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학교 설립한 백미대왕 김종림 .. 1920년 대홍수로 몰락 .. 평생 재기 꿈꾸며 소작농 ..
백미대왕이라고 불리었던 김종림씨는 잉글우드 공원묘지에 묻혀 있다. '종림 김:남편-아버지 1884-1973' 이라고 새겨져 있는 묘비석. |
미주 한인 군사훈련의 가장 중요한 의의라면 상해임시정부와도 직접 관계가 있는 최초의 공군 창립이다. 이러한 공군 창립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북가주 콜루사와 글렌 카운티에서 쌀농사를 하던 김종림의 추진력으로 가능할 수 있었다.
반아시안 감정이 최고였던 시기에 쌀농사로 한인 중 가장 큰 부자가 된 김종림은 백미대왕이라 불렸다. 그는 백인 파트너와 합작회사를 설립하여 성공했다. 당시 아시안 혼자서는 토지 소유 또는 임대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이룬 경제적 성공을 바탕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키워 조국의 독립을 도모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미주 한인들은 공군을 양성해서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꿈을 품고 비행대를 조직했고 상해임시정부의 재가를 얻 어 비행학교를 세웠다. 이 비행학교를 설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김종림이다.
1919년과 1920년은 하와이 멕시코 미국 본토에서 노예 노동자로 착취당하고 있던 미주 한인들이 조국의 통일을 위해 그들의 열정을 불태우던 시기였다. 1919년 3.1운동의 독립 염원이 일본의 총칼에 무너지자 미주 한인들은 더욱 열심히 독립운동에 전념하게 된다. 특히 독립 기금 모금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으며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사훈련도 시작됐다.
1919년 3월부터 1920년 12월까지 7000명의 한인들이 독립 기금 모금 운동에 참여했다. 이렇게 모금된 기금 중 약 20만 달러의 정부 국채도 가능했다.
서울대 초대 총장이었고 주미 대사를 역임한 장리욱 박사는 '잊지 못할 세대'는 글에서 미주 한인들이 독립운동 기금 모금에 동참하며 희생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중 김종림과 쌀농사 한인들이 거액의 애국 독립 기금을 기부했다고 쓰고 있다. 이 기금은 상해임시정부 운영에 쓰였고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과 같은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운동 자금으로도 활용됐다.
남가주대학교(USC)의 동아시아 도서관장인 켄 클라인 박사는 1989년에 발행된 콜루사 카운티 역사책에서 20세기 초반 캘리포니아에는 '10% 계약' 조항이 있었는데 땅 소유주가 90%의 이익을 갖고 소작농은 10%를 받는 계약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김종림은 열심히 일해 백만장자가 된 것이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데이비스 캠퍼스의 역사학과 교수 리처드 김은 김종림이 한 달에 약 3000달러를 2년 동안 꼬박꼬박 기부했다고 밝혔다. 또한 김종림은 비행학교 설립을 위해 비행장을 빌리고 비행기를 구입하는 경비 제반을 혼자서 부담했다고 말했다.
"1919년에 김종림은 이미 백만장자였다. 지금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엄청난 금액이다. 아마도 김종림은 현재 금액으로 백만 달러 이상 기부한 것으로 추산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주 한인들은 연령과 세대에 상관없이 미군에 입대했다. 김종림 역시 고령에도 불구하고 1942년에 캘리포니아 예비군으로 입대했다. 김종림의 두 아들 제임스와 돈도 미 해군에 입대했다. 김종림은 성공한 기업인으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거금을 기부해 비행학교를 설립했다는 좋은 선례를 남겼다. 그러나 오늘날 역사책에서 김종림에 대한 언급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1920년 10월초 김종림의 쌀 농장은 백년 만에 닥친 대홍수로 인해 물에 잠기는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김종림의 후손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하다 안창호의 막내아들 랠프를 만났는데 그는 김종림의 아들 돈과 어린시절 친한 친구였다. 랠프와 돈은 로스앤젤레스 한인 타운에서 함께 자랐다. 어느 여름 랠프와 돈은 1920년대 홍수 이후 김종림이 새로 시작한 농장에서 같이 일했다고 한다.
안창호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랠프는 한번도 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다. 안창호는 1938년에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인해 서대문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랠프 안은 많은 대학교에서 인기 강사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돈은 로스앤젤레스 청과 도매상에서 오랫동안 일했는데 현재 은퇴해 라스베이거스에서 살고 있다. 어린 시절 돈은 랠프의 아버지인 안창호 선생을 무척 존경했다고 하는데 정작 자신의 아버지인 김종림이 어떤 일을 했는지는 잘 알지 못했다.
