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역사 쓴 기생충? 50년대 한국영화는 이랬다!
한국 영화는 ‘기생충’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전 세계 영화인들이 대한민국 영화에 열광하고 있다. 그 배경에는 한국영화 100년의 역사 속에서 노력한 영화인들의 힘이 모여서 지금의 기생충 광풍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 한국영화가 제작된 지 100년을 기념해 ‘1950년대 한국영화, 새로운 시대를 열다’ 전시를 이달?29일까지 진행한다. ‘한국영화의 성장기’라 불리는 1950년대 중후반의 한국영화 관련 소장 자료로 마련된?특별전이다.
전시는 1부 <시대의 거울, 영화>, 2부 <다양한 장르의 등장>, 3부 <한국 최초> 구성되어 있다.
50년대 중후반은 광복 직후의 혼란과 6?25전쟁의 폐허 속에서 한국영화는 양적?질적으로 급성장한 때이다.?당시 제작편수가 100편대로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대규모 촬영소가 설립되어 본격적인 영화제작 시스템이 갖추어지기 시작해 영화사적 의미가 크다. 한국영화 최초의 국제영화제 수상작이 나오고, 최초의 여성 감독이 등장했으며, 한국의 할리우드라고 불린 충무로가 형성된 것도 이 시기이다.
주목할 만한 영화로는 ‘춘향전’을 들 수 있다.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은 2개월간의 장기 흥행 기록을 세우며 18만?관객을 동원했다. 한국전쟁 직후 서울 인구가 180만여 명이었으니?실로 엄청난 기록이다. 한국영화 도약의 신호탄으로 한국영화가 본격적으로 상업성과 대중성, 오락성을 추구하는 길로 나아가는 발판이 됐다.
이 영화의 성공에 힘입어 1957년 김향 감독의 ‘대 춘향전’, 1958년 안종화 감독의 ‘춘향전’, 1959년 이경춘 감독의 ‘탈선 춘향전’이 만들어졌다. 한국인들에게 가장 많이 사랑 받아온 고전 소설로?춘향전의 기본 줄거리는 같지만, 부분적으로 내용이 다른 이본이 120여 종에 달한다고 한다. 이는 단순한 전래 이야기가 아니라 시대를 초월해 우리 민족의 정서를 대변하고 함께 울고 웃었던 이야기인 것이다.
또 영화는 시대의 거울이 되어주었다. 50년대 중후반, 사회는 전후의 어려움으로 어두움이 일상에 드리워져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새 출발에 대한 희망과 새로운 에너지가 샘솟던 시기였다. 또한 서구식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문화가 들어왔다. 사람들은 강조되었던 집단의 목소리와 이념보다는 개인의 목소리와 자아에 관심을 갖게 됐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진 사회 분위기 속에서 기존의 계몽성을 탈피하여 상업성, 대중성, 오락성을 본격적으로 추구하기 시작했고, 나아가 개성과 예술성을 담은 새로운 형식 영화가 제작됐다. ‘피아골’(1955), ‘자유부인’(1956)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탄생하여 한국영화 성장의 시작을 알렸다.
전창근 감독의 ‘고종황제와 의사안중근’도 빼놓을?수 없는 화제작이다.?전 감독이 직접 주역(안중근)을 겸했고, 국내 최고의 제작비와 큰 스케일로 영화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부터 화제가 됐다. 촬영소에는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장소인 하얼빈 역이 300여 평 규모의 세트로 세워졌다. 출연진과 제작진은 총 300여 명, 연 인원 2만 명이 동원되었다. 제작비는 한국영화 3편을 제작할 수 있는 규모이고, 촬영 장소는 서울, 신천(信川), 소련 연해주 남부의 도시 블라디보스토크, 하얼빈, 회령, 뤼순 등 10여 군데가 넘는다.
1959년 서울시 교육위원의 집계에 따르면 한국영화 흥행 순위 5위로 27일간 상영에 관객 10만 명 이상을 동원해 흥행에서도 성공했다. 제2회 문교부 우수국산영화상 우수작품 장려상, 미술상(박석인)을 수상했고, 제1회 한국영화예술상(월간 「영화예술」주최) 여우조연상(황정순) 등을?수상하기도 했다.
