하려고 했던 바가 죽음이라는 것이다. 거듭되는 의심과 끝없는 고통을 삼키거나 발설하면서, ‘나’의 목소리는 너와 나, 혹은 그녀와 그라는 주어로, 여러 악기의 소리처럼 갈라졌다가도 합쳐진다. 죽음에 대한 충동과 깊은 고독 속에서 무언가를 말하려는 무진한 노력에도, 그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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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자신에 대해 쓰고 싶었다. 단 한번만 그 누구도 아닌 자신에 대해 정확히 쓸 수 있다면, 다시는 쓰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지난한 불행과 고통, 슬픔과 절망, 그로 인한 방황 속에서 찢거나간 존재에 대해 쓰려 했다. 죽음에 대한 불안과 갈망에 대해 쓰려 했다. (...) 그러나 매번 실패한다. 고통의 핵심에 다가가려 하면, 심해를 향해 내던져진 닻처럼 무한정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고통의 무게를 그녀는 감당하지 못했다. 그녀는 어떤 이야기라도 쓸 수 있었지만, 자신에 관해서만큼은 쓸 수 없었다.” (78-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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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애초의 목적에 닿는 데 실패하면서도 이 목소리는 마치 스스로 연주하는 자동 피아노처럼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 깊은 내면을 잠식하고 있는 고통을 논리에 맞게 설명하지는 못하면서도, 그래서 자신의 고통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에 다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쓰는 행위는 끝없이 이어진다. 나와 당신 사이의 절망적일 만큼 아득한 거리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무언가를 쓰는 행위에는 서로의 미약한 음성을 듣는 행위가 놓일 수 있으며, 어쩌면 거기에 아주 조금의 이해가 깃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놓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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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해설을 쓴 음악평론가 신예슬은 자신의 책 『음악의 사물들』?(워크룸프레스, 2019)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스스로 재생되는 자동 피아노는 인간의 연주를 모방한다는 목적을 도달할 수 없지만, 오히려 그 목적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예술 형식으로서의 가능성” , 즉? “사물의 독자적인 가능성”(115쪽)을 지닐 수 있다고. 이 소설에서 자신의 고통과 죽음을 어떻게든 말해보려는 목소리 역시 목적에 도달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영원히 끝나지 않는 독자적이고 아름다운 음악이 되어 책 안에 담긴다. 천희란의 소설답게 무척 정교한 언어로 쓰인 글이기에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악보를 꼼꼼히 감상하듯 느리게 읽는 것을 권유하고 싶다. 아름다운 언어로 작곡된 이 연주가 끝난 후, 오랜만에 내면 깊숙이 들어가 무언가를 쓰는 행위로 이어진다면 더없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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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 피아노천희란 저 | 창비
자기 자신에 갇힌 인물의 끝없이 분열하는 목소리가 죽음을 음악처럼 연주하는 작품으로, 죽음에 대한 욕망과 충동, 이에 맞서는 삶에 대한 열망을 집요하게 그려낸다. 죽음에 대한 깊은 사유와 조각한 듯 정교하게 다듬어진 문장이 특히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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