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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의 문화사

비욘세♥ 0 868 2018.08.02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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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러나겠나이다. 허락해주시옵소서,”
 1790년(정조 14년) 5월22일, 좌의정 채제공(1720~1799년)이 정조 임금에게 돌연 사의를 표명한다. 요컨대 “정승짓 못해먹겠다”는 것이었다. 
 무엇이 그토록 명재상의 분노를 샀을까. 채제공의 하소연을 토대로 ‘채제공 굴욕사건’의 전말을 더듬어보자.
 어느 날 채제공은 권두(權頭·비서)와 함께 돈의문(서대문)을 통과해 가고 있었다. 웃옷도 걸치지 않은 두 사람이 서로 팔을 끼고 가마 옆에 서 있었다. 한 사람은 부채로 얼굴을 절반쯤 가렸고. 한 사람은 담뱃대를 꼰아 물고 있었다. 꼴 사나운 그 모습을 본 권두가 한마디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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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숙의 ‘수계도권’. 선비들의 모임에 담배가 사교의 도구로 애용되고 있는 장면이다.

■‘어디서 지적질이야!’ 
 “이봐, 자네. 담뱃대 좀 빼지. 좌정승 대감이 지나가는데 건방지게….”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담뱃대를 물고 있던 청년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러면서 험악한 표정으로 고희를 넘긴 채제공의 이름을 부르더니….
 “내가 뭣때문에 저 자를 보고 담뱃대를 뺀단 말인가.(吾豈見渠而去竹乎)”
 갑작스런 반격에 채제공은 ‘멘붕’에 빠졌다. 분개한 권두가 뒤따르던 하인들에게 명했다.
 “저 저 저 놈들을 잡아라!”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채제공의 비서가 하인들을 시켜 두 청년을 옥에 가뒀다. 채재공은 어이가 없어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한채 집으로 돌아왔다. 곧바로 전옥서(典獄署·구치소)에서 두 청년의 신원을 알려왔다.
 김병성과 김관순이었다. 김병성은 돈령부 참봉 김세근의 아들이었고, 김관순은 동부봉사 김이의의 아들이었다. 채제공에게 패악을 부린 청년은 바로 김관순이었다. 
 채제공은 하룻밤만 이들을 붙잡아놓고 다음날 아침에 풀어줄 요량이었다. 그런데 사건이 심상찮게 돌아갔다. 3경 쯤(밤 11시~새벽 1시 사이)되었을 때였다. 학당의 유생 수십명이 옥사 앞에 몰려온 것이었다. 이들은 옥문을 때려 부술 기세로 과격한 농성을 벌였다.

 ■“패역한 손자를 두었습니다.”
 “만약 두 사람을 석방하지 않으면 전옥서의 관리를 죽이겠다.” “우리가 옥문 자물쇠를 부수고 빼앗아 간다면 어쩔거냐.” 
 소식을 들은 채제공은 두 청년을 형조로 넘겼다. 다음 날부터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유생들이 채제공을 욕하고 헐뜯는 사발통문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채제공은 이들을 정식으로 고발해서 엄히 다스릴 작정을 했다. 그 때 문제청년 김병성의 아버지인 김세근이 채제공을 찾아와 백배사죄했다. 더구나 김세근은 여러 하인들이 보는 앞에서 아들의 볼기를 쳐 잘못을 꾸짖었다. 사실 김세근의 아들 김병성은 부채로 얼굴을 가렸을 뿐이었다. 채제공은 책임을 다한 아버지의 얼굴을 보아 아들 김병성의 죄를 용서해주었다.
 사흘 뒤, 담뱃대를 꼬나물고 채제공을 욕보인 장본인인 김관순의 할아버지가 인편으로 편지를 보내왔다. 
 “우리 가문에 패역한 손자를 두었습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할아버지까지 나서 용서를 비는 형국이니, 용서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건은 잦아들지 않았다. 채제공을 비난하는 상소가 계속 올라온 것이다.
 “채제공이 유생들을 욕보였습니다. 선비(유생)는 죽일 수 있어도 욕보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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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의 <연소답청>. 말을 탄채 담배를 물고 가는 여인네의 모습. |간송미술관

