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영천 인종대왕 태실』 보물 지정 예고
문화재청(청장 최응천)은 23일 경상북도 영천시에 위치한 「영천 인종대왕 태실(永川 仁宗大王 胎室)」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예고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자손이 태어날 때 태(胎)를 깨끗이 씻어 태항아리에 봉안하였다. 그 후, ▲ 태항아리를 봉안할 장소를 정하고, ▲ 궁궐에서 태를 옮긴다는 의미의 태봉출(胎奉出) 의례를 행한 후, ▲ 태항아리를 모신 행렬이 태봉지에 도착하면, 지방관의 지원을 받아 태를 봉안하였다.
『영천 인종대왕 태실』은 조선 12대 임금인 인종대왕이 태어난 지 6년이 지난 1521년(중종 16)에 의례에 따라 건립되었으며, 태를 봉안한 태실(胎室)과 1546년(명종 1) 가봉(加封) 때 세운 비석 1기로 이루어져 있다. 인종은 임금으로 즉위한 이후 재위 기간이 짧아 곧바로 가봉하지 못하였다.
* 가봉(加封): 자손이 왕위에 오를 때 태실의 위엄을 더하기 위해 격식을 높이는 것
* 인종(仁宗): 조선 제12대 임금, 재위기간 1544년 11월 28일~1545년 8월 3일(음력, 9개월)
인종대왕 태실은 태실봉 정상부에 비교적 넓게 형성된 편평한 대지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왕실 의궤에 묘사된 격식에 따라 전체 평면은 8각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앙에 태가 안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중동석(中童石)을 놓았다.
바닥에는 중동석을 중심으로 방사형의 판석이 여러 매 놓여 있으며, 태실의 가장자리에는 석조 난간을 둘렀는데, 이러한 형식은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태실의 양식이다. 가봉비(加封碑)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인 귀부(龜趺), 몸체인 비신(碑身), 비신 위에 놓인 장식인 이수(?首)로 구성하고 있다. 비신 앞면에는 ‘仁宗大王胎室’(인종대왕태실), 후면에는 ‘嘉靖二十五年五月日建’[가정25년(1546년)5월일건]이라고 새겨져 있어, 태실의 주인과 태실비 건립 시기를 알 수 있다.
* 중동석(中童石): 태실 조성시 사용된 사각 받침석 위에 올린 동그란 돌
인종대왕 태실은, ▲ 1680년에 파손된 부분에 대한 수리를 거쳐 1711년에 태실비가 재건되면서 태실로서의 격식을 되찾았고, ▲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태항아리와 태지석 등이 고양 서삼릉으로 옮겨졌다. 이후 태실은 방치되었다가, ▲ 1960~70년대 매몰된 석재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 1999년 발굴조사를 진행하여 2007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원형을 회복하였다.
* 태지석(胎誌石): 태의 주인에 대한 인적사항이나 태실의 소재를 기록하여 묻은 돌이나 도판
인종대왕 태실은 조선시대 태실 의궤에 따른 격식을 갖추고 있으며, 태실의 규모가 크고 석물의 치석기법이 우수하다. 또한 설치 과정과 내력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전해져,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기술적 가치가 높다. 태실은 가봉된 이후 파손된 적도 있었으나, 처음 설치되었던 원 위치에서 비교적 원형이 잘 유지되고 있으며,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볼 때, 인종대왕 태실은 국가지정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판단된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보물로 지정 예고한 「영천 인종대왕 태실(永川 仁宗大王 胎室)」에 대하여 30일간의 예고 기간 중 수렴된 의견을 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 심의 절차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할 예정이다.
< 인종 태실 원경 >
[자료제공 :(www.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