50년대 중후반에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진 시대 분위기를 타고 다양한 장르의 영화가 제작됐다. 영화가 ‘민중 계몽’의 도구로 여겨졌던 과거와 달리, 영화가 가진 상업성이 부각되면서 ‘대중적 오락’으로서의 특성에 주목하였고, 그 결과 시대극(사극), 멜로를 비롯한 도시현대극, 코미디, 범죄?스릴러, 현실비판적 사회물 등의 장르가 시도됐다.
다양한 장르가 등장하며 시대극(사극), 멜로를 비롯한 도시현대극, 코미디, 범죄 스릴러, 현실 비판적 사회물이 영화시장에?선보였다. ?
1956년 제작된 30편 중 절반 이상인 16편이 시대극일 정도였다. 당시 유행했던 시대극의 특징은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정통 사극보다는, 역사적 사건은 배경일 뿐 주로 등장인물 개인의 일생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가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집단적 역사보다 개인의 이야기에 주목하는 이러한 경향을 통해 이전 시대와는 달라진 사회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자유부인’(1956)을 시작으로 멜로드라마는 50년대 가장 대중적인 장르로 자리 잡았다. 기존에도 신파와 같은 통속극은 있었지만, 50년대 중후반의 현대극은 격변기의 시대풍조를 반영하여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다. 보수적인 관습과 개방적인?시대 흐름?사이의 갈등은 멜로드라마의?주 된?줄거리이며, 중요 등장인물은 전근대적인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주인공은 종종 부러움의 대상인 동시에 처벌의 대상으로 그려졌다.
희극영화는 50년대 본격적으로 시작된 장르로 주목할 만하며, 빠르게 변화하는 당대의 일상을 특유의 현실 풍자와 해학으로 만들어내 대중들의 공감을 얻었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확산에 따라 50년대 희극영화에는 자신의 목소리를 솔직하고 자유롭게 드러내는 다양한 세대, 성별, 계층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희극영화의 경쾌하고 밝은 분위기를 통해 어두웠던 이전 시대의 한국영화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50년대의 희망적 분위기가 엿보인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내 명화극장에서는 실제로 주마다 영화가 상영 중이다. 궁금한 영화가 있으면 상영 중인 영화의 전편은 한국 영화데이터베이스 홈페이지 VOD 서비스를 통해 감상할 수 있다.
50년대에는 ‘한국 최초’의 영예를 얻은 영화들이 다수 등장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감독이 ‘미망인’(1955)으로 등장했고, 이병일의 ‘시집가는 날’(1956)은 1957년 제4회 아세아영화제에서 특별 희극상을 수상하여 한국영화 최초로 국제영화제 수상작이다. 같은 해 베를린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했다.
전창근의 ‘이국정원’(1957)은 최초의 한국·홍콩 합작영화로, 이후 다양한 공동제작의 시작이 됐다. 1957년 수도영화사가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을 본떠 동양최대 규모의 촬영소를 건립하고, 한국 최초의 와이드 스크린 영화인 ‘생명’(1958)을 제작했다. 세계 최초의 와이드 스크린 영화는 1953년 제작된 할리우드 영화 [성의] 이다. 우리나라 역시 5년 후 와이드 스크린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 이로써 한국영화계는 대형 화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기생충이 아카데미 4관왕 쾌거를 이루고 연일 화제가 되고 있는 지금, 주말 나들이로 한국영화의 성장기를 돌아볼 수 있는 특별전을 관람해보는 건 어떨까. ?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위치 : 서울시 종로구 세종대로 198
○ 관람시간?: 매일 10:00 ~ 18:00 (수, 토?21:00까지 개장)
○ 휴관일 : 1월 1일, 설날, 추석
○?입장료?: 무료
○ 홈페이지 : http://www.much.go.kr
○ 문의?: 02-3703-9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