■재상을 욕보인 담배청년 
 채제공은 이 대목에서 깊은 한숨을 쉬면서 정조 임금에게 하소연한다. 
 “세상에! 대낮 큰 길가에서 홀옷 차림으로 담뱃대를 피워물고 대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어찌 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앞으로 선비라는 이름으로 온갖 패악질을 해도 가만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채제공은 너무 실망한 나머지 사의를 표하고 조정을 떠났다. 정조는 채제공을 달래는데 진땀을 빼면서 한편으로는 “그야말로 한심한 세상”이라고 한탄했다. 정조는 무리를 지어 전옥서로 몰려가 행패를 부린 주동자 및 가담자들을 엄벌에 처했다. 주동자는 ‘종신 과거시험 응시 금지령’의 중벌을 받았다. 또 가담자 4명에게는 ‘10년 과거 금지령’을 내렸다.(<정조실록>) 
 요즘으로 치면 총리가 길을 지나다가 담배를 피우던 중고생들을 지적하자, 또래 학생들이 떼로 몰려가 난동을 부린 사건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다. 유교국가라는 조선, 그것도 중흥군주의 시대라는 정조 시대에 이런 패륜의 행태가 벌어지다니….

 ■정조의 담배 사랑
 그런데 패륜의 단서가 된 것이 바로 당대 유행했던 담배였음을 알 수 있다. 임금인 정조까지도 담배의 맛에 흠뻑 빠졌으니 무슨 할 말이 있으랴. 
 “사람에게 유익한 것은 남령초(담배)만한 것이 없다. ~이 풀이 아니면 답답한 속을 풀지 못하고 꽉 막힌 심정을 뚫어주지 못한다. ~담배를 백성들에게 베풀어줌으로써 그 혜택을 함께 하고자 한다.”
 정조는 ‘담배 예찬론’을 설파하는 것도 모자라 온 백성들을 흡연가로 만들겠다고 했다. 사석에서 한 말이 아니다. 
 1796년 11월 18일, 정조는 책문(策文·정치의 대책을 물어 답하게 하는 과거시험)의 시제로 남령초(南靈草), 즉 ‘담배’를 내걸었다. 수험생들에게 담배의 유용성을 논하라는 것이었다. 정조는 한술 더 떠 담배를 실사구시의 예로 꼽고 있다. 
 “물건(담배)을 이롭게 사용하고, 생활에 윤택한가를 따지면 그 뿐이다. 유독 담배만 천한 것으로 여길 까닭이 있는가.”
 정조는 경험에서 우러난 담배의 효험을 조목조목 밝힌다.
 “난 수십년간 책을 읽는 고질병에 시달린 데다 왕좌에 오른 뒤 정무에 전념하느라 병이 깊어졌다. 백방으로 약을 썼지만, 담배만한 약이 없었다. 정사의 잘잘못과 복잡한 심경을 분명하게 잡아내고, 요점을 찾아낸 것도 담배의 힘이다. 원고를 수정할 때도 담배의 힘이 크다.”
 좀 과장되게 말한다면 정조의 개혁정치와 탕평책, 그리고 문체반정 등 모든 치적이 담배 덕분이라는 것이다. 정조는 아예 “담배가 이 시대에 출현한 것은 인간을 사랑하는 천지의 마음에서 비롯됐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면서 “온 백성이 담배를 피도록 해서 그 효과를 확산시켜 담배를 베풀어 준 천지의 마음에 보답하자”고 역설한다. 임금이 앞장서서 범 국민적인 흡연운동을 벌이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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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산 풍속도에 나오는 ‘부화랑거(負花娘去)’. 남성이 담뱃대를 꼬나문 어린 여인을 등에 업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담배가 어린 여성에게도 폭넓게 퍼져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 숭실대박물관 제공