돈이 아버지 김종림과 랠프에 대해 인터뷰를 했다.
100년 만의 대홍수로 농장이 침수된 후 우리 가족은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해 왔다. 우리 형제들은 모두 윌로스에서 출생했고 나만 혼자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나보다 열다섯 살이 많은 코라 일레인 제임스 그리고 나까지 모두 함께 살았는데 우리는 매우 가난했다. 나는 자정에 일어나서 전철을 타고 로스앤젤레스 서쪽에서 다운타운까지 가서 다시 다른 전철로 갈아 타 샌페드로와 9가에 간 후 또다시 버스를 타고 터미널에서 내려 네 시간 동안 트럭에 짐을 싣는 일을 했다. 일을 마친 후 또다시 온 길을 되돌아가야 했는데 그때 내 나이가 열네 살이었다.
그때는 모두 일을 해야 했다. 어머니는 봉제 공장에서 일했고 다른 일도 닥치는 대로 하면서 고된 삶을 살았다. 아버지는 임페리얼밸리의 농장에서 채소 농사를 짓는 소작농으로 일했기 때문에 집에서 떨어진 곳에서 우리와 따로 지냈다. 아마 어느 누구도 아버지처럼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고 물을 대고 싹이 자라 채소가 되면 수확해서 트럭에 실어 팔았다.
아버지는 1920년 대홍수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 사업을 재건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다. 열심히 일해서 모은 돈으로 조그만 가게를 운영했고 간장 공장과 또 다른 사업도 시작했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아버지는 남은 여생을 소작농으로 살아야 했다. 집에 돈을 부치고 나면 남은 것이 거의 없 는 정말 가난한 소작농 말이다.
아버지는 평생을 걸쳐 항상 농사일을 했고 나는 결혼 후 아쉽게도 아버지를 거의 뵙지 못했다. 아버지는 로스앤젤레스로 내려오지 않았다. 도시 생활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89세까지 일을 했고 91세에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63세로 돌아가셨을 때 공교롭게도 나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와 매우 가까웠기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많이 힘들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머니의 장례식에 오지도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아버지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아버지는 그런 분이었다.
아버지가 양로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아버지를 보면서 이야기를 했으나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곳을 떠난 후 나는 다시 찾아가지 않았다.
이것만은 기억해달라.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사랑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거의 집에 없었고 가까워질 기회가 전혀 없었다. 어머니와 내가 함께 지내면서 가까웠던 것과 정반대다.
아버지의 장례식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아주 오래전 일이다. 아버지는 1973년에 잉글우드 공원묘지에 안장되었고 아버지의 묘에는 비석이 세워졌다. 이승만 대통령을 추종했던 아버지는 동지회의 회원이었다. 아버지가 어린 나를 동지회 모임에 데리고 갔던 기억이 난다. 모임 장소에는 노총각이 살고 있었다. 그는 내게 "너희 아버지는 비행학교를 창설하고 운영한 위대한 애국자란다"라고 말했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 아버지는 이런 일을 했던 분이었다. 나는 그러한 역사를 알지 못했다. 나는 고작 여덟살 혹은 열살이었기 때 문에 아버지의 과거와 역사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머니도 나에게 아버지의 그러한 역사를 알려주지 않았다.
랠프의 아버지 안창호 선생은 우리의 영웅이었다. 장남인 필립은 유명한 영화배우였는데 우리에게 매우 잘해주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나의 형 제임스는 18세에 미 해군에 입대했고 형이 입대한 지 3년 후 나도 해군에 입대했다. 랠프와 하워드도 해군에 같이 입대했다. 제임스는 알류샨 군도 전쟁에서 싸웠고 내가 탄 배는 필리핀에 정착했다가 일본의 항복 후 일본에 입성했다. 미 해군은 제임스를 캘텍에 입학시켜 B-12 프로그램의 전기공학을 전공시켰다. 제임스는 벡텔에서 30년간 근무하고 은퇴했는데 몇 년 전 이 세상을 떠났다. 나의 누나 코라 김은 결혼했다가 지금은 양로원에 있다. 일레인은 어릴 때 병원에서 숨졌다. 나는 두 명의 혼혈 딸들을 입양했으며 이제 그 아이들 모두 커서 결혼했다. 나는 평생을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청과 도매상에서 일하다 은퇴 후 라스베이거스로 이주했고 로스앤젤레스에는 다시 가본 적이 없다.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4814056
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 - 독립운동 지도자들 - 김종림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24584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