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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임금이 조선을 다스리던 시기의 일이다.
채제공의 초상화
정조의 손꼽는 충신으로 그 지위가 좌의정에까지 올랐으며
영의정/우의정이 임명되지 않아 수년 간 유일한 정승(獨相-독상)으로 정무를 처리한 일도 있었다.
좌의정은 조선시대 관료 18품계의 으뜸인 정1품으로 삼정승 가운데서도 가장 실권이 큰 직위였다.
오늘날로 치면 국무총리 혹은 장관 중 으뜸직이라 할 수 있다.
1790년 정조 치세 14년 5월의 어느날 이 좌의정 채제공이 정조에게 사직상소를 올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었을까? 실록의 기록을 쭉 읽어보자.
좌의정(정1품) 채제공이 상소하기를,
"(중략) 유생(儒生)을 잡아가둔 일에 있어서는 모화관으로 거둥하시던 날 신은 병으로 반열에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
돈의문(敦義門) 안으로 들어갔을 때 웃옷을 걸치지 않은 두 사람이 서로 팔을 끼고 교자 곁에 서 있었는데,
한 사람은 부채로 얼굴을 절반쯤 가렸고, 한 사람은 입에 담뱃대를 가로 물고 있었습니다.
대동한 권두(權頭-오늘날 비서/경호직)가 담뱃대를 빼라고 호령하자
담뱃대를 가로 물고 있던 자가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말하기를 ‘내가 무엇 때문에 저 자를 보고 담뱃대를 빼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에 권두는 분개함을 참지 못하고 따르던 하인들을 시켜 그 두 사람을 잡아 가두게 하였는데, 신은 잠자코 있었을 뿐입니다.
집으로 돌아온 다음 전옥서(典獄署)에서 죄수를 보고해왔는데, 그들이 곧 김관순(金觀淳)과 김병성(金炳星)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였으므로 아침이 되면 처결하여 석방하게 하려 하였습니다.
밤 3경쯤 되었을 때 옥리(獄吏)가 급히 고하기를 ‘학당의 유생 수십 명이 지금 옥문을 부수려고 하면서 큰소리로 공갈하기를
「만약 두 사람을 석방하지 않으면 우리들이 전옥서의 관리를 죽이겠다.」고 한다.’ 하였습니다.
신은 그만 놀라서 두 사람을 즉시 형조로 넘겼는데, 다음날 아침에 들으니,
김병성은 곧 돈령부 참봉(종9품) 김세근(金世根)의 아들이고 김관순은 곧 동부 봉사(東部奉事-종8품) 김이의(金履毅)의 아들이었는데,
담뱃대를 물고 패악한 말을 한 자는 바로 김관순이었습니다.
또 들으니, 학당 유생들이 통문을 돌려 아주 심하게 신을 헐뜯고 욕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신이 바야흐로 사유를 갖추어 초기(草記)를 올려 현재 갇힌 자를 엄격히 다스릴 것을 청하려 하고 있을 때
김세근이 신과 친한 사람을 찾아와 보고 매우 진지하게 애걸하였는데 그의 말은 매우 식견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김병성은 애당초 입을 열지 않은 채 부채로 얼굴을 가렸을 뿐이었고 오직 김관순과 함께 팔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함께 갇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즉시 석방하였습니다.
듣건대, 김세근은 돈령부의 수직하던 곳에서 자기 아들을 여러 하인들이 보는 앞에서 볼기를 쳤다고 하니 이는 부형으로서의 책임을 다했다고 이를 만합니다.
사흘이 지난 뒤에 김관순의 늙은 할아비는 신과 친근한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집에 패역한 손자를 두었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에, 근래 사대부들이 자손을 가르침에 전혀 예법으로 아니하여 패악한 짓을 하도록 그대로 방치하고 있으니
하나의 김관순을 다스리고 다스리지 않는 것이 교화에 관계가 없다면 차라리 그 할아비로 하여금 스스로 다스리게 하는 것이 나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신은 그래서 김관순을 또 석방하였는데, 대간의 상소에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 없다.’고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대체로 욕보일 수 없다는 것은 선비로서 공론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 말입니다.