■조선을 담배의 나라로

1600년 무렵 일본을 통해 조선에 들어온 담배는 단박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담(痰)을 치료하고 소화에 도움을 준다고 했다. 쓰고 맵고, 독성이 가하지만 가슴에 얹힌 것을 치료한다는 것이다. 또 목구멍에 가래가 생기고 심사가 좋지 않은 증세, 그리고 일체의 근심을 치료하는 효능이 있다고 했다. 심지어 이옥(李鈺·1760~1815)이라는 애연가는 ‘담배의 경전’을 뜻하는 <연경(烟經)>을 지을 정도였다.
 하루는 이옥이 전북 완주의 송광사 법당 안에서 담배를 피웠다. 그러자 스님이 “법당에서 연기를 피우면 안된다”고 제지했다. 이옥의 답변이 걸작이었다.
 “부처님 앞에는 향로가 있지 않습니까. 향의 연기도 연기요, 담배 연기도 연기입니다. 사물이 변해서 연기가 되고, 연기가 바뀌어 무(無)가 되는 것은 똑같지 않습니까.”
 <연경>에는 담배 피우는 예절이 나온다. . 
 입술로 풀무질 해서 열었다 닫았다, 즉 ‘뻐끔담배’를 피우면 안된다는 것이다. 또 어린아이가 젖 빨듯해서도, 물고기가 물거품을 뿜어내서도 안된다고 했다. 박지원의 풍자소설 <양반전>에는 “양반은 볼이 움푹 패도록 빨지 말아야 한다(吸煙毋輔)”는 내용이 들어 있다. 
 애연가들이 담배를 피울 때의 핑계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1)식후에 피우면 위가 편안해진다. 2)새벽에 일어나 입안이 텁텁할 때 피우면 씻은 듯 가신다. 3)시름이 많고 생각이 어지러울 때 피우면 술을 마신 듯 가슴이 씻은 듯하다. 4)과음으로 간에 열이 날 때 피우면 답답한 폐가 풀린다. 5)싯구가 생각이 나지 않아 수염을 비비 꼬고, 붓을 물어뜯을 때 피우면 연기를 따라 절로 시(詩)가 나온다. 6)뒷간에 앉아있을 때 피우면 똥냄새를 없애준다….” 

 ■조선을 중독시킨‘요망한 풀’
 17세기 초 조선에 들어온 담배는 <인조실록>의 표현대로 ‘요초’(妖草), 즉 ‘요망한 풀’이었다. 조선사회를 일거에 중독시켰기 때문이었다. 
 “유해하다는 것을 알고 끊으려 해도 끝내 끊지 못한다. 세상에서 요망한 풀이라 했다.(世稱妖草)”(<인조실록>)
 오죽했으면 담배를 뇌물로 벼슬을 샀다가 파직되는 사례도 생겼다.
 “숙종 3년(1677년) 무인 서치(徐穉)가 담배 1태(태·짐)를 이조판서 민점의 사위에게 주고 감찰에 제수됐다가 파직됐다.”(<숙종실록>) 
 1808년 순조 임금의 한탄을 들으면 담배가 얼마나 뿌리깊게 퍼졌는지를 알 수 있다.
 “근래에 들어 담배의 속습이 고질이 되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다. 심지어는 젖먹이를 면하면 으레 담배를 피우고 있다.”(<순조실록>)
 금연운동가인 이덕리(1728~?)은 담배가 백해무익한 이유를 조목조목 따진다. 
 “진기가 소모되고, 눈이 침침해진다. 옷가지와 서책이 더러워지고, 불씨 때문에 불이 날 수 있다. 치아가 더러워지고 위아래의 예법이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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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의 ‘소년전홍(少年剪紅)’.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 이웃집 아낙을 유혹하는 장면이다. 소년티가 완연한 청년은 담배를 꼬나물고 있다.|간송미술관

