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껏 본 적 없는 '세련된 광인'의 등장이다. 도화지같이 말간 얼굴에 엷게 띤 미소, 흔들림 없는 동공. 한 손에 쏙 들어올 정도로 작은 거울을 쥔 채 휘파람 불며 머리칼을 매만지기도 한다. 겉보기엔 말쑥하지만 알고 보면 으레 생각하는 광기의 범위를 한참 넘어선 탓에 도통 재단할 수 없다.
영화 '신세계'(2013), '마녀'(2018), '낙원의 밤'(2021), '마녀 파트2. 디 아더 원'(2022)을 만든 박훈정 감독의 신작 '귀공자' 속 귀공자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불가능이다. 지켜보고 있으면 절로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지만 결말에 다다라 원동력을 알고 나면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뀐다.
'코피노'(코리안+필리피노) 마르코(강태주)는 아픈 어머니의 수술비와 약값을 벌기 위해 필리핀 불법 경기장을 옮겨 다니는 복싱 선수다. 어느 날 마르코는 평생 본 적 없는 거부 아버지로부터 큰 돈을 얻을 수 있다며 꼬드기는 무리와 만나 끝내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모두가 잠든 기내, 마르코에게 슬며시 다가와 자신을 '친구'라 소개하는 귀공자(김선호). 이후 마르코는 정체불명의 귀공자를 비롯해 사학재단 이사이자 재벌 2세 한이사(김강우), 필리핀에서 교통사고로 엮였던 윤주(고아라)에게 이유도 모르고 쫓기게 된다.
'귀공자'는 언뜻 박 감독의 전작을 떠올리게 한다. 캐릭터를 둘러싼 필사의 추격은 '낙원의 밤'을 연상시키고 3m는 족히 넘어 보이는 다리에서 뛰어내려도 끄떡없는 귀공자를 접하면 '마녀' 시리즈가 뇌리를 스친다. 다행히 귀공자가 주는 신선함이 기시감을 상쇄한다. 달리는 차 안에서 함박웃음 지으며 방아쇠를 당기거나 타깃을 따라 질주하며 오묘한 환호성을 지르는 귀공자는 기존 장르의 틀을 보기 좋게 깨부순다. 반드시 어둡고 퇴폐적이어야만 '누아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하다.
'귀공자'는 주로 연극 무대와 안방극장에서 활동하던 배우 김선호의 스크린 데뷔작이기도 하다. 김선호는 능청스럽고 역동적이며 변칙적이기까지 한 귀공자를 똑부러지게 그려낸다. '악역 베테랑' 배우 김강우와 비교해도 부족함 없이 특유의 매끈한 매력을 폭발시킨다. 카체이싱, 총기 액션에서도 남다른 존재감을 자랑한다. 후반부 수술방에서 온갖 무기로 적과 대치하는 귀공자의 액션 시퀀스는 이 영화의 백미라 할 만하다. 더불어 "내가 그랬나. 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타깃을 놓쳐 본 적이 없다고", "내가 조만간 또 보자고 했지?" 따위의 대사는 김선호의 입을 거쳐 강한 임팩트를 남긴다.
'마녀', '마녀 파트2. 디 아더 원'으로 각각 배우 김다미, 신시아를 발굴해낸 박 감독이 이번에 선택한 뮤즈는 신예 강태주다. 1,980대1 경쟁률을 뚫고 마르코 역에 선발된 강태주는 실제 복서와 견줄 법한 복싱 기술과 폭넓은 감정 연기, 몸 사리지 않는 액션을 선보이며 확실히 눈도장을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