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숯골원냉면'의 달걀 지단을 얹은 꿩냉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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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평양냉면 한 젓가락을 유쾌하게 맛보기란 쉽지 않다. 1시간 이상 줄을 서는 일은 기본. 몰려드는 손님으로 녹초가 된 종업원의 불친절에 속상하고, 콧대 높은 명가들의 위세에 눌려 주눅이 든다. 신문이고 방송이고 평양냉면 노래를 불러대는데, 소개되는 집들은 죄다 수도권에 몰려 있다. 서울 아닌 곳에 사는 사람들은, 내 고장 단골 냉면집은 왜 빠졌나 섭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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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평양모란봉냉면’집 아들이었다.” 대전 신성동 ‘숯골원냉면’ 주인 박영흥(54)씨가 지난 7일 기자에게 털어놓은 얘기다. ‘평양모란봉냉면’은 ‘김일성의 단골집’으로 알려진, 일제강점기부터 평양에서 유명했던 냉면집이다. 박영흥씨의 아버지 박근성(91)씨는 평양고보 출신으로 한국전쟁이 터지자 홀로 남하했다. 피난민 수용소를 전전하던 그의 귀에 서울에서 음식점으로 크게 성공한 부친의 친구가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곳이 ‘우래옥’이었다. ‘평양모란봉냉면’집 아들이라고 말하자 주인은 선뜻 받아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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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부살이는 금세 싫어졌다. 군에 다녀온 그는 숯골에 터를 잡았다. 숯골은 지금의 신성동, 추목동, 방현동, 신봉동 일대로, 한국전쟁 이후 실향민이 많이 모여 살았다. 숯골 사람들은 메밀을 심어 냉면을 만들어 먹었다. 그걸 눈여겨보던 박근성씨가 부친의 솜씨를 떠올려 1950년대 중반 ‘숯골냉면’을 열었다. 1990년대 중반 아들이 맡으면서 ‘원’을 넣어 ‘숯골원냉면’이 됐다. ‘숯골원냉면’의 역사는 사실 우리나라 평양냉면 명가가 걸어온 역사의 전형이다. 지방 명가인 ’사리원면옥’, ’원미면옥’, ’부산안면옥’, ’대동면옥’, ’서부냉면’도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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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덕에 남한 사람들은 평양냉면의 매력에 푹 빠질 수 있었다. 오죽하면 ‘평뽕족’(뽕 맞은 듯 평양냉면 맛에 중독된 이들), ‘면스플레인’(냉면에 대해 고압적으로 가르치려고 설명하는 자세), ‘냉면교’ 같은 신조어까지 생겼을까. 이런 열기가 처음일까? 아니다. 1910~1920년대 냉면사를 뒤져보면 서울 낙원동 등지에 연 냉면집엔 더운 여름날 세련된 ‘모던 보이’, ‘모던 걸’들이 줄을 서고, 배달 주문까지 들어올 정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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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의 주영하 교수는 “그 무렵, 겨울에 한강의 얼음을 채취해 보관했다가 여름에 아이스크림, 빙수, 냉면 재료로 파는 냉동주식회사가 생겼다. 그게 겨울 음식이었던 냉면이 ‘여름 음식’이 된 결정적인 계기”라고 말한다. 메밀이 나지 않는 여름에 냉면이 인기를 끌자, 면에 고구마나 감자 전분을 섞게 되었다고 주 교수는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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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일본 기업의 엠에스지(MSG·글루탐산나트륨) 판매 전략도 냉면의 인기를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당시 한국에 진출한 일본의 대표적인 엠에스지 판매 회사 아지노모토사는 홍보 도구로 냉면을 활용했다. 냉면집이 몰려 있던 평양을 집중적인 홍보처로 고르고, 1932년 냉면집 32곳을 묶어 ‘평양면미회’를 만들도록 유도했다. 경품 제공 등 판촉행사는 기본이었다. ‘맛있는 맛’을 내주는 엠에스지는 냉면집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원산에서도 ‘원산면미회’가 결성된 데 이어 1938년에는 ‘평양면옥아지노모토회’(19명) 등이 생겨났다. ‘냉면 속 엠에스지’의 역사가 생각보다 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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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면은 오래전부터 우리와 함께했다. <동국세시기>(1849년)에는 ‘겨울철 제철음식으로 메밀국수에 무김치, 배추김치를 넣고 그 위에 돼지고기를 얹어 먹는 냉면’이란 기록이 있다. 조선 중기의 문집 <계곡집>(1643년)에는 ‘자줏빛 국물에 냉면을 말아 먹고’라는 시제가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자줏빛 국물’은 오미자 국물로 추정된다. 한글로 쓴 최초의 조리서인 <음식디미방>(1670년)에도 냉면으로 추정되는 국수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일제강점기에 외식업 메뉴로, 한국전쟁을 거치며 현대사의 기억으로, 이제 덕후를 거느린 ‘중독성 식품’으로, 냉면의 역사는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