■담배의 폐해
 그 때까지 담배가 얼마나 건강을 해치는 지는 잘 몰랐던 것 같다. 조선 중기의 학자 이현목의 <담파고사연>에도 “담배가 이로운지 해로운지 처음부터 몰랐는데도 사람들이 즐긴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다만 심상치 않은 대목이 이현목의 언급에 들어있다.
 “얼마 전에 죽은 승려의 다비식이 있었는데, 검은 기름이 응결되어 머리뼈 중간에 달려 있었다. 크기가 달걀 같았다. 많은 이들이 ‘이 스님은 평생 담배를 즐겼다’고 증언했다. 분명 독한 기운이 몸 안에서 뭉친 결과가 아닐까. 그리고 어떤 이가 담배 때문에 병을 얻었다는 말을 듣고는 담배를 끊었다. 그랬더니 걷기가 수월해졌다.”
 사람들이 담배의 유해성을 어렴풋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윤기(1741~1826)는 <무명자집(無名子集)>에서 “담배가 조선사회를 병들게 한다”고 한탄한다.
 “10살만 되면 담배를 피운다. 아들과 아우가 아버지와 형 앞에서 담배를 물고 있다. 그런데도 어느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세상의 도리가 망가지게 된 것이 이 보잘 것 없는 풀 하나로 말미암을 줄이야.”
 담배로 인한 화재도 심심치 않았다. 1623년에는 “동래 왜관에 왜인들의 담뱃불로 인해 화재가 발생, 80칸을 모두 태웠다”는 기록(<광해군일기>)이 있다. 재실근처에서 담배를 피우다 실화를 일으킨 관리가 파직되고, 사직단 근처에서 역시 담배를 피우다 적발된 관리들이 처벌받기도 했다.

 ■불쌍한 흡연자들 
 담배소비가 급증하자 너도 나도 담배를 경작하는 바람에 벼와 밭의 경작지가 크게 줄어드는 폐해도 생겼다. 
 정조 22년(1789년), 무려 27명이 ‘담배의 경작을 법으로 제한해달라’는 상소문에 서명했다. 
 “기름진 땅은 모두 담배와 차를 심는 밭이 되었나이다. 곡식을 생산하는 토지가 줄고 백성들의 어려움이 극에 달하고 있사옵니다. 담배의 해로움이 극심한 바~”(<정조실록>)
 전국 방방곡곡에 담배재배 선풍이 불자 신하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었다. 하지만 ‘골초대왕’ 정조임금은 “그것은 전적으로 각 지방의 감사에게 달려있는 일”이라고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일국의 지도자가 앞장서서 흡연을 강조하고 ‘모든 백성을 담배로 교화하리라’고 다짐했던 200년 전 그 시절. 당시에도 ‘흡연은 백해무익하다’며 금연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애연가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예컨대 이덕리(1728~?)는 “엄청난 돈이 담배연기로 다 허공으로 날라간다”면서 금연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그와 논쟁을 벌였다는 손님은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무리 떠들어보십시요.) 담배 피우는 자가 많은데 어느 누가 담배를 피우는 통쾌함을 버리겠습니까.”(이덕리의 <기연다(記烟茶)>에서)
 그러나 이젠 이런 큰소리가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큰소리 치던 흡연가들은 어디에 있는가. 집에서, 사무실에서, 아니 이제는 건물에서까지 쫓겨난 그들…. 그것도 어두컴컴한 거리의 한 구석, 빌딩 뒤편에서 삼삼오오 모여 쫓기듯 담배를 빡빡 피우는 모습…. 애처롭기만 하다. 정조대왕을 모셔올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 참에 담배를 확 끊어버리는 것이 좋을 듯 싶다. 무엇보다 정말로 건강에 해롭다지 않은가.
경향신문 문화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참고자료>
 이옥, <연경, 담배의 모든 것>, 안대회 옮김, 휴머니스트, 2008년
 샌더 길먼·저우 쉰 외, <흡연의 문화사>, 이수영 옮김, 이마고, 2006년 
 이언 게이틀리, <담배와 문명>, 정성묵·이종찬 옮김, 몸과마음,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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