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Culture

어중간해 보일지라도

사주는 사이언스라고 하는 친구를 곁에 두고 있으면서도, 한 번도 사주나 타로를 보러 가본 적 없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마주치는 선택과 후회의 순간에 내 의지보다도 점괘에 휘둘릴까 두려워서. ‘당신이 뭔데 내 운명을 규정해?’ 같은 비뚤어진 마음도 함께. 그런 나도 외우고 있는 스스로의 특징이 있는데, 바로 MBTI다. INTJ-T. 나무보다는 숲을 보는 ‘용의주도한 전략가’로, 지식을 배우는 데 효용과 재미를 느끼고 어떤 일을 다루는 데 있어서 매우 계획적으로 행동한다고. 비현실적일 만큼 이상주의자인 동시에 신랄한 비판을 일삼는 냉소주의자란다. 하지만 사소한 잡담에는 효용을 느끼지 못하고 또 능하지 못한 탓에 인간 관계에는 서툴다. 맞아, 맞아. 고개를 끄덕이며 스크롤을 내렸다. 하지만 내가 MBTI 유형을 기억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전체 인구의 2%에 해당하는 이들은 유독 여성에게서는 더욱 찾아보기 힘든 유형으로, 인구의 단 0.8%를 차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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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의 단 0.8%라니, 너무 특별하잖아? 희박함이 꼭 긍정적인 가치를 뜻하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좋아졌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닐 테지. 어릴 때에는 자주 특별하고 싶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 내 인생을 관통한 불행은, 내가 너무 적당히 불행하다는 점이었다. 못 살지도 잘 살지도 않는 집에서 매일 다투는 부모님. 그렇지만 그들은 나에게 사랑을 주었고, 또 그렇지만 나는 자주 죽고 싶었다. 가족들을 슬프게 하고 싶은 마음 없이, 자주 그냥 사라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 정도 불행으로는 불행을 전시할 수도, 나를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들 수도 없었다. 친구들과 자주 웃기도, 언니와 장난 치며 낄낄대기도 했으니까. 그때부터 어렴풋이 알았던 것도 같다. 능력도 불행도 사연도 어중간해서는 아무것도 될 수 없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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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늘 어중간했다. 어중간하게 불행한 (또는 어중간하게 살 만한) 집에서 자란 아이는 어중간하게 자라버렸다. 완벽하려고 애쓰지만 완벽주의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었고, 이성적이라는 말을 자주 듣지만 스스로 느끼기에 감성적일 때도 잦았다. 운동을 잘하는 건 아니었지만 못하는 것도 아니었고, 공부를 잘했지만 똑똑한 것은 아니었다. ‘어중간하다’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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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중간쯤 되는 곳에 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두루뭉술하다.
시간이나 시기가 이러기에도 덜 맞고 저러기에도 덜 맞다
어떤 정도나 기준에 꼭 맞지는 아니하나 어지간히 비슷하다.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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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이 거의 완벽하게 어중간하게 느껴졌다. 모순적인 말 같지만 내게는 너무 자연스러운 말이었다.

그래서일까. 고등학교에서 처음 적성검사를 했을 때, 적성검사지를 설명해준 선생님이 한 말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여러분, 이 검사는 여러분의 진로를 결정하는 데 참고하기 위한 결과일 뿐 답은 아니에요. 만약에 00가 감성적이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00이가 감성적이기만 하다는 뜻은 아니에요. 어떤 x축에서 오른쪽이 감성, 왼쪽이 이성이라고 하면 1만 되어도 감성적이라는 결과가 나오는 거거든요. 만약에 하고 싶은 직업이랑 결과가 다르다고 너무 고민하지는 마세요. 시간이 지나면 100으로 변할 수도 있고, -100으로 변할 수도 있어요. 여러분은 다 이런 저런 x와 y축 사이 어딘가에 있는 거죠.” (시간이 지나 선생님의 말을 온전히 옮겨 쓸 수는 없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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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중간하다는 말은 아마도 -10과 10 사이 어딘가를 말하는 거겠지, 생각하고 나니 -10과 10 사이 어딘가에 비해 -1과 1 사이가 더 어중간했다. 그러면 -0.1과 0.1 사이는 더 더 어중간하고, 그보다는 -0.01과 0.01 사이가 더 더 더 어중간할 것이고…. (이 즈음 수학 학원에서 리미트(limit)의 무한 개념을 배우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중간하다’는 혼자서는 있을 수 없는 개념이었다. 양끝 쪽에 가까운 ‘특별함’과 함께 있을 때에만 존재하는 상대적인 개념. 여전히 나는 50에 비해 어중간한 사람이지만, 그냥 10인 사람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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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이런 글을 읽고는 흡족했다. 일 좋아하는 밀레니얼은 드무니까 합당하게 대우해주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워커홀릭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용의주도한 전략가’ 설명을 읽듯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찍었다. 워커홀릭 밀레니얼인 나는 특별해. 하지만 나는 자주 일과 멀어지기도 한다. 특별하고 싶었는데 자주 평범해진다. 그럴 때에는 마음 속으로 x축을 그려본다. 일을 50만큼 좋아하다가 10만큼 좋아한다고 어중간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실적을 보면 또 스스로 어중간하게 느껴지는 것도 현실이다. 그럴 때에는 x축에 y축을 더해본다. 사람은 하나의 특성만 가진 것은 아니니까. 일을 10만큼 좋아하는 사람 중에 인형을 110만큼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혼자서 가급적 괴상한 척도를 정해본다. y축만으로 안 될 때에는 z축을 또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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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를 가장 특별하게 만드는 힘은, 이렇게 많은 축을 더해보는 능력이라고 곱씹는다. 누군가는 자위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위로하는 이 드문 세상에서 자위도 능력이라고 자위하면서 언니와의 카톡방 공지를 다시 본다. “유 알 더 베스트 플레이어 오브 유어셀프.” 나는 나 자신에게 있어 최고의 플레이어야. 원래 인생은 점이 아니라 선이고, 면이고, 공간일지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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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연재를 쉬기 전에 꼭 이 주문을 나누고 싶었다. “유 알 더 베스트 플레이어 오브 유어셀프.” 이제 특별함은 희소성이 아니라, 애쓰면서 발생하는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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