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서소문 순례길을 걷다!
2018년 9월, ‘해설이 있는 서울 순례길’의 문이 열렸다.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교황청 공식 국제순례지로 선포된 ‘천주교 서울 순례길’의 일부와 주변의 유서 깊은 명소들을 연계해 개발한 이 길은 북촌 순례길, 서소문 순례길, 한강 순례길을 포함하고 있다.
서소문 순례길은 명동대성당-성공회 주교좌성당-서울시립미술관-서소문역사공원-약현성당으로 이어지는 약 4.5킬로미터의 길이다 ⓒ이선미
서소문 순례길은 원래 명동대성당이 출발점이지만 기자는 서소문역사공원에서 순례를 시작했다. 코로나19 상황이 생활 속 거리두기로 전환되면서 서소문공원도 지난 6일부터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박물관과 갤러리, 순례자를 위한 미사도 재개되었다.
지난해 문을 연 서소문역사공원이 첫 봄을 맞고 있다. 순교자현양탑 주변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다 ⓒ이선미
입구에서 열 체크를 하고 방문자 명단을 작성한 후 박물관을 돌아보았다. 조선시대에 ‘서소문 밖 네거리’ 형장이었던 곳이 이제는 도심 속의 평화로운 공원이 되었다. 첫 봄을 맞은 서소문역사공원의 모습이 싱그럽다.
서소문역사공원은 멋진 사진을 얻을 수 있는 출사지로도 소문이 났다 ⓒ이선미
박물관은 열 체크를 하고 이름을 쓴 후 입장할 수 있다. 내부에도 코로나19 주의사항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선미
장미꽃이 화사하게 피고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리는 공원을 뒤로하고 중림동 성당으로 향했다. 서소문 밖 형장이 내려다보이던 언덕은 약초가 많이 자란다고 해서 ‘약초고개’, 즉 ‘약현’으로 불리던 곳이었다. 1891년 명동성당에 이어 서울에서 두 번째로 지어졌던 약현성당은 1998년 방화로 본당 내부가 완전히 타버렸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약현성당은 1998년 방화로 큰 피해를 입었다가 복원되었다 ⓒ이선미
많은 이들의 염려와 수고로 2년 만에 옛 모습과 가깝게 복원되었다. 복원된 성당을 바라보며 다시는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코로나19 때문에 약현성당의 본당 문이 닫혀있었다. 본당을 들어가지 못한 아쉬움을 언덕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전해오는 꽃향기가 달래 준다.
하루빨리 코로나19 상황이 종식되어 정동극장에서 준비한 작품들이 시민들과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선미
1885년 세워져 일제강점기에는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었던 정동제일교회에서 1920년 유관순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이선미
발길을 돌려 정동길을 거슬러 걸었다.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에 등장하는 그 길이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하지만 정동교회 역시 입구에 코로나19로 인한 출입 금지 문구를 써 붙여 놓았다. 1885년 지어진 정동교회는 3.1 만세 운동에 모든 교인들이 함께해 일제의 탄압을 받기도 했다. 당시 교회 안 오르간 뒤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기도 했던 이곳에서 1920년에는 유관순의 장례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바로 맞은편, 정동길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서울시립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1920년대 건축양식이 그대로 보존된 미술관 전면이 옛 향취를 간직하고 있었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다가 시청 서소문 청사에 올라가 덕수궁과 성공회성당의 푸릇한 풍경을 바라보고 싶었다. 그러나 전망대 역시 코로나19로 인해 올라갈 수 없었다.
1988년 개관한 서울시립미술관은 옛 대법원 건물의 파사드는 그대로 보존하며 신축했다 ⓒ이선미
아쉬운 마음을 안고, 단아한 외양 때문에 늘 편안한 기분이 드는 성공회성당에 들어섰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5호인 이곳은 지붕의 기와와 대성당의 창호, 오방색과 같은 전통적 요소를 절충해 1926년 우리나라 최초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체신국’ 청사였던 국세청 건물에 가려져 있다가 ‘역사문화 특화공간 조성사업’으로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게 된 곳이었다. 성공회는 영국 국교회로 우리나라에는 1890년 고요한 주교가 인천항으로 들어오면서 선교가 시작되었다. 스스로를 ‘개혁된 가톨릭’, ‘교리에 너그러운 정교회’, ‘가톨릭 전통을 유지하는 개신교’ 등의 표현으로 소개할 만큼 성공회는 다양한 빛깔로 사회에 녹아들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로마네스크 양식을 적용한 성공회 성당은 전통적 요소를 절충해 덕수궁과도 잘 어우러진다 ⓒ이선미
성공회성당 역시 굳게 닫혀 있었다. 본당을 돌아서 로마네스크 성당에 한옥으로 들어앉은 옛 사제관 앞에 섰다. 이곳에서 1987년 6월 항쟁이 시작되었다. 오후 6시 성당의 종이 울리자 시내 곳곳에서 경적이 울리며 시위가 시작됐고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사제관 앞에는 그날의 뜨거운 함성을 기억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성공회 성당은 1987년 6월 항쟁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로마네스크 성당에 들어앉은 한옥 사제관이 조화를 지향하는 성공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선미
이후 시청을 지나 명동으로 접어들었다. 우리나라 천주교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신자들이 스스로 교리를 배우며 신앙을 키웠다는 점이다. 선교사가 없이 자생한 그 역사의 시초에 명례방이 있었다. 중국에서 들여온 ‘서학’ 서적을 공부하던 곳으로 당시 역관이었던 김범우가 자신의 집을 모임 장소로 내어놓았다.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명례방 공동체는 와해되고, 김범우는 신앙을 지키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100여 년 뒤인 1898년 5월 명례방 자리에 명동성당이 들어서게 되었다.
서소문역사공원에서 명례방과 김범우의 얘기를 만날 수 있다 ⓒ이선미
암울했던 독재 정권에서 명동성당의 존재는 어둠을 밝히는 횃불이었다. 당시 명동성당은 ‘피신처’였다. 1987년 6월, 명동성당으로 피신한 학생들이 잡혀갈 위기에 처하자 고 김수환 추기경이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 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가라’라고 했던 일화가 유명하다. 성당 들머리에 교황 프란치스코의 모습이 있었다. “우리는 같은 배를 탄 연약하고 길을 잃은 사람인 동시에 같이 노를 젓고 서로 격려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코로나19로 다들 어려운 상황에 있는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같이 느껴졌다.
명동성당 들머리에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가 걸려 있다 ⓒ이선미
코로나19 때문에 여기저기 문이 닫혀 있어서 온전히 목적지를 돌아볼 수 없었지만 서소문 순례길 곳곳에 배인 시간의 흔적을 돌아볼 수 있었다. 상황은 다르지만,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에 대해서도 희망을 기원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민주화 과정에서 어둠을 밝히는 횃불이 되었던 명동성당 ⓒ이선미
필자가 방문한 서소문 순례길은 해설사의 깊이 있는 이야기와 함께 나설 수도 있다. ‘해설이 있는 서울 순례길’은 서울도보관광 홈페이지와 모바일 웹에서 예약을 통해 이용할 수 있다. 이용료는 무료이다. 평일 10시, 14시이며 주말에는 10시, 14시, 15시에 시작한다.
■ 해설이 있는 서울 순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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