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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이 빼앗은 옥새를 들고 간 경술국치의 현장은?

일제 당시의 통감관저터

일제 당시의 통감관저 터

정명섭의 서울 재발견 (55) 통감관저 터

우리가 조선총독부는 경복궁 앞을 흉물스럽게 차지하고 있다가 1996년 철거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장소에 조선총독부가 있기 이전 일본은 남산 자락에 총독부와 통감부를 가지고 있었다.

개항 이후 한성에 들어온 일본 세력은 남산 자락에 모여들었다. 조선시대 내내 진고개라고 불리면서 가난하고 자존심 강한 선비들이 모여 살던 남산은 삽시간에 일본공사관을 비롯해서 일본인들의 상점들이 들어서면서 별천지로 바뀌었다.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일본은 대한제국의 내정에 본격적으로 간섭할 통감부를 지금의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 자리에 세웠다. 그리고 기존에 있던 공사관은 통감부를 책임지는 통감의 관저로 사용한다.

이곳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1910년 8월 22일, 순종을 윽박질러서 반 강제로 옥새를 빼앗은 총리대신 이완용이 통감관저로 와서 제2대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대한제국의 주권을 넘기는 조약을 체결했다는 점이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중명전이 잘 보존되고 알려져 있던 반면, 더 치욕스러운 경술국치의 현장은 우리 기억 속에서 잊혀져버린 셈이다.

충무로역이나 명동역에서 내려서 걸으면 5분도 걸리지 않는 곳에 있는 이곳이 잊어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광복 후에 남산 일대에 중앙정보부와 안전기획부가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서슬퍼런 독재가 이어지던 시기에는 남산은 불길하고 쳐다보지도 말아야 할 곳이었다. 통감부를 비롯한 통감관저도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다. 다행히 뒤늦게나마 통감관저의 위치가 확인되면서 기억하기 위한 여러 가지 작업들이 이뤄진다.

통감관저 터 비석(좌) 거꾸로 세워진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 잔해(우)

통감관저 터 비석(좌) 거꾸로 세워진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 잔해(우)

가장 먼저 생긴 것은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이해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세운 비석이었다. 그리고 조선을 집어삼킨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외교관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 잔해들을 모아서 거꾸로 박아버렸다. 그 다음에 생긴 것은 일본에게 희생당한 위안부를 기리는 공간으로 조성된 기억의 터였다. 눈동자와 눈꺼풀을 형상화한 조형물에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이름과 이 공간을 조성하는데 힘을 보탠 사람들의 이름이 같이 적혀있다.

나는 종종 역사에 압도당할 때가 있는데 바로 이곳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더 없이 아름다운 남산이 이렇게 아프고 치욕스러운 역사가 담겨있고, 대부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아픈 역사를 기억하지 않으면 반복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잊지 않는다면 이곳을 더 많이, 그리고 뼈저리게 기억해야 할 것이다.

‘내 손안에 서울’에서는 매주 월요일(발행일 기준) ‘서울 재발견’이란 제목으로 정명섭 소설가가 서울 구석구석 숨어 있거나, 스쳐 지나치기 쉬운, 우리가 미처 몰랐던 보물 같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정명섭은 왕성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역사를 들여다보며 역사소설과 인문서 등을 쓰고 있으며, <일제의 흔적을 걷다>라는 답사 관련 인문서를 출간한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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