대낮 큰 길가에서 홑옷바람으로 담배를 피워물고 대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에 대하여 누구도 감히 어찌할 수 없다면,
앞으로 선비라는 이름을 걸고 온갖 패려한 짓으로 용서하기 어려운 죄과를 저질러도
조정에 있는 자로서 그것을 보고도 말이 없어야 곧 잘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에서 논한 일은 오히려 작은 일입니다.
상소문 서두에 운운한 말에 있어서는 그에 관해 무신년에 상께서 명백히 하유하신 뒤로
조정 신하로서는 감히 믿지 않을 수 없는 일인데도 그는 거리낌없이 쉽사리 말하였으니,
신이 비난을 받는 것이야 아무런 상관이 없으나 임금의 말에 손상을 줄까 두렵습니다. 슬피 눈물을 흘리는 외에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신은 마음이 너무도 슬프고 처신이 너무도 불안하여 강교(江郊)로 달려나와 밤낮으로 벌책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하로부터 받은 신부(信符)를 그대로 계속 받들고 있는 것은 더욱 사적인 분의로 보아 감히 할 수 없으므로
10일 동안 재계 중이신 전하에게 날마다 신부를 바침으로써 전하를 성가시게 하였으니, 신의 죄가 이에 이르러 더욱 모면할 길이 없습니다.
승선(承宣)을 내보내 함께 오도록 하신 일은 특별한 예우입니다. 신처럼 죄를 진 자가 어찌 감히 이러한 예우를 감당하겠습니까.
신이 현재 맡고 있는 정승의 직책을 빨리 교체하고 이어 신의 전후 죄과를 다스리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중략) 유생들의 일에 대해서는 조정의 기강을 존중하는 원칙에서 특별히 조사해 규명하려 하였는데, 경의 말을 듣고 그 넓은 도량에 감탄하였다.
그리고 그의 할아비와 아비가 이미 매를 때려 가르치고 편지를 보내 애걸하였다고 하니 지금 다시 제기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수십 명의 학당 유생이 밤중에 떼를 지어 옥문 밖에 가서 그와 같은 해괴한 짓을 하여 선비들에게 수치를 준 것이야 어찌 작은 문제이겠는가.
이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모든 유생의 수치를 어떻게 씻겠으며 앞으로 대신이 어떻게 대신의 일을 수행할 수 있겠는가.
묘당으로 하여금 처결할 만한 죄명으로 사리를 따져 품계하게 하라. 이는 경을 위하는 일만이 아니라, 조정을 위해서이며 성균관을 위해서이다.
대개 야금(夜禁)은 법전에만 실려 있을 뿐 아니라 본디 한 벌의 단서(丹書)가 있다.
이 금령은 일찍이 그냥 지나쳐 넘긴 일이 없어 직제학(直提學) 이하는 으레 단속하는 대상에 들어 있다.
그렇다면 어두운 밤에 벼슬도 없는 무리들이 이와 같이 무엄하게 싸다니는 것에 대해 그 사실이 이미 위에까지 알려진 데야 어찌 그것을 소홀히 볼 수 있겠는가.
또한 묘당으로 하여금 그날 밤 순찰한 영문(營門)을 조사하여 일체 초기를 제출하고 제재를 가하게 하겠다.
이밖의 여러 문제는 한번의 비답으로 다할 일이 아니며 더구나 결심하고 있는 것은
경을 기어이 출사하게 하고야 말겠다는 것이니 경은 모름지기 이 뜻을 이해하고 당일로 입성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그날 전옥서에 남아 있던 관리들을 불러 물어보았더니,
그날 인정종(人定鍾)이 있은 후 학당 유생 10여 명이 본서의 대문 밖에 와서 말하기를
‘갇혀 있는 유생은 곧 중부학당의 장의(掌議)이며 또 소청(疏廳)의 담당자이다.
너의 관원에게 말하고 대신에게 말을 전달하여 석방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하기에, 입직관(入直官)에게 말하였더니,
입직관의 말이 ‘대신이 가둔 사람이라 감히 멋대로 석방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내용을 학당 유생들에게 말하였으나 학당 유생들은 오랫동안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앞뒤 분간 못하고 나댄 사람 평생 공시 금지...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